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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굿 유파인 각심절본,노들본, 구파발본의 유래

愚悟 2010. 2. 13. 14:45

서울굿의 유파

  

     <각심절본의 고비전>                 <한강변의 한남동의 당집>              <은평구의 금성당>

 

 

서울굿은 동서남북으로 굿을 하는 무가와 장단 그리고 춤사위를 비롯한 상차림과 전안을 모시는 방법 등에 따라 조금씩 차이를 보이는데 보통 각심절본 · 노들본 ·구파발본 등으로 나눈다.

이렇게 한양성내를 중심으로 동쪽과 남쪽 서쪽으로 구분하게 된 내력은 오만수라는 무조에 의해서라고 한다.

오만수에게는 딸이 넷이 있어 모두 아버지의 유업인 무업을 이었다고 한다.

그 결과 큰딸인 양씨부인은 개성덕물산 최영장군 부인이 되어서 개성 덕물산의 굿법을 만들었으며, 나머지 세 자매는 한양으로 들어와서 맏언니는 구파발에 자리 잡고 당주가 되었으며, 둘째는 동문 밖의 각심절에 자리 잡아 당주가 되었다.

그리고 막내딸은 우수재 고개 서낭당에 당주가 되어 자리 잡아 각자 굿법을 마련하면서 서울굿의 유파가 나누어지게 되었다고 전한다.

 

그러나 서울굿의 구분은 먼저 사대문 안쪽과 밖의 굿으로 구분하기도 하고, 동쪽과 서쪽으로 구분하기도 하지만 그 당시 한양성내에는 무녀들의 거주를 금지한 터라 모두 성 밖 변두리로 밀려나면서 서로 왕래가 어려워지면서 각자 독자적인 굿을 형성하면서 그 유습이 지금의 각심절본 · 노들본 · 구파발본으로 나누어졌다고 볼 수 있다.

 

먼저 서울 서쪽 또는 북쪽이라고 하는 구파발본의 문서와 굿은 진오기굿이 유명하다고 한다.

서쪽이라고 할 때는 서대문 영천방향을 이야기 하고 북쪽이라고 할 때는 구파발쪽을 이야기 한다. 영천과 구파발은 같은 같은 형태의 굿을 하였으므로 함께 구파발본으로 분류한다.

구파발본은 서울 서북쪽을 중심으로 만들어 진 유파를 이야기 하는데 구파발에 현존하는 금성당과 무악재에 존재하다 몇 번이고 자리를 옮겨야 했던 사신당이 중심이 되었을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세조대왕의 동생으로 단종복위를 꾀하다 발각되어 죽음을 당한 금성대군의 넋을 기리리 위한 당으로 진오기굿이 유명해지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중국으로 떠나는 사신이 오가는 무악재에 자리 잡아 사신들의 무사귀환을 기원하던 사신당은 명성황후가 순종비와 함께 다녀간 휘호가 남아 있어 더욱 역사적으로 의미가 깊은 당이라고 할 수 있다.

구파발본은 서울굿의 유형과 특히 다른 점은 보통 서울무녀들은 대신칼에 한지를 매어 달았지만 구파발본은 대신칼에 오색천을 달았다는 것은 구파발본 무녀들의 활동범위가 서울쪽 보다 문산, 파주까지 광범위하게 활동하였다는 것을 볼 때 지역상으로 북쪽인 까닭에 황해도굿의 유풍에서 비롯되었지 않아 생각한다.

 

또 금성당에도 예전에는 고비전이 걸려 있었다고 하는데 동쪽무당들인 각심절본과 구파발본이 서로 왕래가 잦았다고 이야기 하는 것으로 봐서 동쪽 무당들이 금성당에 와서 굿을 자주 하면서 만들어 걸었다고 생각 할 수 있다.

진오기라는 말은 지노귀의 와전이라고 하는데 그 뜻은 여러 가지 해석이 있다.

지노귀를 한자로 표기하면 지노귀指路鬼와 지노귀地路鬼 두 가지 설이 있지만 그 뜻은 귀신이 저승으로 가는 길을 손가락으로 가르쳐 준다는 뜻이라고 한다.

 

두 번째 서울의 동쪽인 각심절본의 특징은 진적굿과 재수굿으로 유명하였다고 한다.

각심절본이라는 명칭은 각심사라는 절 아래 동네에 무녀가 모여 살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각심사가 존재하였던 위치에 대해서는 이지산은 월계동, 장성만은 장위동이라고 이야기 한다. 그러나 월계동과 장위동이 서로 인접하고 있어 대략 그 부근에 각심사라는 사찰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각심절본의 특징은 전안에 화분을 모시지 않고 고비전으로 모셨다는 것이 다른 지역의 무녀들과 다른 점이다.

각심절본의 대표 무당인 서울새남굿의 보유자였던 고 김유감선생도 전안에는 고비전을 모셨다고 한다.

 

고비전을 한자로 어떻게 적는지 정확하지 않지만 동쪽 무녀들은 자신들을 스스로 낮춰 다른 지역의 무녀들과 달리 전안에 화분대신 종이를 오려서 신령님을 모시면서 ‘고비전’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동쪽지역에서 무녀들이 많이 왕래하였다고 유추되는 대표적인 당집은 왕십리 수풀당과 애기씨당 그리고 미아리 고개의 <되네미서낭>이 유명하였다.

 

왕십리 수풀당 역시 예전에는 서낭으로 더 유명하였다고 장성만은 이야기 한다.

특히 각심절본과 지역적으로 가까워 활동 중심지로 생각되는 곳이 바로 미아리 고개 정상 왼쪽 산마루에 자리 잡고 있던 <되네미서낭>이 아닌가 한다.

미아리고개가 점집 동네로 유명세를 탄 것도 이 <되네미서낭> 존재하였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동쪽지역에서 각심절본의 중심이 되었다고 유추할 수 있는 <되네미서낭>은 90년도 중반에 개발에 밀려 아파트에 자리를 물려주고 사라지고 말았으니 각심절본제의 활동 흔적을 찾기는 더욱 어려워졌다.

 

마지막으로 노들본은 서울 남대문 밖으로 지금 서울역 앞 후암동 고개인 우수현과 노량진 사이를 일컫는다.

그 당시 우수재서낭은 남쪽의 서낭으로 유명하였다.

무조인 오만수의 막내딸이 이곳 우수재에 자리 잡아 서낭굿의 당주가 되면서 ‘우수재서낭굿’은 유명해졌고 이 당굿의 문서가 널리 퍼지면서 노들제본이 되었다고 한다.

노들본제는 주로 한강을 중심으로 강변에 길게 늘어져 거주하고 있었으므로 당굿이나 용신굿으로 유명하였다고 한다.

 

노들본제는 그 후 노량진으로 이동하여 악사들의 집단인 <풍류방>을 결성하여 무녀들과 긴밀한 관계를 이루었기에 노들본제를 노량진이 중심이었다고도 이야기하기도 한다.

특히 <풍류방>에서는 그 당시 과중한 무세巫稅를 감당하지 못하여 무업을 걷어치우는 무녀들이 늘어나 굿이 점점 사라지게 되자 자신들의 일터인 굿이 사라지지 않게 무녀들의 무세巫稅를 일정부분 담당하였다고 전하기도 한다.

이렇게 서울굿의 지역적 구분은 그 당시 성안에 살 수 없었던 무녀들이 성 밖으로 흩어져 살면서 서로 교류가 힘들어지면서 각자 그 지역에서 자기들만의 굿의 형식과 절차를 완성하였기 때문이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