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신할미 이야기

신앙信仰과 종교宗敎의 차이

愚悟 2011. 6. 1. 11:38

신앙信仰과 종교宗敎의 차이

종교는 개인을 구속하지 않는 신앙으로 돌아가야

종교는 이 시대 가장 크게 성공한 사기극

 

갑자기 신앙은 무엇이고 종교는 무엇인가라는 화두에 잡혔다.

사전의 기록을 빌리면 신앙은 “신이나 초자연적인 절대자를 믿고 받드는 일”이라고 되어 있다. 그리고 종교는 “신 또는 초인간적·초자연적인 힘에 대해 인간이 경외·존숭·신앙하는 일의 총체적 체계”라고 되어 있다.

사전에 기록된 내용들을 살펴보면 신앙과 종교는 큰 차이가 없다. 다만 종교는 총체적 체계라는 말이 더 들어갔다.

여기서 ‘총체적 체계’라는 말을 되새겨 봐야 한다,

 

‘총체적 체계’란 정부에서 말하는 종교의 구성요건으로 조직과 경전 그리고 통일된 의식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즉, 종교는 어떤 특정집단이나 권력이 유일신唯一神을 내세우며 경전에 입각하여 통일된 의식을 지속적으로 행하면서 믿고 따르게 조직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신앙은 누가 강요하거나 인위적으로 만들지 않아도 인간들이 스스로 개개인의 정서에 따라 특정 신이나 초자연적인 절대자를 믿고 받드는 것이다.

즉, 신앙은 조직이 존재하지 않고, 특정 경전을 통한 통일된 의식도 없는, 개인의 정서에 따라 혼자 믿고 받드는 행위로 유일신이 아닌 다신多神의 성격을 띠고 있다.

 

이것이 바로 우리 민족의 정서로 우리 민족은 신앙은 존재하였으나 종교는 없었다.

이 말은 우리 민족은 특정집단이나 권력에 의하여 강제로 유일신이나 절대적인 신격을 만들어 믿게 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 대표적인 예로 삼신으로부터 시작된 민족의 많은 신들을 누구의 강요도 없이 관습적으로 스스로 믿고 받들었다.

신앙의 특징은 조직과 경전이 필요 없다는 것이다. 또 신앙은 정기적인 집회를 가지지 않으며 사람들이 자기가 필요로 할 때 아무 때나 가서 믿고 받들면 된다.

그러므로 신앙은 통일된 의식이 아닌 지역에 따른 관습적인 의식과, 특정 경전에 구속되지 않지만, 스스로 자재하는 자재율을 통하여 믿고 받들어 졌다.

그러니 신앙으로 인하여 누구에게 통제를 받거나 강요받는 일은 없다. 스스로 통제하거나 자재하는 것으로, 특정 집단이나 경전 또는 사람이 자재하지 않지만 스스로 자재하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민족의 신앙이라 할 수 있는 무교는 경전이나 조직이 존재하지 않는다. 경전이 없어도 인간의 본성을 깨우치고 우주의 존재하는 모든 사물들의 가치를 인정하여 더불어 잘 살아가는 사회를 만들어 왔다. 이 말은 무교는 자연의 법칙을 순응하고 스스로 믿고 받드는 신앙이었지 특정인 강요하고 통제하는 종교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고구려 소수림왕 2년에 불교가 들어오면서 종교라는 개념이 생겨났다.

종교의 구성요건은 조직과 경전과 통일된 의식이 있어야 한다고 앞서 말했다.

이것은 정부에서 생각하는 종교의 구성요건이기도 하다.

이런 구성요건은 다분히 외래종교를 의식한 것으로 우리 정서에 맞지 않는다.

 

왜 종교의 구성요건을 우리의 정서에 맞게 정의 내리지 못하고 외래종교의 구성요건에 짜 맞추어 민족 신앙을 사이비 종교로 전락하게 만들었다.

그러면 조직과 경전 그리고 통일된 의식이란 구조의 종교가 가지는 폐해를 살펴보자.

먼저 종교 조직은 특정 지도자들의 권력이 되고, 이 권력은 정치권력과 야합하여 몇몇 지도자들의 권력과 이익을 극대화하는데 이용되고 있다.

그 결과 거대한 공룡처럼 비대해진 한국의 개신교는 국교나 다름없는 특권을 누리며 대통령도 무릎을 꿇게 하였다. 또 조직의 발전과 확대를 위하여 타 종교를 폄하하고 공격하여 중교 간, 국민 간 갈등만 부치기고 있다.

 

불교 역시 거대한 조직과 엄청난 재산을 보유함으로써 불경에 기록된 부처의 가르침을 어기고, 탐욕에 눈이 멀어 끊임없이 분쟁을 유발하고 있다.

그리고 조직의 힘을 빌려 경전에 위배되는 그 어떤 사항도 받아들이지 않으며, 각자가 가지는 정체성과 그 나라의 역사마저도 부정하게 만들고 있다.

종교의 경전이란 특정 신격의 우월성을 극대화 하고 세상에 존재하는 미사여구를 다 동원하여 만든 특정인을 주인공으로 한 소설책이다. 그들은 이렇게 몇 사람에 의하여 기록된 경전을 통하여 타 민족의 정체성을 말살시키고 사상을 동화시키는데 사용되고 있다.

 

또 종교는 경전을 통하여 인간의 절대적인 가치관을 심어주고 도덕적 기준을 제시하지만, 인간의 창의성을 무시하고 편협적인 사고를 가지게 함으로써 인간의 모든 행동과 생각을 경전 안으로 구속시키고 있다.

그 결과 경전은 사람들의 의식을 변화시켜 기존 가치관을 무너뜨리고 인간의 자율성과 창의력을 구속하여 종교의 노예로 만드는 도구에 불과하다. 그러나 소설책 같은 경전에 집착하여 중세기 마녀사냥을 비롯한 많은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이 지금 종교들의 현실이다.

 

경전을 들먹이며 남의 나라를 침략하고 살생을 부추기며 온갖 전쟁과 갈등을 일으키는 것은 경전에 억매여 그 종교가 추구하는 사상을 오역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한 뿌리에서 파생되었다고 할 수 있는 유대교, 천주교, 이슬람교, 개신교 등이 보유하고 있는 경전의 자위적인 기록과 해석은 자기들이 받들고 있는 최고신의 명칭도 각각 다르다. 유대교는 ‘아도나이’ 가톨릭은 ‘야훼’ 크리스천은 ‘여호아’ 그리고 무슬림은 ‘알라’라고 하면서 타 종교의 최고신들을 부정하고 있다.

그 결과 수많은 갈등과 분쟁을 초래하였다.

 

불교의 인과응보因果應報란 “사람이 짓는 선악에 따라 그 갚음을 받는 일”이다. 그러면 부처를 믿던 안 믿던 인간들이 스스로 지은 선악에 따라 그 갚음이 따라오는데 부처를 왜 믿고 따르나 의문이 간다.

또 기독교는 사람이 정직하고 올바르게 살 필요가 없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이야기 하는 종교다. 그 어떤 악행을 저질러도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종이 되겠다는 순간 모든 죄가 사라져 버리니까 인간들이 힘들게 깨끗하고 정직하게 살 이유가 없는 것이다.

오늘도 길거리에는 무지한 기독교인들이 ‘믿은 천국 불신지옥’ 이란 현수막을 쳐 놓고 소음 공해를 발생시키고 있다.

 

우리의 민족종교도 역시 마찬가지다.

대한민국의 3대 민족종교라고 하면 천도교, 증산교, 대종교를 들 수 있다. 그러나 민족종교가 3개나 있다는 것도 웃기는 현상이다.

이 종교들은 모두 발생시기가 일제강점기인 19세기로 비슷하다.

그러나 다 같은 민족종교라고 하면서 모시는 절대신명이 다르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며 또 서로의 신명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천도교는 ‘한얼님’ 증산교는 ‘상제님’ 대종교는 ‘한배검’으로 부르고 있으니 과연 이들 종교가 민족종교라고 할 수 있을까 의문이 간다.

 

 

2. 신단수神檀樹와 보제수菩提樹 그리고 생명수生命樹

 

우리 상고사에 ‘신단수神檀樹’ 아래에서 한웅천왕이 배달나라를 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단군세기>를 보면,「한웅천왕 시절 소도에서 제사를 지내고 예법을 숭상하였다. 또한 땅에 제사 지내기 위하여 방구단方丘壇을 만들었다. 각목을 세우고 아버지에게 제사지내며 그리고 산에 웅상雄像을 만들었다. 이때부터 소도에 한웅천왕의 형상을 만들어 세우고 이를 웅상이라고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또 「경인원년(BC 1891) 11세 도해 단군에 이르러 오가에 명을 내려 열두 명산의 가장 뛰어난 곳을 골라 국선의 소도를 설치케 하였다. 많은 박달나무를 심고 가장 큰 나무를 골라 한웅의 상으로 모시고 여기에 제사를 지내며 웅상雄像이라고 이름 했다.」는 기록도 있다.

이것은 우리 민족이 나무를 숭상하는 신앙을 가졌다는 것을 이야기 한다.

이렇게 우리 민족은 한웅천왕이 신단수 아래로 내려와 신시를 열면서부터 나무에 대한 외경심이 생겨났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이러한 외경심은 신목이 되어 인간들에게 재앙을 막아주는 구실과 아울러 복을 주는 목신으로 존재하여 왔다.

 

이렇게 나무가 목신으로 존재하게 된 이유는 나무는 하늘로 솟아 있기에 하늘로 통하는 연결고리로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즉, 신이 강림하는 통로이기도 하고 인간이 신에게 다가갈 수 있는 유일한 길로 여겼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특히 우리민족은 나무에 대한 외경심이 대단하여 서낭제를 지내기도 하는데, 지금 지방에 많이 존재하고 있는 당산나무, 서낭나무가 그 좋은 예라 하겠다. 또 잎 · 꽃 · 과일을 맺는 힘을 주술적으로 여겼는지도 모른다.

 

나무를 신격화한 이야기는 <삼국유사>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데, 수로부인을 빼앗아간 해룡海龍에게 버들가지를 꺾어 노래 불러 되찾았다는 기록이다.

또 벼락 맞은 대추나무에 벽사의 의미를 부여하여 부적을 만들거나 그 나무를 그냥 몸에 지녀도 나쁜 기운이 사라진다고 믿었다. 

제주도 우도에서 자란 소나무는 사귀를 물리친다고 믿었기 때문에 해송으로 비녀나 칼자루, 단추 등을 만들어 몸에 지니고 다녔다고 한다.

 

집안에 금기사항으로 담장에 찔레나무를 심으면 호랑이가 다칠까 염려된다고 하였고, 복숭아나무는 조상의 영혼까지 쫓아 버릴까봐 집안에 심지 않았다.

자귀나무는 부부간의 애정이 더해진다고 믿었고, 엄나무는 나쁜 귀신을 물리치며 석류나무는 자손이 많다고 했다.

수목숭배는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널리 퍼져있다.

 

기독교에서도 나무가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기독경에 나오는 나무는 예수를 상징하는 ‘생명수’를 비롯하여, 지옥을 상징하며 악령과 함께한다는 ‘선악수’, 이스라엘 백성을 의미하는 ‘무화과’, 하느님의 생명과 축복 풍요를 의미하는 ‘올리브’, 하느님의 뜻을 이루도록 해준다는 의미를 가진 ‘포도나무’ 가 나온다.

포도나무는 동이東夷의 창세기인 <부도지>에도 인류를 타락시킨 나무로 등장한다.

 

그리고 불교에서도 나무가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먼저 석가가 깨우침을 얻었다는 ‘보리수’가 있으며, 그리고 근심과 걱정을 없애 준다는 뜻과 근심걱정을 용납하지 않는다는 뜻을 가진 ‘무우수無憂樹’ 와 ‘린비수燐比樹’ 가 있다.

이 ‘무우수’와 ‘린비수’ 는 마야부인이 석가를 놓을 때 붙잡았다고 한다.

 

이렇게 오래 종교에 나무가 중요한 역할을 하면서 등장하는 것은 모두 우리 상고사에서 비롯된 것이라 볼 수 있다.

또 우리 상고사를 살펴보면 그 당시 한인천제나 한웅천왕, 그리고 단군왕검의 신정정치의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기독교 구약에 이스라엘 신정정치의 역사가 등장하는 것이다.

 

종교와 신앙의 공통점은 기도와 주문이 존재한다는 것으로, 종교는 기도와 주문의 대상이 유일신에게 국한되며 일정한 기도문이 존재한다.

그러나 신앙은 일정한 기도문이 없으며, 특정 유일신이 기도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 민족의 기도와 주문에는 그 대상과 방법이 다양하였다.

 

우리 민족이 추구하는 기도와 주문은 개인의 이익보다 집단, 즉 우리라는 개념 속에서 함께 동참하는 무리에게 임하는 주문이며 기도였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신명’ ‘신바람’ ‘얼쑤’ 등과 같은 추임새 등으로 표현되었으며 ‘신명나는 사회’ ‘신바람 나는 사회’ 등은 자기 혼자만이 잘 먹고 잘 사는 사회가 아니라 더불어 잘사는 뜻이다.

 

특히 우리가 국악 공연 중 판소리나 탈춤을 출 때 사용하는 추임새 역시 함께 동참하는 무리에게 신명나게 놀자고 하는 주문인 것이다.

그러나 외래종교들은 우리 민족의 정체성과 개성을 말살하고 자기들의 주입하는 사상에 물들게 하여 종교의 노예로 만들어 버렸다.

우리 민족이 스스로 자재하며 지키는 자재율을 망각하게 하고, 민족 신앙을 사이비 종교로 전락시킨 외래종교에 물든 이 나라가 과연 종교가 추구하는 목적을 완성할 수 있을까 염려된다.

 

지금 한국에서 거대 종교로 자리 잡고 있는 종교들은 진정으로 개인의 독창적인 사고와 창의성을 존중하는 본래의 신앙으로 돌아가야 한다.

경전이나 조직을 이용한 개인의 사고와 행동을 협박하거나 구속이 없는, 개인의 자유로운 사고와 독창성을 존중하는 종교가 되어야 한다. 몇몇 종교 지도자들의 권력과 부를 축적하는 수단으로 타락한 모습을 보여서는 절대로 종교의 존재가치를 찾을 수 없다.

조직이나 경전에 의하지 않고도 스스로 자재하는 신앙생활로 돌아갈 때 종교가 가진 본래 목적인 개인을 비롯한 인류의 평화를 이룰 수 있으며, 종교가 존재하여야 할 가치를 다시 한 번 확인 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