神市와 축제
신시(神市)와 부도(符都)는 나라의 중심지인 서울을 나타내는 말이다.
신시라는 명칭은 한웅천왕시대에 배달나라를 세우면서 사용하였고, 부도라는 말은 단군조선시대에 사용하였다. 이것은 나라의 중심에 하늘에 제를 지내는 천제단을 세웠다는 의미에서 비롯되었다.
노고담의 <역사의 원점을 찾아서>를 보면 「한웅천왕은 신시를 세울 때 태백산에서 남과 북의 방위를 가리키는 우물인 자정(子井)과 여정(女井)을 파고 자정과 여정 사이에 중심인 천제단(天祭壇)을 세웠다. 또 천제단 중심으로 사람들이 모여 살면서 문물을 교환하니 이를 신시라고 하였다.」 는 기록이 있다.
신라 눌지왕 때 박제상 선생이 쓴 부도지(符都誌)<김은수 역해/ 기린원> 제 14장을 보면 「 이에 황궁씨의 후예 6만이 이주하여 지키고, 곧 나무를 베어 뗏목 8만을 만들어서, 신부(信符)를 새겨, 천지(天池)의 물에 흘러 보내, 사해의 제족을 초청하였다. 제족이 그 신부가 새겨진 뗏목을 얻어서 보고, 차례로 모여들어, 박달나무 숲에 신시를 크게 열고, 수계정심(修禊淨心)하여, 천상(天象)을 살핀 후, 마고의 계보(系譜)를 닦아 그 족속을 밝히고, 천부의 음에 준하여 그 어문을 정리 하였다. 또 북진(北辰)과 칠요(七耀)의 위치를 정하여 반석(盤石)의 위에서 속죄의 희생물을 구해 전(奠)을 올리고 」란 기록이 있다.
이것은 신시는 나라의 중심을 말하며 그곳에서 반드시 하늘에 제를 올렸다는 것을 나타낸다. 신시는 본디 세 가지로 나뉘는데 즉, 정치적인 중심지인 부도(符都)에서 행하는 것을 신시(神市)라 하고, 육산물의 중심지에서 열리는 것을 조시(朝市)라 하고, 해산물의 중심지에서 열리는 것을 해시(海市)라고 하였다.
신시를 여는 목적은 그 당시에 제족들이 너무나 넓은 지역에 흩어져 살았기 때문에 오랜 세월을 지나다 보면 사투리가 생기듯이 언어가 달라지고 문화가 달라지고 생활풍속이 달라지고, 그러다 보면 마고의 계보를 잊어버리고, 수계정심하는 자세도 잊어버릴 것 같아 10년에 한 번씩 모여 삼신의 뜻을 기리고, 하늘에 제를 지내면서 우리는 하나라는 동질성을 회복하고 달라진 언어와, 문화를 바로잡을 목적으로 신시를 열었다고 볼 수가 있다. 여러 곳에서 많은 제족들이 모이다 보니 그 지방의 특산물이나, 희귀한 물건들을 가지고 오게 되었고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난장이 열리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바로 지금 재래시장의 원형으로 지금도 시골 5일장에 가면 볼거리가 많은 것은 그 때부터 시작된 모습이 아닐까 한다.
그 당시 여러 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모이니까 당연히 물물교환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재주를 가진 사람들이 자기의 재주를 보여주는 등, 품을 팔아서 경제적인 이익을 추구한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이때 시작된 여러 가지 놀이가 지금의 광대를 비롯한 우리 민속놀이의 근간이 되었다고 부정할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러니 신시라는 것은 시장 개념과 제사 개념을 함께 가지고 있는 복합적인 축제의 기본인 것이다. 지금도 어느 나라 축제가 되었든 간에 그 장소에는 반드시 난장이 펼쳐진다.
축제는 바로 제사의 개념과 난장이라는 시장 개념이 합해져서 이루어지는 민족 동질성 찾는 모임인 것이다. 그 후 치우천왕이 청구에 수도를 옮기고 신시를 열어 다시 한 번 동이족의 단결과 우리는 하나라는 동질성을 찾았으나 그 후 문헌에서 신시를 열었다는 기록을 찾아 볼 수가 없다. 그 후 약 3000년이 지난 후 신라의 경주에서 신시를 열고 대구에서 조시를, 울주에서 해시를 열었다는 것을 기록에서 찾을 수가 있다.
그러나 이때는 벌써 광대한 중원대륙을 한족에게 다 빼앗기고 한반도라는 좁은 땅에서 열린 신시로 마고의 계보를 일깨우는 것으로 만족하였다고 볼 수밖에 없다. 그러니 자연히 제사 계념과 민족의 동질성 회복보다 시장개념이 더욱 발전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21세기를 맞이한 지금까지도 이러한 신시의 개념은 면면히 이어지고 있으니 그것이 바로 축제인 것이다. 그러나 축제(祝祭)는 어느 나라든 간에 다 화려화게 펼쳐지고 있으며 축제가 있는 곳에는 난장이 펼쳐져 외관상으로는 신시의 형태를 띠고 있다. 그러나 신시의 가장 중요한 개념인 제의의 개념이 있다는 것이 외국의 축제와 우리의 축제가 다른 점이다. 바로 마고의 계보 중 적손이라고 할 수 있는 동이족의 축제는 반드시 제의가 필수적으로 행해지기 때문이다. 우리의 축제는 제의를 목적으로 하다 보니 각지에서 많은 사람들이 모이고 자연스럽게 난장이 펼쳐지는, 즉 처음 신시가 펼쳐졌던 원형의 형태를 그대로 따르고 있다 하겠다. 이 신시를 재현하는 축제의 한가운데 우뚝 자리 잡고 있는 제사장이 바로 무당인 것이다. 무당은 신시의 주체이자 삼신의 대리자였다. 우리 상고시대에 무당은 바로 한인천제와 한웅천왕, 그리고 단군왕검인 것이다. 신시에서 나오는 신(神)은 천부삼신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천부인 북두칠성과 해와 달과 삼신인 마고와 궁희 그리고 소희로 일컫는 직녀성을 신체로 모시고 굿을 하였을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
우리를 비롯한 동이족 축제에는 반드시 무당이 등장하여 하늘에 제례를 올리는 형태로 시작 된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난장이 펼쳐져 시장의 형태가 되므로 신시라고 할 수가 있다.
그러나 서양의 많은 축제에는 무당이 등장하지 않는다. 무당이 등장하지 않으니 신시의 가장 큰 목적인 수계정심하고 하늘의 섬기는 제례가 있을 수가 없다. 그래서 서양의 신시는 축제라고도 할 수가 없다. 그냥 볼거리와 난장만이 존재할 뿐이다. 즉 시장개념만 존재한다고 생각할 수가 있다. 그래서 서양의 축제는 관광수입으로 많은 돈을 벌어들이는 모양이다.
무당의 굿을 통하여 하늘과 통신하고 삼신의 뜻을 기리고 천부의 본음을 들으려는 우리들의 노력이 있기에 우리의 축제는 그 당시의 신시의 형태를 그대로 따르고 있다 하겠다.
지금 많은 축제들이 때가 되면 펼쳐지고 있다. 그러나 황궁씨가 처음으로 연 신시의 의미와 형식에 걸 맞는 축제는 강릉단오제를 비롯한 몇 곳 밖에 찾아 볼 수 없는 것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신시를 연 그 시대의 걸맞은 축제를 만들려면 시대적인 배경과 관계자들의 끊임없는 노력이 수반 되어야 할 것이다.
앞으로 더 많은 지방에서 우리 조상이 처음 열었던 신시와 같은 축제가 많이 재현 되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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