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양굿의 대거리
<무당내력> 여섯 번째 그림에는 대거리大巨里가 그려져 있다.
상단에는 전물상을 그려져 있는데 다른 거리의 전물상보다도 큰상으로 그려져 있다.
전물상 맨 앞줄은 과일이 그려져 있고 두 번째 줄은 전臇으로 여기지는 그림 하나만 있지만 진설된 음식들이 생략된 듯 하다.
그리고 마지막 줄에는 떡을 바쳤으며 ‘별성거리’와 마찬가지로 떡 위에는 사람의 모습을 띈 두 개의 형상이 올려져 있고, 떡 뒤로 많은 꽃으로 장식되어 있다.
그리고 전물상 바로 아래는 다른 거리와 다르게 작은 상에 술잔 세 개와 향로를 올려져 있으며 왼쪽 바닥에 술병이 놓여 있다.
아래 무녀는 남철릭을 입고 붉은 호수갓에 깃을 달고 왼손에는 삼지창을, 오른손에는 청룡도를 들고 서있는 모습을 그려 놓았다.
그리고 그 옆에 한문이 쓰여 있는데 해석하면 다음과 같다.
「단군을 청배한 뒤에 성스러운 뜻으로 소원을 이루도록 해준다고 하는데 옛 시절에는 단군의 복색을 사용하였는데 근일에는 최장군 복색을 쓴다.」
이 기록을 보면 대거리는 본래 단군을 모시는 거리였다가 조선시대에 와서 최영장군을 모시는 거리로 변하였다고 볼 수 있다. 또 이 거리는 단군에게 인간의 소원을 이루도록 기원하는 거리라는 것이다.
그리고 무녀의 복색과 손에 들은 무구를 봐서도 장군을 모시는 거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굿이 시대에 따라 변한다지만 이 대거리는 많은 변천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처음에는 단군을 모시는 거리에서 조선시대에 와서는 최영장군을 모시는 거리로, 그리고 지금에 와서는 관운장을 모시는 거리라고 하니 너무나 엉뚱하게 변하였다.
조선 초 무속을 박해하면서 무당들이 조선을 세운 이성계 일파에 끝까지 저항하다 죽은 최영장군을 단군 대신으로 모시면서 조선시대 정책에 대한 반감을 들어내었다.
그러다 다시 관운장을 모시는 거리로 변하였는데 이 때가 아마 임진왜란 후가 아닐까 한다.
임진왜란 후 명나라 장수 이여송은 관운장을 추종하는 사람으로 한양에 관운장을 모시는 사당을 동서남북 네 곳에 세웠다. 그것을 동묘 · 남묘 · 서묘 · 북묘라고 불렀다.
관운장은 삼국지에 나오는 인물로 인과 충을 중히 여기는 최고의 명장임에는 틀림없다.
그런 까닭에 관운장을 모신 사당에 세워지고 난 후, 관운장은 재물을 벌어주는 신으로 받들어지기 시작하였으며 굿거리도 최영장군에서 관운장을 모시는 거리로 변하였다고 생각 한다.
물론 이 대거리를 지금도 ‘최영장군거리’라고 말하는 무녀도 있다.
지금은 대거리의 명칭도 바뀌어 ‘대안주거리’라고 한다. 다른 거리에 비해 술안주를 많이 진설하여 대접한다는 의미다. 그러나 아무리 술을 좋아하는 신을 모시는 거리라지만 ‘대안주거리’라는 명칭은 조금 이상하다.
조선시대 후반기까지도 '대거리'라고 하였고 필자가 알기로도 80년도 초까지도 ‘대거리’ 또는 ‘장군거리’라고 하였는데 언제부터 ‘대안주거리’로 부르게 되었는지 알 수가 없다.
수차례 이야기하지만 굿 속에는 우리 민족의 정체성과 역사가 담겨져 있다. 그런 까닭에 굿이 지니고 있는 의미는 역사적으로 아주 소중한 것으로 굿을 함부로 변형시키거나 명칭을 바꾸어서는 안된다.
분명 <무당내력>에서 대거리는 단군을 모시는 거리라고 했건만, 대거리가 최영장군을 모시는 거리로 변하였고 다시 중국의 장수인 관운장을 모시는 거리로 변하였으니 어찌 통탄할 일이 아닌가?
<무당내력> 그림을 보면 무녀가 붉은 호수갓에 남철릭을 입고 삼지창과 청룡도를 들고 서있다. 호수갓에는 백로의 깃털을 꽂은 것을 볼 수 있다.
이 백로 깃털을 꽂고 굿을 하는 거리는 한양굿에서는 대거리뿐이며, 황해도굿에서는 감응거리 뿐이다.
감응신은 <무당내력>에서 단군이라고 하였다.
그러면 대거리는 단군을 청배하여 대접하는 흥겨우면서도 엄숙한 거리여야지 어찌 최영장군이나 관운장을 모셔서 많은 술과 안주를 대접하는 거리라고 하여서는 안된다.
최영장군과 관운장은 훗날 조선시대에 모셔진 신이므로 대거리를 최영장군이나 관운장을 모시게 되면 굿의 역사가 조선시대로 짧아지는 것이다. 굿은 우리 민족이 제천의식을 시작하면서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기에 대거리를 다시 단군을 모시는 거리로 바꾸어야 한다.
아무리 굿이 시대에 따라 변한다고 하지만 근본을 흔들고 바꾸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으며, 또 그렇게 하다보면 굿이 가지고 있는 역사성과 민족의 정체성이 사라지므로 굿을 결국 미신으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그리고 명칭 또한 대거리에서 대안주거리라 부르니 굿거리에 모시는 신의 존엄성에 어울리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자칫 잘못 생각하면 이 거리는 술을 먹고 노는 거리로 생각할 수도 있다.
지금부터라도 이 글을 읽는 무교인들은 ‘대안주거리’라고 부르는 것을 ‘대거리’로 다시 부르고 또 모시는 신을 최영장군이나 관운장이 아닌 단군이라는 것을 알고 그렇게 전하였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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