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신할미 이야기

서울근교 사외 삼당 답사기

愚悟 2024. 8. 27. 11:44

서울근교 사외 삼당 답사기

 

 

무가에서 자주 등장하는 사외 삼당, 사외삼당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모른다.

사외삼당私外三堂이란 조선시대 사대문 밖에 있는 세 개의 성황당을 말한다.

즉 도성 밖에 있는 성황당으로 <충렬화주당>, <왕십리수풀당> <금성당>을 일컫는 말이다.

특히 <금성당>은 만리동에 있던 밖금성당과 은평구에 있는 안금성당으로 나누어 불렀다. 비록 도성 밖에 있지만 그곳을 찾는 일반인이나 무교인들이 인산인해를 이루었던 곳으로 영험함에 모두 고개 숙이던 곳으로 우리 무교의 성지가 되는 곳이다. 은평구에 있던 금성당이 재개발로 철거 위기에 몰렸지만, 양종승 박사의 노력으로 아파트촌 사이에 새롭게 한옥으로 지어져 있다.

먼저 삼성동에 자리 잡은 <화주당>의 본래 이름은 <충렬화주당>이다. 남한산성 축성과정에서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이인고를 기리기 위하여 세운 성황으로 이인고 장군이 모셔져 있다. 예전에 위치에서 쫓겨나 다시 지었기에 한옥이 아닌 양옥으로 볼썽사납게 지어져 있다.

건물은 사라졌지만, 화분은 남아 많은 무교인들이 찾았지만, 강남의 위세에 눌려 기어이 사라지고 말았다. 화분의 보존 상태가 너무 열악하여 형태를 잘 알 수가 없지만 사라지고 나니 더욱 아쉬운 마음이다.

 

그 당시 각종 규제와 배타적인 시각 등 세월의 도도함에 이겨내지 못하고, 초라하기 짝이 없는 <화주당>의 모습은 마음을 아프게 했다.

예전에는 영혼결혼식을 하는 곳으로 유명한 <화주당>, 강남의 중심지인 삼성동에 자리 잡은 탓에 그 위세에 주눅이 들었는지 초라하기만 한 모습이 바로 우리 무교의 현주소가 아닌가 하는 아픔이 있었다.

 

동대문 밖 <자주당성황>, 예전에 동쪽 무녀들이 반드시 들리며 정성 들였다는 <자주성황당>은 창신동 동망봉 부근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만 되었지, 세월의 무상함에 그 흔적조차 찾을 길이 없었다.

 

예전에 자주동이라고 불렀다는 창신동의 이름에 금시초문이라는 그 동네 어르신들의 말에 허탈함을 느끼며, 정순왕후가 단종을 그리워하며 매일 올라 영월을 바라보고 눈물 흘렸다는 <동망봉東望奉>에 올라 동망봉산신제에 대한 간단한 이야기를 들었다.

 

이어서 미아리 고개에 존재하였던 <되네미성황> 된 놈들에게 잡혀간 사람들이 다시 돌아오기를 기원하는 뜻으로 생긴 미아리고개의 옛 이름이다.

예전에 미아리 고개 정상 부근에 되네미성황이 자리 잡고 있었다.

1990년까지 매원초등학교 뒤편 미아리 고개 정상에 초라하지만 세월의 깊이를 알 수 있는 당 집을 볼 수가 있었다. 그러나 아파트 광풍의 희생물이 된 <되네미성황>은 아프트 건설 현장으로 변해 있어 그 흔적조차 찾을 길 없었다.

 

이어서 찾아간 곳은 자하문 근처에 있었던 것으로 기록이 남아있는 <독낙정성황>, 창의문과 자하문 근처를 헤매다가 말았다. 그곳 역시 빌라로 변해버려 그 흔적조차 알 수가 없었다.

 

이어서 은평구 <금성당>을 찾아갔다. 조선 세조대왕의 동생 금성대군을 기리는 사당인 금성당은 예 건물은 재개발로 사라지고 한옥으로 새롭게 지어져 자리잡고 있다.

은평 뉴타운 공사가 한창일 때 찾아갔던 금성당, 회색 먼지와 시멘트 밀림 속에 초라하게 자리 잡은 금성당의 모습을 찾았을 때는 가슴이 벅찼다.

하얀 먼지 속에서 초라하게 자리 잡고 서 있는 금성당 서낭나무는 너무나 반가웠다.

그러나 반가운 마음도 잠시 금성당은 사방이 공사 펜스로 막아놓아 들어갈 수가 없었다.

그 당시 옮기느냐, 이 자리에 두느냐를 두고 한창 논란이 진행 중이었다. 양종승 박사의 끈질긴 노력으로 새롭게 건립되었다는 것이 자랑스럽고, 현재는 샤머니즘 박물관도 같이 있다.

 

이어서 무악재에서 두 번씩이나 쫓겨 다니다 은평 경찰서 앞 골짜기에서 굿당으로 전락한 사신당에는, 명성황후와 세자빈이 사신을 송별하고 맞이하기 위해 왔다는 현판이 두 개가 걸려 있었다. 그 현판 사진을 찍었지만 찾지 못했다. 그리고 결국 사라져 버린 <사신성황당>이다.

 

그리고 남대문 밖에 존재하였던 <오수재노인성황당>, 서울역에서 후암동으로 올라오는 길이 오수재길이지만 그곳에서는 흔적은 찾을 수가 없었다.

그 동네에서 60년을 살았다는 어르신의 이야기로는 힐톤호텔 부근 쪽에서 옛날에 굿을 많이 하였다는 이야기만 들었다.

 

사외삼당은 아니지만 덤으로 이태원부군당을 들렀다.

부군당 건물은 잘 보관되어 있으나 방문 당시 부군당 터를 자손이 팔아치워 소송이 한창 진행 중인 관계로 예전에 화려했던 제사가 축소되고 굿도 하지 못하고 있다고 하였는데, 지금은 잘 해결되었는지 궁금하다.

 

마지막으로 땅거미가 짙어지는 시간에 <왕십리수풀당>을 들렀다.

그나마 <왕십리수풀당>은 관리하는 무교인이 있어 나름 깨끗하고 정리가 되어있다.

하늘에 계시는 물애기씨를 모시는 곳이라고 한다. 물은 모든 생명의 근본이다. 그러니 물애기씨는 바로 삼신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물애기씨 두 분을 모셨다. 여탐굿을 많이 했던 곳이라고 한다. 또 삼신을 받는 곳으로 유명하였다고 한다.

더 이상 무신도의 훼손을 막기 위하여 표구를 해서 보관을 잘하고 있다. 하지만 옛날의 흔적이 많이 훼손된 것 같아 관리의 어려움과 아쉬움이 엿볼 수 있다.

그나마 이렇게라도 보존하고 있는 당주 무교인에게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다.

 

이런 시설물들을 지자체나 서울시에서 민속 유산으로 지정하여 관리를 하는 것이 마땅함에도 개인이 관리하고 있다는 것이 너무 서글픈 현실이다.

성황이라는 말은 <부도지>를 보면 작은 소도라고 하였다. 즉 소도와 같이 하늘에 제사를 드리는 신성하고 엄숙한 곳이다.

성황당과 같은 의미를 지닌 일본의 신사는 국가나 세습 신주가 관리를 잘해서 현재 엄숙한 성지로 변해 있다.

 

우리 민족의 정체성과 사상을 담고 있는 성황당이 외래문화에 의해 비틀거리고, 경제 논리에 의하여 사라지고 황폐해지는 모습들을 바라보면서 우리 민족의 정신이 바로 서는 날이 언제일까 안타깝다.

 

우리 민족의 정체성이 바로서기 위해서는 현장에서 활동하는 무교인들의 책무가 막중하건만 그런 책임감을 느끼는 무교인이 과연 몇 명이나 될지 하는 생각에 마음이 답답하다.

사라진 성황당이나 현존하는 성황당 터에 정복자처럼 기독교의 십자가가 우뚝 서있다. 하늘을 찌를 듯 서 있는 십자가는 우리를 보고 못난 후손들이라고 조롱하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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