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속 이야기

무속 단체의 변천과정

愚悟 2024. 12. 14. 11:47

무속 단체의 변천과정

 

무속인 단체는 어디서 시작하여 어떻게 변해 왔을까?

조선 후기에 무당들의 친목·권업(勸業장학·공조 등을 목적으로 조직된 단체로 신청(神廳)이 있었다. 신청은 소규모의 모임으로 주로 학습을 목적으로 했다. 재인청(才人廳)은 재인(才人무부(巫夫광대(廣大) 등이 구성한 자체 조직으로 지금의 엔터테인먼트, 즉 재인들을 나라 행사나 관청에 연결하는 역할을 했다. 재인청은 세습무계(世襲巫系)의 무부들이 판소리와 악공 그리고 줄타기 광대 등으로 구성되어 굿 이외에 각종 연희에 차출되어 연행했기에 재인청에 소속되어 있었다.

조선이 일본에 패망하기 전까지 서울에는 무당의 교육기관이라고 할 수 있는 도가(禱家)4곳이 있었다고 한다. 이것을 사도가 라고 하는데 사대문 밖에 존재하면서 무당들의 제의 의례와 예법 그리고 춤을 가르치는 곳이라고 하는데 일종의 신청이다.

그 당시는 세습무와 강신무의 업무는 정확하게 구분되어 있었다는 것을 여러 기록으로 알 수 있다. 즉 강신무들은 점을 보고 굿 날을 잡으면 세습무들이 굿을 주관하는 서로 상호보완 관계였다. 한양의 경우 무당은 반드시 사도가(四禱家)에서 교육받은 후 굿을 하였다고 한다.

 

사도가의 위치는 지금 회현동에서 남산을 지나 동작동까지를 담당하던 <우수제도가>, 구파발 부근을 담당하던 <구파발도가>, 그리고 사하리라고 부르다가 <되넘>이라고 불렀던 미아리 고개 넘어 장위동 부근 <사하리도가>, 그리고 마지막 도가로는 정확하지 않지만, 성안에 있었는데 경희궁 옆이라고 추측한다. 또 아현동에는 <산대도감>이라고 하여 산대놀이를 총괄하던 곳이 있었다고 한다.

도가의 우두머리를 패두(霸頭) 또는 도방(禱方)이라고 불렀는데 패두의 권위는 절대적이었다.

 

이렇게 사도가가 지속되어 오다 조선이 패망하고 1920년대 무속을 배척할 때 일본인 고미네(小峯源作)’가 숭신인조합(崇神人組合)을 결성하여 무녀들을 관리하였다. 본부를 경성에 두고 전국 30여 곳에 지부를 둔 단체로 경성의 무녀 200명이 가입하였다. 1933년 조선의 무당은 11,690명이며 무녀는 8,227명이었다. 총독부는 숭신인조합을 통하여 무당들을 관리하고 굿을 통한 민중들의 결집을 사전에 파악하고 통제할 수 있었다.

 

그 후 해방이 되고 난 뒤 반공의 국시로 삼는 국가의 국시에 따라 1955년경 대한승공경신연합회(大韓勝共敬信聯合會)라는 간첩 신고하는 무당 조직이 결성되었다.

초대 회장은 그 당시 반공 검사로 유명한 오재도 검사가 맡았으나 실제로 회장으로 활동은 하지 않고 직함만 사용한 것 같다. 그 후 손명진이 회장을 하다 그를 이어서 작고한 최남억 회장(2006년 사망)40년 가까이 대한승공경신연합회를 이끌어 왔다. 대한승공경신연합회는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면서 <승공>이란 단어가 남북 화해 물결의 정서에 반한다고 여겨 <승공>이라는 단어를 삭제하고 <대한경신연합회>로 명칭을 개정하여 행정자치부 등록 사단법인으로 다시 출범하였다.

 

그 후 경신연합회의 운영에 불만을 품은 조직원들이 경신연합회에서 뛰쳐나와 조직한 단체가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지금 존재하는 단체로는 <대한경신연합회>를 비롯하여 <한국무속협회> <한국무속인총연합회> <한국무속인협회> <한국민속문화예술원> <한국설화신화토속문화진흥협회> <한국민속문화경신연합회> <()대한무속회> <()대구경북민속문화연구보존회> 등 많이 있다. <천우종> <단군신앙불선종> 등 기억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한 이름으로 불교의 한 종파로 존재하고 있다.

그리고 무속을 무교로 종교화하겠다는 신념으로 사단법인 한국민족종교협의회에 가입을 하여 무속을 무교로 전환을 꾀하였으나 정부로부터 공식적인 인정을 받지 못하였다. 그러나 정부는 헌법상 정교분리 원칙에 따라 특정 종교를 승인하거나 인정하는 절차가 없다고 선을 긋는다. 문체부 관계자는 "민족종교협의회는 문체부가 허가한 법인이지만, 종교를 허가하거나 인정해 준다는 개념은 아니다"라며 "특정 교단의 가입 여부는 (정부가 아닌) 법인 정관에 명시된 기준과 절차에 따라 결정된다"고 설명했다.

 

현재 많은 무속단체가 있으나 무교의 발전을 위한 여러 가지 제도적 장치는 전혀 없는 상태다. 무속 피해에 대한 자정 노력, 무교인을 바라보는 부정적 사회적 시각, 무교인의 사회적 권익향상, 무교인 자질향상 등을 위한 그들의 노력과 역할은 거의 없다고 할 수 있다. 무교인의 목소리를 하나로 통일하기 위한 무속단체장협의회가 필요한 시기가 아닌가 한다. 

 

이러한 현실은 무속단체에 관한 정부의 관심이 전혀 없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 결과 무속단체가 어디에 몇 개의 단체가 있는지 기본 조사조차도 되어 있지 않다. 무속단체의 숫자와 단체에 속한 무속인들이 정확하게 몇 명인지 통계가 없다는 것은 무교가 대한민국에서 가지는 사회적 위치를 말해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