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부경 天符經>의 유래
<천부경天符經>은 한 민족 최고(最古)의 나라로 알려진 한국桓國에서 비롯되어 구전되어 전해 오던 중 한웅桓雄의 명을 받은 <신지혁덕新誌赫德>에 의해 최초로 녹도문鹿圖文으로 기록되었다.
그 후에 신라의 최치원이 옛날 비석에서 신지(新誌- 단군시대에 왕검의 명령을 전하고 출납과 기록을 담당했던 벼슬의 이름으로 앞의 신지혁덕과는 다른 사람 임)가 쓴 전자篆字로 된 고각본古刻本을 찾아내어 그것을 다시 첩帖으로 만들어 세상에 전하게 된 것이다.
배달겨레의 거룩한 3대 경전으로 조화경인 <천부경>과 교화경인 <삼일신고> 그리고 치화경인 <참전계경>이 있다. 총 81자로 구성된 <천부경>은 한웅께서 태백산(백두산) 신단수神檀樹아래에 내려오셔서 신시를 열어 홍익인간弘益人間을 위하여 만백성을 가르칠 적에 조화의 원리, 곧 우주 창조의 이치를 81자로 풀이한 진경眞經이라고 한다.
<천부경>은 고려 말까지 전해져 내려오다 중국을 상국으로 모시며 소중화주의를 표방하는 조선왕조에 와서 민족의 최고 경전인 <천부경>은 금서가 되어 지하 속으로 숨어들었다.
천자국인 중국의 역사와 사상을 뛰어넘어, 대우주의 창조와 원리를 이야기하는 <천부경> 등 민족정기를 내세우는 고서古書들은 중국의 심기를 어지럽힌다는 웃지 못 할 이유에서다.
그 후 일본에 의하여 조선이 강제로 합병된 1916년 민족정기를 되찾아야 하는 절박한 시기에 대종교도 계연수桂延壽가 묘향산 석벽에서 이를 발견하여 1917년 인편으로 탑본을 대종교에 전하게 되어 비로소 다시 맥을 잇게 되었다.
갑골문으로 된 이 천부경은 농은農隱 <민안부閔安富>의 <농은유집>에서 발견된 <천부경>이다.
농은 <민안부>는 목은 <이색>, 포은 <정몽주>, 도은 <이숭인>, 야은 <길재>, 수은 <김충한>과 더불어 6은六隱으로 불리었던 충신으로 조선이 개국하자 고려신하로서 도리를 다하지 못했다며 두문동(杜門同)에 은거한 72현 중의 한사람이다.
주목할 점은 조선조 <이맥>이 <태백일사>에서 “세상에 전하는 바 목은 <이색>과 <범세동>은 모두 <천부경>을 주해하였다”고 증언한 점이다.
<이색>은 <민안부>와 당시 교분이 두터웠고 <범세동>은 <민안부>와 같이 두문동에 들어간 72현 중의 한사람이다. 이는 <민안부>도 <천부경>을 공유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즉 고려충신 72현들 사이에서 <천부경>은 여러 부 작성되어 귀중하게 보관되었고, 지금 전해지는 농은 <민안부>의 <천부경>은 그의 후손인 <민홍규>가 2000년 초 <송호수> 박사를 찾아가 선보임으로써 공개된 것이다. 또 주목할 점은 민족경전인 <삼일신고>의 내용 중 발해 문왕이 지은 <삼일신고봉장기>에 단군이 신지에게 <삼일신고>를 그리라는 명을 내렸다는 구절이 나온다는 것이다.
<천부경>이 <삼일신고>와 한 쌍임을 고려할 때 천부경에 대해서도 동일한 그림문자로 돌 위에 새겼다는 추정이 가능해진다. 또한 "후조선기"에는 ‘기자箕子가 부여의 <왕수긍王受兢>을 초빙해 박달나무에 은문殷文으로 삼일신고를 쓰게 하여 그것을 읽었다.’라고 기록이 있다.
종래 기자동래설箕子東來說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이 지배적이지만 일반적으로 기자는 은나라의 현인(賢人)으로 주(周)나라 무왕(武王)이 은나라를 빼앗자 B.C 1122년에 동쪽 조선으로 들어와 기자조선을 건국한 이로 알려져 있지만, 기자조선은 고조선 변방의 한 지역으로 고조선의 진한 마한 변한 중에서 변한에 세워진 고조선의 제후국이다.
기자 건국이 BC 1122년이면 지금으로부터 3122년으로 은허 갑골문 시기와 일치한다.
갑골甲骨문은 속칭 한자漢子라 불리는 동방문자의 가장 이른 시기의 형태로 알려진 문자이다.
갑골문이란 명칭은 그 문자가 주로 거북껍질(龜甲)이나 소의 어깨뼈 등에 칼로 새긴 것에서 유래된 것으로 1,899년 중국 하남성 은허殷墟에서 처음 발견되었다. 갑골문은 은왕조(BC 3400 ~ 3100)때 도성의 유적지인 은허에서 출토되어 은허문자라고도 한다.
이를 종합할 때 <민안부>의 <농은유집 천부경>은 기자의 초빙招聘 및 지시 하에 <왕수긍>이 삼일신고와 함께 은문(은허갑골문)으로 쓴 진본을 후대에 일급 서예가가 지금으로부터 최소 6백 년 전 이상의 옛날에 정밀모사한 모사본으로, <왕수긍>이 쓴 당시 연도는 지금으로부터 약 3100년 전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기자 이전의 원본 <천부경>, 즉 단군왕검의 배달나라, 나아가 한웅천왕시대 신시국의 <천부경>까지 고려한다면 <천부경> 자체는 그보다 훨씬 멀리까지 소급된다.
이러한 역사를 가지고 있는 천부경은 우리 민족의 최고의 경전으로 많은 사람들이 천부경의 참뜻을 깨우치고자 끝없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으며 심지어 미국의 대학에서까지 천부경 연구에 열을 올리고 있다.
이러한 관심과 열정으로 <천부경>을 풀이 한 많은 책들이 출판되어 시중에 나돌고 있다.
그러나 그 책들을 보면 항상 2%가 부족하다는 느낌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그러던 참에 삼신교의 월광 조승수 선생이 새로운 해석을 제시하였다.
그것은 다른 글자와 달리 천부경 전문에서 네 번이 나오는 <없을 무無>자를 <무당 무巫>자로 해석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기독교의 성경이 이스라엘 왕들의 신정정치를 기록한 역사서라면, 우리의 상고사 역시 우주의 원리와 창조를 이야기 한 <천부경>의 81자와 천부경을 풀이하여 교화경으로 사용한 <삼일신고>의 366자, 이를 다시 풀이하여 인간의 도리를 366가지로 나뉜 치화경인 <참전계경>을 기본사상으로 통치한 신교, 즉 무교로 다스린 신정정치라고 생각했을 때, <천부경>의 <없을 무無>를 <무당 무巫>자로 풀이하는 것도 억측이 아니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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