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 내림굿이란 명칭을 바꿔야 한다.
무교는 무당이 되기 위하여 반드시 거쳐야 하는 통과의례로 내림굿이란 절차가 있다.
그러나 이 내림굿이란 말을 그대로 해석하여 없는 신을 억지로 하늘에서 받아서 내려주는 것으로 해석하여 내림굿을 남발하고 그에 따른 많은 오해와 다툼만 남았다.
또 스스로 신을 구하지 못한 것을 탓하지 않고 내림굿을 해 준 선생들이 굿을 잘못하여 신을 받지 못하였다고 불평을 하며 불미스러운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이렇게 된 것은 장사꾼 같은 무속인들의 탐욕에서 조그만 신기만 보여도 내림굿을 시키는 무속의 풍토에도 문제가 크지만, 무교 전체가 내림굿이란 용어 때문에 하늘에서 신이 내려오는 것으로 착각을 하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삼일신고 ‘신훈’편을 보면 ‘자성구자 강재이뇌自性求子 降在以腦’란 말이 있다.
이 말은 신은 하늘에 계시는 것이 아니라 내 뇌 속에, 자리 잡고 계시니 스스로 본성을 일으키고 깨우쳐서 구해야 한다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본성을 깨우치면 뇌 속에서 스스로 일어나는 것이 신인 것이다.
그러나 삼일신고의 이 귀중한 가르침을 잊어버리고 무조건 하늘에서 신이 내 몸으로 내려오기만 바라는 것이 바로 지금의 내림굿이다.
내림굿을 할 때 소위 신을 잘 받아들이지 못하고 그 결과 말문을 잘 열지 못하는 사람들은 스스로 여러 가지 장벽을 만들어 숨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스스로 무당이 맞는지에 대한 의심을 비롯하여 부끄러움, 체면, 그리고 신을 받아들일 간절함 등이 부족한 사람들이다. 이런 것들은 신과 통신하는데 방해가 되기 때문에 내림굿은 정신없이 뛰게 만들어 아주 녹초를 만드는 것이다.
어느 사람은 무당 ‘巫’자에 사람인자가 가운데 있는 것은 무당이 뛰어 공중에 떠 있는 모습을 그린 것이라 한다. 사람이 공중에 뜰 수 있을 때에는 무아지경에 들어 자신을 버리고 자신을 느끼지 못할 때 가능한 일이다. 이럴 때만 신과 만날 수 있고 통신할 수 있기 때문에 내림굿은 뛰면서 시작하여 뛰면서 끝나는 것이 아닌가 한다.
그러면 내림굿이란 용어 대신 무엇으로 바꿔야 할까?
내림굿이란 바로 인간에서 신과 통신할 수 있는 또는 신선의 세계로 들어가는 첫 문을 여는 의식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무당이 가지는 사명이 무엇인지 스스로 깨달아야 하고 그 깨우침을 많은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것을 깨우치고 가르칠 민족종교인 무교의 사제로 다시 태어나기 위해서 반드시 거쳐야 하는 통과의례의 명칭으로 신내림굿이란 말보다 전계의식佺戒儀式이라는 말이 훨씬 역사성과 민족의 혼이 담겨 있으며, 미신이라는 오명을 벗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단군세기>에 「BC 2183년 부루 단군께서 붕어하시니 이 날 일식이 있었다. 산짐승도 무리를 지어 미친 듯 소리를 지르고 백성들은 심하게 통곡했다. 그 후 백성들은 집안에 땅을 골라 단을 설치하고 흙 그릇에 쌀과 곡식을 가득 담아 단 위에 올려놓았다. 이를 부루단지라 부르고 업신으로 삼았다. 또 완전한 사람이 받는 계명이라고 전계佺戒라고도 불렀다.」는 구절이 있다.
여기서 전계佺戒란 완전한 사람이 받는 계명, 또는 신선이 되기 위한 계명, 또는 신선이 내려 준 계율이라고 해석할 수 있으니, 단순하게 신내림굿 보다 훨씬 깊은 뜻을 가지고 있다 하겠다.
그리고 전계의식의 근본은 일신강충一神降衷으로 본성의 발현이며, 본성의 발현이 이루어짐으로써‘자성구자 강재이뇌自性求子 降在以腦'’ 즉, 스스로 내 뇌 속에 있는 본성을 영성靈性으로 전환하고 높여나가는 것으로 삼아야 한다.
전계佺戒는 곧 참전계경으로 연결된다. 참전계경이란 신이 내려준 계율로 완전한 사람이 되기 위하여 경계하고 조심해야 할 일들을 366가지로 구분하여 깨우침을 주는 경전이다.
훈민정음 정운正韻에 참은 神이라고 했다.
그러면 참전계경을 깨우치고 나면 완전한 인간 또는 신선이 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지금까지 무교에서 신을 받을 때 사용하였던 ‘신 내림굿’이란 용어는 전계의식으로 바꾸어야 내림굿이란 용어에서 오는 오해를 불식시킬 수 있다.
그리고 전계의식이란 말 속에서 민족종교인 무교의 사제로서 갖춰야 할 몸가짐과 사명이 무엇인지가 확실하게 나타난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함으로써 무교가 미신이라는 오명에서 벗어날 수 있는 첫걸음을 내 딛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