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속 이야기

축제연구포럼 발제문2

愚悟 2013. 6. 5. 18:25

 

 

그 당시 굿을 하는 장소를 나타낸 기록이 있다.

 

土地高者曰丘 因高以事天 高於地上이란 기록이다. <강희자전>

토지고자왈구 인고이사천 고어지상

 

땅이 높은 것을 구라고 한다. 높으므로 하늘을 섬기는 일을 한다. 고로 땅위에 있다. (丘事天)

 

이 기록은 바로 하늘을 섬기는 장소를 기록한 것으로 바로 천제天際를 올리는 장소를 나타낸 것으로 볼 수 있다.

 

因下以事地 故於澤中 <강희자전>

인하이사지 고어택중

 

낮게 있음으로 해서 땅에 제사 지낸다. 고로 물 가운데 있다.(丘事地

이 기록은 지신地神에게 제사를 하는 장소를 나타낸 것이다.

 

또 굿을 할 때에는 반드시 모를 꽂고 반드시 춤을 추었다는 기록이 있다.

丘非人爲之曰丘 丘前高後下旄 <강희자전>

구비인위지왈구 구전구후하모

 

구는 사람을 위한 언덕이 아닌 것을 구라고 한다. 언덕은 앞이 높고 뒤가 낮은데 모를 꽂는다.

 

그 당시 제사를 지낼 때는 반드시 모를 혈구에 꽂았다는 것을 기록한 것이다.

이 모를 꽂는 풍습이 지금도 남아 있다.

바로 굿을 할 때 떡시루에 서리화를 꽂거나, 마을굿을 할 때 봉죽화 또는 서리화를 크게 만들어 세우는 것이다.

그리고 사찰의 당간지주 역시 이 모를 꽂는 풍습이 전해진 것이다.

단군조선 때 시작되어 <>로 이어진 무천舞天은 바로 하늘을 향해 춤을 추었다는 뜻이다.

또 영고迎鼓는 북을 치며 마지 한다는 의미로, 동맹東盟은 동쪽하늘에 뜨는 해와 달에게 짐승의 피로써 해혹복본을 맹세하는 행위이므로, 이것들은 바로 동쪽에 제물을 차리고 북을 두드려 춤을 추면서 해와 달이 뜨는 것을 맞이했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이 지금도 행하고 있는 일월마지 굿이다.

그러다 부루단군 시대에 와서 하늘만 위하는 굿이 아닌 조상을 추모하는 의식과 팔가八加에서 단군왕검을 숭배하는 의식을 종족의 특징을 살려 만들어지면서 여러 형태의 굿거리가 생겨났다고 해석할 수 있다.

 

조선시대에 만들어 진 <무당내력>이라는 책을 보면 굿을 할 때는 칠성제석거리를 비롯한 모든 거리에서 반드시 단군을 먼저 청배를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은 부루단군 시절에 우리가 하는 형태의 굿거리가 생긴 것으로 유추할 수 있다.

그러면 무당의 시작은 언제인가?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소장된 가람문고본에 난곡蘭谷이라는 호를 가진 사람이 조선조 말기에 무당에 대한 기록을 <무당내력巫黨來歷>이란 책으로 남겼다.

 

이 책에 서문에상원 갑자 103일 신인이 태백산 박달나무 아래에 강림하니 이가 바로 단군檀君이다. 이에 신교를 창설하여 교화시켰다. 장자 부루扶婁는 어질고 복이 많은 까닭에 인민이 존경하고 신임하여 후일 터를 골라 단을 쌓고 토기에 벼 곡식을 담아 풀을 엮어 가려 놓으니 이를 가르켜 <부루扶婁단지> 또는 <업주가리>라고 하였다. 매년 시월에 새곡식으로 시루떡, , 과실을 올려 치성 기도하였다. 기도 시에는 반드시 나이 많은 성숙한 여자를 쓰는데 세상에서는 이 사람을 무인巫人이라고 불렀다. 그 후 무인의 수효가 증가하여 무당이라고 이르게 되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상고시대의 무당은 하늘에 제를 올리고 백성들에게 계를 가르쳐 교화하는 것을 주 임무로 하였기 때문에 당연히 한인천제, 한웅천왕, 단군왕검 그 자체가 제사장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기록을 보면 무인巫人이라는 공식적인 말이 부루단군이 돌아가시고 백성들 사이에 일어났던 부루단군을 추모하는 과정에서 자연적으로 생겨났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렇게 부루단군을 추모하는 과정에서 나이 많은 성숙한 여자들에게 영적인 힘이 생기게 되면서 자연적으로 발생한 무인이라 불렀다고 했으니 제사장이 아닌 일반 백성들 사이에서 처음으로 무당이 탄생하는 과정이다.

<삼한관경 본기 제4한웅천왕이 제사를 지내려 갈 때 풍백은 천부를 거울에 새겨 앞서가고 우사는 북을 치며 주위를 돌면서 춤을 춘다.라고 하였다.

 

여기서 풍백이 천부의 거울을 들고 앞서갔다는 것은 거울은 태양이며, 신체神體로 왕권을 상징하는 것이다.

이것은 지금 무당들이 지니고 있는 명두明斗로 볼 수 있다.

또 우사가 북을 치며 주위를 돌면서 춤을 춘다는 것은 하늘의 신을 맞이하러 가는 사람, 즉 무당들이라고 할 수 있다. 북을 치면서 주위를 돈다는 것은 지금 여러 명이 소고를 치며 원을 그리며 도는 소고춤으로 전해졌다고 생각한다.

 

<설문해자>

能劑肅事神明也 在男曰覡 在女曰巫 라 하였다.

능제숙사신명야 재남왈격 재여왈무

<초어楚語>

神明降之在 男曰覡女曰巫 란 기록이 있다.

신명강지재 남왈격여왈무

, 남자 무당은’, 여자 무당은 라는 기록이다.

을 축이라고 한다.

남자 무당인 이 하는 종교행위는 제사를 주관하고 축문祝文을 읽는 행위이다.

오늘날 법사라고 불리는 경을 읽는 사람들이 모두 남자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들의 의식에서 제사의 기틀이 마련되었다고 볼 수 있다.

여자 무당인가 하는 행위는 하늘에 원하는 바를 몸짓으로 표현하였는데 그것이 지금의 굿으로 발전하였다고 볼 수가 있다.

 

<설문해자> 를 이렇게 기록하였다.

女能事無形 而舞降神者也 象人兩袂舞形

여능사무형 이무강신자야 상인양몌무형

여자가 형체가 없는 일을 능하게 하는 것은, 춤을 춤으로써 신을 내려오게 하는 자로, 긴소매의 옷을 입고 춤추는 사람의 형상이다.

 

이 기록은 무당들이 굿을 할 때 소매가 긴 옷, . 철릭이나 장삼을 입고 춤을 주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산해경/해외서경>의 기록을 보면 무함국巫咸國에 대한 기록이 나온다.

무함국은 여축의 북쪽에 있다. 오른손에는 푸름 뱀을 왼손에는 붉은 뱀을 쥐고 등보산에 있는데, 이 산은 여러 무당들이 하늘로 오르내리는 곳이다.

 

, 무함 무즉 무반 무팽 무고 무진 무례 무저 무사 무라 등 열 무당은 무함국에 거주하던 무당이며, 이들은 최초의 신의神毉였을 것으로 생각하게 하는 기록이 있다.

<희남자 설산훈>醫師在女曰巫 의사재여왈무라는 말이 있다.

 

<대황남경>를 보면 무산巫山이라는 곳이 있는데 그 서쪽에는 황조黃鳥가 있다. 천제의 약을 넣어둔 곳간이 여덟 채인데 황조가 무산에서 이 검은 뱀을 살피고 있다.라는 기록이 있다.

 

<해내남경>에도 무당들은 불사약을 가지고 있다는 기록들이 나오는 것으로 봐서 그 당시 무당들은 제사장의 개념보다 신의神醫로서 존재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말은 바로 무녀가 바로 의사라는 말이다. 지금도 병원이나 의사라는 뜻의 ’()자에 무당이라는 뜻이 담겨 있다.

 

 

 

3. 고구려의 무교

 

고구려의 巫風을 살펴보면 무당이 사람의 병을 알아맞히고 뱃속의 태아의 후를 알아맞히며 능히 전재지이 재앙을 예언 한다.

무당은 인귀人鬼가 자기에게 내렸다고 말하고, 시조와 왕사에 제사지냈다.

그 당시 국가의 재난이 있을 때 반드시 사무師巫에게 물은 것을 알 수 있다.

 

고구려 시대에 관한 기록은 삼국사기에서 찾아볼 수 있다.

유리왕 19(AD1) 교제를 지낼 때 제사에 쓸 돼지가 도망가자 탁리와 사비가 돼지의 각근을 끊어버려 왕이 그들을 구덩이에 던져 죽어 버렸다.

그 후 왕이 병이 들어 무당이 말하길 탁리와 사비가 빌미가 된 것이라 하여 굿을 하자 곧 병이 완치되었다.

 

차대왕 3(AD148) 무당이 호괴狐怪를 말하여 왕에게 덕을 닦기를 권하였다.

산상왕 13(AD209) 무당이 뱃속의 아이가 왕후가 될 것을 예언하다.

동천왕 8(AD234) 태후 우씨가 죽은 후 무당이 왕신이 내려 능 앞에 소나무 일곱 겹으로 심었다

보장왕4(AD645) 여름 5월당나라가 침공 시 주몽사에 무당이 제사 지내다.

 

 

4. 백제의 무교

 

백제는 삼국의 다른 나라와 달리 무속의 기록이 별로 없다.

백제의 근본이 부여와 고구려라는 것을 생각하면 백제의 무속도 고구려와 비슷하지 않나 유추해 볼 수 있다.

후주서백제는 음양오행의 술을 풀이하였고』《삼국사기/백제본기에 시조 온조왕 25년에 왕궁의 우물물이 넘치고, 머리하나에 몸이 둘 달린 소가 태어나자 일관日官에게 물었는데, 여기서 일관이 바로 무당이라고 볼 수 있듯이 백제도 역시 무풍巫風을 숭상하였음을 알 수 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의장왕 20년에 귀신이 백제는 망한다.하고 땅 속으로 들어가 버려 그곳을 파보니 거북이 등에 백제는 월륜月輪같고 신라는 월신月新 같다는 의미를 무당에게 물으니 차면 기울고 차지 않으면 점차 차게 된다고 하니 무당을 죽여 버렸다는 기록이 있다.

 

 

5. 신라의 무교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보다는 무풍이 훨씬 강했다는 것을 기록 등으로 알 수 있다.

신라 방언에 무당을 차차웅次次雄이라 하는데, 을 무당이라 하는 것은 신시 환웅으로 비롯되었다고 한다.

남해 차차웅이 그의 친누이 아노阿老로 하여금 시조의 사당에 제사를 주관하게 하였다는 기록으로 봐서 신라도 역시 무당으로 제사를 숭상하고 귀신을 섬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차차웅이 무당이니 아로阿老 역시 무당임을 알 수 있다.

 

신라는 삼국에서 불교를 가장 늦게 국교로 공인한 나라로 법흥왕 15년에 이차돈의 순교를 계기로 불교를 공인하였는데 고구려나 백제보다 155년이 늦었다는 것은 그만큼 무풍이 거셌다는 것을 말해준다.

또 신라는 법흥왕이 율령을 반포할 때까지 신라왕들의 호칭이 거서간 이사금, 차차웅, 마립간으로 호칭한 것은 왕권을 상징하기 보단 제사장의 개념이 훨씬 더 강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때까지 신라의 모든 정치는 6부족장들이 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신라의 금관이라는 것 역시 왕권을 상징하는 것이 아니라 제사장이 천제를 지낼 때 썼다고 볼 수 있다.

 

김유신에 관한 민간설화에 천관녀天官女의 집을 찾아간 백마의 목을 쳤다는 것은 그 당시 무당이 중심세력에서 밀려 더 이상 국가의 중대사를 논하는 대상이 무교에서 불교로 넘어갔다는 것을 반증하는 대목이다.

여기서 천관녀를 기생으로 전하고 있지만 사실은 신녀 즉, 무당이다.

또 김유신의 어머니가 萬明부인이다. 만명이란 이름에서 그녀도 무당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그 이유는 무당으로 활동하지 못하고 죽은 사람을 만명, 또는 말명신이라고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고구려 소수림왕 2(372)에 불교가 유입되면서 그 당시 왕권강화가 최대의 목표였던 왕들은 왕권강화를 위하여 불교를 국교로 지정함으로써 민족의 정체성을 대표하는 무교는 중심세력에서 밀려났다.

 

특히 삼국유사삼국사기등에 많은 도승들의 설화 등은 바로 신교, 즉 무교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6. 고려의 무속

 

고려 때까지만 해도 무풍의 기록들이 많이 나온다.

고려사/오행지기록을 보면

현종 12(1021) 5월 가뭄이 들어 무격을 모아 비가 내리기를 빌었다.

숙종 6(1101) 4월 과 예종 16(1162) 5월에 무당을 모아 기우제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다.

인종 원년(1123) 5월 가뭄으로 토룡을 만들어 도성청都省廳에서 기우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며,

인종 11(1133) 5월 경오 에는 여무 300명을 도성청에 모아 기우하였다.

인종 12(1134) 6월 초하루 도성에 무당 250명을 모아 기우하였다.

인종 15(1137) 5월 임오에 무당을 도성청에 모아 기우하였으며

인종 18(1140) 6월 무당을 모아 기우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명종 3(1173) 4월 병자에 무당을 모아 기우하였다.

명종 8(1178)과 명종 19(1189)에도 무당을 모아 기우하였다.

고종 37(1250) 무당을 모아 기우하였다.

충렬왕 10(1284) 5, 15(1289), 30(1304), 32(1306) 때 가뭄으로 시장을 옮겼으며, 정축에는 도성청에서 무당을 모아 기우하였다.

충숙왕 3(1316), 5(1318), 16(1329) 등 무당을 기우제에 동원한 기록은 수없이 많다.

이것은 그 당시 무당의 사회적 권위는 사무師巫의 자리를 불교에게 넘겨주고 기우제를 하는 무당으로 전락하였음을 보여 준다.

고려사의 기록을 살펴보면 왕의 사무師巫의지위는 불교로 넘겼으나 관청에서 많은 일을 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려도경고려의 옛풍속에 백성들이 병이 들면 약을 복용하지 않고 귀신을 섬기며 저주와 주술로써 병을 퇴치한다.는 기록이 있듯이 고려 때 무풍이 성했음을 알 수 있다.

 

희남자 설산훈을 보면 醫師在女曰巫 의사재여왈무라는 말이 있다. 상고시대 때부터 무당이 의사로서 활동하였듯이 고려시대 역시 의사로 활동하였다는 것을 말해주는 기록이다.

 

또 고려 때부터 무당들이 신의 말이라는 공수를 주었다는 기록을 찾을 수 있다.

이때 무당들은 공창空唱이라 하여 입을 열지 않고 공중에서 꾸짖는 소리가 은은하게 들리도록 술수를 부려 사람들을 현혹하였다는 기록이 있는데, 조선시대 초기에 가장 성행하였다.

또 사무師巫의 직위를 상실한 무당들은 무고 저주詛呪 무고巫蠱 등을 일삼았으며 금성대왕 등 성황신을 모시게 되었다.

 

고려사/명덕태후전과 공양왕 조에 무당들이 궁중을 드나들며 많은 신임과 사랑을 받았다는 기록이 있다.

 

동국통감충렬왕 25(1299)에는 가무가 뛰어난 무당들을 궁중에 두고 남장男粧이라 칭하고 새로운 소리를 가르쳤다.

 

고려 때는 별례기은도감別例祈恩都監(별기은)이라 하여 나라의 환난患難이 없도록 기도祈禱하는 일을 맡은 임시臨時 관아官衙로 명종明宗 8(1178)과 고종高宗 4(1217)에 두어 무당들이 제사지내기 하였다.

또 그에 따른 피해를 없애기 위하여 별기은 폐지상소를 김자수金子粹가 올렸다.

이 상소의 내용에는 금주령이 엄한 데에도 술 마시기를 제멋대로 하고 큰길 사거리에서 북치고 피리 불며 노래하고 춤추기를 하지 않는 바가 없다.고 한 것으로 봐서

고려 때 까지만 하여도 무교의 지위는 어느 정도 인정받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고려사를 보면 무당은 근본이 없이 귀인이나 천인이나 모두 될 수 있다고 하였으며, 도읍인 개성군에서는 상류집안의 여자가 무당이 되면 선관仙官이라 하고, 하류 집안의 여자가 무당이 되면 무당이라 불렀다고 한다.

선관들은 고려 왕실의 안녕과 복을 기원하는 팔관회를 주관하게 된다,

충숙왕 때 좌정승 강융의 누이가 무당이 되어 선관이라 부르며 송악사에서 받들었다.

충혜왕 후4(1343) 무당들에게 처음으로 삼베와 곡물로 세금을 거두었다는 기록이 있다.

우왕 13(1387) 2월에 말을 세금으로 거두었다.

 

동국통감기록에 인종 9(1131)에 무풍을巫風을 음사淫祀로 규정하고 무당을 도성 밖으로 쫓을 것을 명하자 무당들이 은병 1백여 개를 거두어서 권귀權貴에게 뇌물을 주고 도성 출입금지를 늦추었다.

그러나 그 후로 무당들은 도성에 들어갈 수 없었다.

 

고려 명종 때 이규보(李奎報, 1168~1241)가 이웃에 사는 늙은 무당이 나라에서 내린 금령禁令으로 개경에서 쫓겨나는 것을 보고 지은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노무편老巫篇에서 보듯이 이때부터 무풍에 대한 억압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고려 최대 축제 중 하나인 팔관회에서는 반드시 무당들이 주관하는 제사를 올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려사의 기록에 따르면 주목할 것은 주금呪噤업이 있었다는 것이다.

주금사는 당나라 때 정식으로 국가에서 임명한 후 고려도 이제도를 받아들여 주금사를 잡과 시험으로 선발하였다는 기록이 10세기부터 보인다.

주금사는 전의시典醫侍에 속하고 의약과 치료를 담당했다.

목종 때(998~1009) 태의감太醫監, , 소감少監. , 박사博士, 의정醫正이 있었다.

문종 (1047~1083) 때 감은 1(4), 소감은 2(5). 박사와 승은 각각 2(8),

의정 2(9), 조교助敎와 주금박사呪噤博士 1(9), 그 외 의침사, 주약, 약동, 주금사, 주금공 등이 있었다.

 

고려사를 보면 의종 16(1162) 도사와 승려 수백 명이 재초齋醮를 설하여 그 경비가 많았다.

충선왕(1308) 때 원나라가 사신을 보내 도사와 승려가 본분을 지킬 것으로 당부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공민왕 19(1370) 4월 명나라 태조는 도사 서사호徐師昊를 보내 산천에 제사하고 비석을 세웠다. 서사호는 명나라 조천궁 즉, 도교남쪽 풍천에 세우려고 하였다.

이러한 기록으로 고려시대는 무풍뿐만 아니라 대륙에서 전해진 도교 사상도 상당히 번성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이 시대에 무풍과 도교가 습합되어 지금에 이르지 않았나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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