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속 이야기

축제연구포럼발제문3

愚悟 2013. 6. 7. 12:44

 

 

 

7. 조선시대의 무교

 

조선시대에는 숭유억불 정책의 일환으로 불교와 함께 무속도 탄압하여 무당들을 천민으로 떨어졌지만 왕실과 관청에서 아주 무시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기록으로 알 수 있다.

정책으론 탄압하였지만 일반 서민들 사이에는 여전히 무풍이 성행하였으며 필요에 따라 많은 왕족과 사대부들이 믿고 의지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국조보감의 기록을 보면 태종 13(1413)을 비롯하여 16, 18년에 무당을 모아 홍수와 가뭄의 해소를 빌었다.

 

왕조실록의 무당이 기우제를 지낸 기록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태종 원년(1401) 우사단雩祀壇에서 기우

태종 55월 송악의 큰우물에서 기우

태종 105월 무당 70명을 모아 백악산당에서 기우

태종 11년 가을 예조에 명하여 산천의 토신에게 기우

태종 16(1416) 여름 5월 무당을 우사당에 모아 기우

태종 18(1418) 6월 한양과 개성에 무당을 모아 3일 동안 기우

 

세종 5(1423) 5월 무녀를동방으로 모아 3일 동안 기우

세종 7(1425) 6월 무당을 모아 동쪽 밖(東郊)에서 기우, 7월 옛 제도를 따라 무당과 내시를 보내 기우

세종8(1426) 여름 우사단에서 무당을 모아 기우

세종17년 여름 한강에 무당을 모아 기우

세종18(1436) 무당에게 백미白米를 주고 기우케 했더니 모두 응했다.

세종 28(1446) 4월 무당을 모아 기우

 

성종 5(1474) 기우하는 무녀에게 행향별감行香別監 함계중咸繼重이 녹피 한 장씩 주었다.

성종 16(1485) 6월 무와 승이 기우하는 것이 주나라 때부터 행해졌으니 무방하다는 승정원 상소

중종 39(1544) 6월 기우하는 무녀에게 상을 주다.

 

태조실록태조 4(1392) 무당이 강비에게 태조의 낙마를 예언하다.

태종 18(1418) 2월 형조에서 무녀 가이加伊가 기도에 능하지 못하여 성녕대군의 병환이 낫지 않는다고 법으로 다스려야 한다고 상소하였다.

세종 2(1420) 6월 여름 세종이 병상에 누웠을 때 대비가 무당을 시켜 천신에게 제사지내도록 했다.然藜室記述

성종이 병상에 들자 대비는 무당을 불러 기도를 시켰다.海東名臣傳

 

연산군일기동궁 바깥 뜰에서 무녀들이 북을 치고 퉁소를 불며 큰 제사를 지냈다.

연산군 9(1503) 국무國巫 돌비乭非가 세속을 우롱하고 현혹시켜서 본부에서 그녀를 잡아 죄를 다스리려 하였으나 도망쳐 나타나지 않고, 놋쇠방울과 부적 4장을 찾았을 뿐이다.

연산군 때 지평持平 권헌權憲이 성수청 폐지를 상소하였으나 연산군은 듣지 않았다.

연산군 119월 원주 기생 출신 박나인이 가무가 뛰어나 많은 사랑을 받았는데 그가 죽자 무당의 말을 들어 몸소 무당이 되어 노래를 지어 부르고 춤을 추었다.

모든 선비들을 쫓아버리고 태학太學을 비워놓고 그기에 무격巫覡들을 모아 음사淫祀만을 베풀었다.

중종 10(1515) 4월 국무 돌비가 궁을 드나들면서 재앙을 물리치고 복을 빈다고 재화財貨와 어의御衣를 포상 받아 집으로 돌아갔다.

명종 때 문정왕후는 무당을 좋아했다.李德洞/松都紀異

선조 8(1575)에 인순왕후 병상에 무당이 치유를 위한 기도하였다. 文獻備考

광해군 때 승지承旨 한효중韓孝仲은 궁중을 출입하는 무당을 척결할 것을 상소

숙종 13(1687) 무당 막례莫禮가 곤복袞服을 입었다고 섬으로 유배시켜 죽게 하라고 명하였다. 이 때 곤복은 신복을 의미하는 것이라 여겨진다.

 

이익의 성호사설에 이르길, 대내大內로부터 주읍州邑에 이르기까지 무도 주무主巫가 있었는데, 마음대로 출입하기 때문에 백성들의 풍속이 미연靡然해 졌다. 대내大內를 출입하는 자는 국무녀國巫女였으며, 주읍州邑을 출입하는 자는 내무당內巫堂이었다.

고종 때 명성황후의 총애를 받던 무녀 이성녀는 진령군眞靈君, 윤성녀는 현령군賢靈君이라는 군호를 받았다.

 

 

조선의 무격 소속기관

 

성수청星宿廳

 

성수청은 성신청星辰廳이라고도 하는데, 조선 전기 나라무당인 국무國巫를 두고 국가와 왕실을 위해 복을 빌고祈福, 재앙을 물리치는(禳災) 굿을 전담한 국가 공식 무속 전담기구라고 할 수 있다.

무당들은 자신들이 모시는 신들을 성수님이라고 호칭하는 것을 생각하면 성수청의 기능이 무엇인지 금방 알 수가 있다.

조선시대는 숭유억불 정책으로 무교를 음사陰祀라 하여 배척하였는데 어찌 국가에서 성수청을 두어 국가와 왕실의 복을 빌고, 재앙을 물리치는 굿을 하였을까 하는 생각도 가지게 된다.

그러나 무교는 옛날부터 지금까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남모르게 의지하며 믿고 지내온 것이 바로 우리 민족의 심성이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상할 것도 없다.

 

이 성수청이란 곳도 조선시대에서 갑자기 생긴 것이 아니라 고려시대, 더 나아가서는 통일신라시대에도 존재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에는 별례기은도감別例祈恩都監(별기은)이라 하여 나라의 환난患難이 없도록 기도祈禱하는 일을 맡은 임시臨時 관아官衙로 명종明宗 8(1178)과 고종高宗 4(1217)에 두었다는 기록이 있듯이, 조선왕조도 고려 때 왕실의 별례기은도감別例祈恩都監을 대신하여 성수청을 두었다.

 

성수청과 관련된 기록은 성종실록成宗實錄,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 중종실록中宗實錄에 걸쳐 모두 10회 정도 나오는데 대부분 성수청을 폐지해야 한다는 상소들이다.

그러나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에 따르면 연산군 9(1503) 51일에 전교하기를 성수청에 국무國巫를 둔 것은 그 유래가 이미 오래되었다고 했으며, 12(1506) 315일에 전교하기를 성수청의 도무녀都巫女와 수종무녀隨從巫女들에게 잡역雜役을 면제시켜 주라고 했다.

이 기록으로 봐서 성수청의 최고무녀를 도무녀都巫女라고 하였으며, 그 외 무녀들을 수종무녀라고 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가 흔히 부르는 국무國巫라는 명칭은 왕실과 나라의 안녕과 복을 기원하는 무녀를 통칭하는 것으로, 국가적 차원의 공식적인 굿을 거행하는 국무國巫는 한명이 아니라 여러 명이 있었다.

그리고 조선시대에 국무가 굿을 하는 장소는 궁궐 안이 아니라 조선 팔도의 명산에서 제사를 드렸는데, 감악산, 덕적도, 목멱산 등 여러 곳에 있었으며, 대표적인 장소가 송악, 즉 개성의 국무당이었다.

 

성종 9(1478) 11월 홍문관 부제학 성현은 상소문을 통해, 성수청을 성내에 두고 있으면서 백성만 무속행위를 못하게 한다면 잘못이라는 주장하였으며, 중종 1(1506) 10월 소격서昭格署와 성수청을 혁파하라는 조광조 등의 상소를 마지막으로 성수청은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 국가적 차원의 공식적인 굿을 담당하는 성수청은 사라졌지만 왕실 내행內行의 별기은別祈恩은 유생들의 반대 속에서도 조선 말기까지 지속적으로 행해졌다.

 

그 외 소격서와 각 관아의 부군당, 그리고 왕실의 산실청, 사신의 무사귀환을 기원하는 사신당 등 조선시대는 공식적으로 무녀를 탄압하고 배척하여 도성 안에는 무녀들의 거주를 금지시켰지만 많은 곳에서 무녀들이 공식적으로 활동했다는 것을 위에 열거한 기록에서 찾을 수 있다.

 

 

동서활인원東西活人院

 

세종 11(1429) 예조에 계를 올려 각 관과 마을 민호民戶에 가까이 사는 무격으로 활인원을 두게 하였다.

조선시대의 의료기관인 동서활인서는 많은 백성들이 치료받을 수 있는 유일한 국립의료기관이다. 이 활인서에 무녀들을 배치되어 한의사들과 함께 환자를 치료하게 하였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이 동서활인서의 운영비는 거의 무세巫稅로 충당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무녀가 담당하는 마을에 일 년 동안 질병 등 별 탈 없이 지나가면 세금을 감면해 주기도 하였다.

동서 활인원은임진왜란 때 폐지되었다가 광해군 4(1612)에 다시 설치하였다.光海君日記

 

 

무업세巫業稅 및 신세포神稅布

 

고려사에 충혜왕 후4년에 무업巫業과 장업匠業에 세포를 거둔 것이 시작이다.

그 당시 무당들의 세금을 업세業稅라 하여 구리와 면포, 말 그리고 쌀과 돈으로 내었다.

조선조 세종 때 호조에서 책정한 무녀들의 세금을 보면, 국무당國巫堂9, 전의 국무당은 8, 송악松嶽무당은 8, 덕적德積무당은 6, 삼성三聖무당은 6, 당무녀堂巫女2, 일반무녀는 1근을 수납하도록 하였다.

그 당시 정승에 해당하는 정 종일품들이 세금이 10근 이었고, 말단 종8품은 8냥쭝이었다는 것을 비교하면 국무당을 비롯한 무녀들의 세금이 얼마나 과중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조선 중종 때 실학파들은 무당들에게 세금을 부과한다는 것은 국가에서 무속을 인정하는 것이므로 무당들의 세금인 무세를 없애야 한다고 주장하면서까지 무속을 말살하려고 했다.

그러나 무속을 말살시키려는 많은 시도와 노력에도 불구하고 조선 중반부터는 무당들의 세금이 지방제정 수입에 막대한 부분을 차지하는 재원이 되었다.

 

영조 20(1744)에 발간된 속대전續大典의 기록에 정식국가 수입 항목으로 무녀마다 베 한 필씩을 무세로 거두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것은, 그 당시 무세를 국가의 정식 수입항목에 포함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국가 수입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19세기 국가재정을 기록한 만기요람萬機要覽을 보면 평안도와 황해도 무당을 제외한 전국 무당들에게서 거둬들인 무세가 총 1,326필 이라고 한다.

이 기록은 19세기 무세를 납부한 무당이 1,326명 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세금을 내지 못하고 숨어 다닌 무당들까지 추산한다면 황해도 이남에 거주하는 무당의 숫자는 2,000명 이상이 아니었을까 예상할 수 있다.

특히 평안도와 황해도 무당들의 무세는 지방관찰사가 직접 징수하여 북방을 경계하는 국방비로 사용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지금이나 그때나 국가재정에서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바로 국방비라고 한다면 평안도와 황해도 무당들의 숫자가 많았다는 것과 또한 걷어 들인 그 무세가 엄청난 금액이었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다.

이렇게 무세는 지방재정의 중요한 수입원으로 지방관의 재량권에 의하여 무세가 걷히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탐관오리들은 지방재정을 확충한다는 명목아래 더 많은 무세巫稅를 걷기 위하여 무세의 종류를 늘려 더 많은 세금을 거둬들였다는 것을 기록으로 알 수 있다.

 

초기에는 무세로 무업세巫業稅만 있던 것이 점차 무업세외에 신당퇴미세神堂退米稅’ ‘신포세神布稅란 명목으로 세금을 수탈해 갔다.

신당퇴미세는 신당에 바쳐진 제물 중 쌀이나 돈 등을 내릴 때 일정부분을 세금으로 내야 한다는 것이며, 신포세는 무녀들이 내는 세금이 아니라 일반 백성들이 내는 세금으로, 신을 믿기 때문에 내는 세금이다.

즉 굿이나 치성을 드리는 것은 신을 믿기 때문에 하는 의식이므로 정성을 드릴 때 일정부분의 면포나 금전 등으로 세금으로 바치게 하는 특별소비세라고 할 수 있다.

 

손노선의 조사연구에 의하면 만신연록기萬神年錄記의 기록에 조선 말기에 과중한 무세로 인하여 무당들이 무업을 접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그러자 굿판에서 수입을 얻어 온 <풍류방>의 악사들도 자기들의 수입이 줄어들자 궁여지책으로 굿판에서 얻은 수입 중 일정부분을 갹출하여 정립해 두었다 무세를 낼 시기에 무당들의 무세를 들어주었다는 기록을 발견하였다고 한다.

 

무당들의 무세는 일 년에 초기에는 두 번을 내었지만 나중에 한 번씩 내었다고 한다.

그러나 무세의 종류가 늘어나면서 무당들은 일 년에 한 번씩 내는 무세와 수시로 내는 신당퇴미세, 그리고 신포세까지 감당해야하는 무당들은 많은 세금 때문에 무업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8. 근대사회의 무속

 

일제강점기엔 신도와 무속이 같다는 논리를 편 일본의 논리로 인하여 무속은 극히 움추려 들었다.

남산에 있던 국사당을 인왕산으로 옮겨 버리고 그 자리에 신사를 세우는 등 무속이 우리 민족의 정체성이 살아 있는 종교라는 사실을 안 일본은 심지어 굿을 할 때마다 주재소에 신고를 하게 하여 무업활동을 극히 제한하였다.

특히 무업을 원시적인 여성들의 종교라고 하여 무속으로 부르게 되었으며, 미신으로 치부해 버렸다.

수천 년 내려 온 민족 종교 무교의 변천사를 볼 때 외래종교인 불교에 의하여 위세가 축소된 후 민족의 정체성이 상실한 정권이 들어설 때마다 배척의 대상이 되어 왜곡 폄하되어 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결과 대한민국이 건국된 후 에도 잘못된 교육으로 인하여 무교는 멸시와 왜곡된 세월을 지내왔다.

유교의 정신으로, 일본의 시각으로 기독교의 잣대로 우리 민족의 정체성이 담긴 민족종교 무교는 살아남기 위하여 변신을 거듭하다 보니 걸레처럼 찢어지고 꿰매어 원형을 상실하고 말았다.

이러한 환경에서 사람으로 대접 받기 위한 무당들의 노력은 오직 금전을 벌어들이는 것 외에 다른 길을 찾지 못하여 세속에 물들고 탐욕에 찌들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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