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당내력> 12번째 굿거리는 구릉거리로 되어있다.
제물 그림은 없고 무녀의 그림만 그려져 있는데, 지금의 군웅거리와 많이 다르다.
무녀가 빗갓을 쓰고 홍천립을 입고 오른 손에 부채, 왼손에 흰 주머니를 들고 있다.
흰 주머니에 대한 설명은 한자로 설명이 되어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여행길에서 떠도는 귀신을 먹이는데 쓰이는 금전이란 것이다.
또 굿거리 설명은 명나라 시절에 물길로 왕래를 하였기에 매번 사신이 출발할 때 사신성황(모화현 밖)에서 무녀가 아무 사고없이 돌아오기를 빌었다. 이로 인하여 풍속이 이루어져 치성 시에 의례히 거행한다.
이 말은 경기도당굿의 군웅노정기를 이야기 하느 듯하다.
<무당내력>의 저자 난곡은 굿에 대한 지식이 짧아 구릉거리라고 하였지만 본디 군웅거리다.
경기도당굿과 황해도 굿에서 존재하는 굿거리지만 요즘 모든 지방 굿에서 행하고 있다.
군웅群雄은 본디 국가적 영웅의 혼령을 위로하기 위하여 생긴 굿거리였다.
군웅거리의 시작은 여러 가지 정황으로 봐서 14대 한웅천왕인 치우천왕을 위로하기 위하여 생긴 굿거리가 아닌가 한다.
치우천왕은 탁록에서 제사를 지낼 수 있는 권한을 놓고 황제헌원과 74회에 걸친 전투를 하였다.
제사를 지낼 수 있는 권한이란 바로 장손, 즉 정통성을 다투었다는 뜻이다.
그러나 그 후 역사에 치우천왕의 기록이 사라지고 황제헌원의 자손들이 왕위를 이어간 것을 보면 마지막 전투에서 패한 것이라 여겨진다.
이때 황제헌원은 치우천왕이 살아 날 것이 두려워 육시戮屍를 해서 산동성 동평군 수장현 관향성을 비롯한 동서남북으로 시신을 묻었다.
이렇게 죽은 치우천왕의 죽음을 시작으로 조선시대까지 육시를 해서 죄인을 사형시키는 것을 가장 무거운 형벌로 쳤다.
군웅거리는 비극적인 최후를 맞은 동이의 자랑스런 조상인 치우천왕의 죽음을 기리고 조금이나마 혼백을 위로하기 위하여 생긴 굿거리일 것이다. 또 돼지를 육각으로 자르는 것 역시 치우천왕의 죽음을 잊지 말자는 뜻이 담긴 것이라 여겨진다.
그러나 지금은 전쟁터 및 각종사고로 피 흘리고 험악하게 간 조상들을 달래는 굿거리로 전락하였다.
군웅群雄이란 한자에서 보듯이 바로 한웅천왕인 치우천왕의 거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한양굿을 하는 일부 만신들은 군웅거리가 혐오스럽다고 하여 비하하는 듯한 발언을 한다.
군웅거리는 한양굿에서도 존재하였지만 험악하고 힘든 거리라고 기피한 것이 한양만신들이다.
그리고 군웅거리를 혐오스럽다고 무시하는 것은 진정한 사제로서 가질 자세가 아니다. 이런 행태는 진정 군웅거리가 가지는 그 의미를 모르기 때문이다.
실지로 필자가 늘 느끼는 것은 군웅거리를 하고 나면 모든 잡귀 잡신들이 다 물러간다는 것이다.
특히 허주굿이나 내림굿을 할 때 군웅거리를 하고 나면 내림굿을 받는 제자의 몸과 주변에 감싸고 있던 잡귀들이 모두 물러나 말문이 금방 터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런 현상은 허주굿과 내림굿을 함께 하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그러나 형식에 매인 일부 만신들이 내림굿에는 군웅굿을 하지 않는다고 하여 생략하는 경우가 있는데, 허주굿을 동시에 한다는 것을 스스로 망각한 것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군웅거리는 우리 민족의 역사를 재조명하는 굿거리로 굿을 하는 과정이 험악하고 혐오스럽다고 하여 군웅거리를 폄하하거나 왜곡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