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조설화(巫祖說話)는 처용랑(處容郎) · 법우화상(法雨和尙) · 바리공주 · 제주의 무조(巫祖) 삼형제 · 말명할머니 · 계면할머니 등이 있다. 그러나 이 설화에 등장하는 인물을 무조(巫祖)로 삼기엔 미흡한 부분이 많다.
서울대학교 규장각 가람문고본에 조선 말기 난곡(蘭谷)이 쓴 『무당내력(巫黨來歷)』이란 책이 있다.
이 책 서문에 「상원 갑자 10월 3일 신인이 태백산 박달나무 아래에 강림하니 이가 바로 단군(檀君)이다. 이에 신교를 창설하여 교화시켰다. 장자 부루(扶婁)는 어질고 복이 많은 까닭에 인민이 존경하고 신임하여 후일 터를 골라 단을 쌓고 토기에 벼 곡식을 담아 풀을 엮어 가려 놓으니 이를 가리켜 <부루(扶婁)단지> 또는 <업주가리>라고 하였다. 매년 시월에 새 곡식으로 시루떡, 술, 과실을 올려 치성 기도하였다. 기도 시에는 반드시 나이 많은 성숙한 여자를 쓰는데 세상에서는 이 사람을 무인(巫人)이라고 불렀다. 그 후 무인의 수효가 증가하여 무당이라고 이르게 되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여기에 무인(巫人)이라는 말이 등장한다. 그렇다면 단군 시절에 벌써 제사장이 아닌 무인, 즉 무당이 있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삼한관경 본기』 「제4편」에 “한웅천왕이 제사를 지내러 갈 때 풍백은 천부를 거울에 새겨 앞서가고 우사는 북을 치며 주위를 돌면서 춤을 춘다.”라고 하였다.
풍백이 들고 간 천부(天符)가 새겨진 거울은 태양이며, 신체(神體)이며 왕권을 상징하는 것으로, 무당들이 소중히 여기는 신기물인 명두(明斗)라고 할 수 있다. 우사가 북을 치며 주위를 돌면서 춤을 춘다는 것은 하늘의 신을 맞이하러 가는 사람, 즉 무당들이라고 할 수 있으니 한웅천왕이 바로 제사장이자 무당인 사제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무(巫)자의 고어는 사진처럼 쓴다. 이 글자의 의미는 우주의 이치를 깨달은 자로 마을에서 구심적인 역할을 맡은 사람이란 뜻이라고 한다. 또 공(工)자에 두 사람이 들어가 있는 것이 무(巫)이다. 하늘과 땅에 제를 올리는 일을 전문적으로 담당하던 남녀 두 사람을 말한다.
즉 무격(巫覡)이다. 신명의 일을 능숙하게 하는 사람이 남자는 격(覡) 여자는 무(巫)란 기록이 『설문해자』에 나온다.
能劑肅事神明也 在男曰覡 在女曰巫
능제숙사신명야 재남왈격 재여왈무
『초어楚語』에 신명이 내린 사람이 있는 데 무격이라 한다는 기록도 있다.
神明降之在 男曰覡女曰巫
신명강지재 남왈격여왈무
즉 남자 무당은‘격(覡)’, 여자 무당은 ‘무(巫)’라는 기록이다. ‘격(覡)’을 축(祝)이라고 한다. 남자 무당이 하는 종교 행위는 제사를 주관하고 축문(祝文)을 읽는 행위이다. 오늘날 법사라고 불리는 경을 읽는 사람들이 모두 남자라는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그리고 이들에 의해 제사의 기틀이 마련되었다고 볼 수 있다.
여자 무당인 ‘무(巫)’가 하는 행위는 하늘에 원하는 바를 몸짓(춤)으로 표현하였는데 그것이 지금의 굿으로 발전하였다고 볼 수가 있다.
『설문해자』
女能事無形 而舞降神者也 象人兩袂舞形’
여능사무형 이무강신자야 상인양몌무형
여자가 형체가 없는 일을 능하게 하는 것은, 춤을 춤으로써 신을 내려오게 하는 자로, 사람이 양팔에 긴소매의 옷을 입고 춤추는 모양이다.
이 기록은 무당들이 굿을 할 때 소매가 긴 옷을 입고 춤을 추었다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당시 무당이 춤을 출 때 모우(旄牛)라는 소의 꼬리를 들고 춤을 추었다는 기록도 있다.
『강희자전』
旄旄牛尾 舞者所持以指麾
모모우미 무자소지이지휘
모는 희고 털이 긴 소의 꼬리다. 춤을 추는 자가 쥐고서 흔든다.
즉 털이 긴 흰 소의 꼬리를 쥐고 흔들면서 제사를 지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신라 방언에 무당을 차차웅(次次雄)이라 하는데 차차웅이 제사를 숭상하고 신을 섬김으로써 그를 경외하여 불렀다고 한다. 차차웅(雄)을 무당이라고 하는 것은 신시 한웅으로부터 비롯되었을 것이다. 또한 단을 설치하고 하늘에 제사를 지내므로 단군이라고 불렀다. 단군이란 하늘의 아들로서 신의 권한을 대신하는 사람이다.
무당의 ‘당’ 자를 무리 ‘黨’으로 쓴 것을 볼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무당(巫黨)은 여러 명의 무당을 말하는 것으로, 무함국에 거주하던 무당들을 일컫는 말이다.
『산해경/해외서경』의 기록을 보면 무함국(巫咸國)에 대한 기록이 나온다.
“무함국은 여축의 북쪽에 있다. 오른손에는 푸름 뱀을 왼손에는 붉은 뱀을 쥐고 등보산에 있는데, 이 산은 여러 무당들이 하늘로 오르내리는 곳이다.”
무함국에는 무함 · 무즉 · 무반 · 무팽 · 무고 · 무진 · 무례 · 무저 · 무사 · 무라 등 열 무당이 있었으며 이들은 최초의 신의(神毉)였다.
무당의 기능을 몇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 사제(司祭)적 기능. 둘째, 무의(巫醫)적 기능, 셋째, 예언적 기능, 넷째, 사령저주(使靈咀呪)의 기능, 다섯째, 가무(歌舞)의 기능을 들 수 있다. 이 중에서 사제적 기능과 무의적 기능이 가장 많이 쓰였던 것 같다.
무당이 의사였던 기록은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회남자 설산훈』 “醫師在女曰巫 의사재여왈무”라 했다.
「대황남경」을 보면 “무산(巫山)이라는 곳이 있는데 그 서쪽에는 황조(黃鳥)가 있다. 천제의 약을 넣어둔 곳간이 여덟 채인데 황조가 무산에서 이 검은 뱀을 살피고 있다.”라는 기록이 있다.
「해내남경」에도 무당들은 불사약을 가지고 있다는 기록들이 나오는 것으로 봐서 그 당시 무당들은 신의(神醫)로서 존재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무녀는 의사였다. 병원이나 의사라는 뜻의 ‘의’(毉)자에 무당이라는 뜻이 담겨 있다.
현재 무당(巫堂)이란 호칭은 무당이 거주하는 곳, 또는 개인의 호칭으로 흔히 사용되는 호칭이다. 그러나 당(堂)이 가지는 의미는 우리가 알고 있는 사실과 확연히 다르다. 최초의 ‘당(堂)’은 토지신을 지키는 모습에서 만들어진 문자로 ‘당(堂)자가 가지고 있는 뜻은 지킨다는 뜻이다. 그러면 무당(巫堂)은 하늘과 땅의 이치를 바로 세워서 지키는 사람이란 뜻이다.
『만신연록기』에 보면 “만신으로 솟을굿을 하고 일가를 이루어 존경받는 무녀를 무당이라고 부른다.”라고 하였다. 즉 무녀에게 당호를 붙여주는 것이다.
조선시대 ‘당호(堂號)’를 가진 분이 많이 있다. 신사임당 · 여유당 · 매월당 · 사명당 등등 많이 있다. 그러니 무녀로서 일가를 이루고 사회에서 존경받는 무녀라야 무당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렇듯 막중한 임무를 띠고 이 땅에 살아가는 무당들이 시대의 변천과 무당들의 무지로 천한 계급으로, 무식한 집단으로 추락하게 된 것에 대해 누구를 탓할 것이 아니라 스스로 반성하고 깨우쳐서 무당이라는 말을 그 어떤 말보다도 존경의 대상이 되는 말로 바꾸어 놓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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