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지창 칼럼

동북공정에 대항하는 한심한 노력들

愚悟 2006. 10. 4. 17:52

<중국 함양에 있는 피라미드>

 

<하우스 돌프 - 피라미드 사진 공개자 독일>

 

 <하우스 돌프가 찍은 피라미드>

 

 

 

동북공정에 대항하는 한심한 노력들


중국이 동북공정의 일환으로 고구려사를 중국사로 편입하자 국내는 벌집을 쑤셔 놓은 듯 떠들썩하다.

고구려사 연구에 그동안 외면하던 학자들이 언론의 관심과 연구비 증액에 눈이 멀어 너도 나도 몰려드는 꼴이 썩은 고기 냄새를 맡은 하이에나 같다.

 

정부 또한 재야의 목소리를 무시하고 넋 놓고 있다 중국이 고구려사를 왜곡하고 나오자 그때 마지못해 실증사학계의 모기같이 앵앵거리는 목소리로 대응에 나서고 있다. 그러나 그 대응은 경제논리에 맞춰서 정말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어정쩡한 대응이 지금의 사태를 불러 왔고 민족의 영산인 백두산은 중국의 장백산으로 바뀌고 있는 중이다.

이러한 결과는 중국의 동북공정이 언제 어떻게 시작되었으며 그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중국 동북공정의 단초가 되는 최초의 사건이 1945년 한 미국인 조종사의 항공촬영에서 시작되었다.  

 

그 전에는 자연적으로 형성된 산으로만 알고 있던 것이 사진촬영 결과 피라미드라고 판명되었기 때문이다.

1963년 중국의 고고학자들이 진시황 무덤으로 추정하고 발굴을 시작하였고 그 속에서는 진시황 의 유물이 아닌 동이족 유물인 배달나라와 고조선, 그리고 고구려 유물들이 쏟아져 나오게 되었다.

당황한 중국학계는 탄소연대 측정법에 의하여 그 무덤이 진시황시대보다 5천년에서 6천년이상 된 무덤이라는 것을 발견하곤 발굴을 중단하게 된다.

 

파라미드 발견을 극비에 부치고 역사왜곡을 시작하던 중국에 돌발사태가 발견한다. 독일인 학자 하우스 돌프가 외국인 금지구역인 그 곳에 정부관리와 인맥을 통하여 들어갔다 몰래 사진을 찍었기 때문이다. 중국공안 당국의  필름 압수 조치 등에도 불구하고 한발 앞서 피라미드 사진을 본국에 보내어 피라미드가 서방세계에 발표가 되어 버렸다. 

그 후 서방 학자와 언론의 공개 압력을 외면하던 중국 당국이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일부 피라미드 존재를 신화사 통신으로 시인하지만 발굴 기술을 내세워 공개를 거부하고 있다.

 

여기서 중국의 역사왜곡 즉 동북공정은 시작되는 것이다.

한국 실증주의 사학자들이 만들어 낸 왜곡된 반도 역사관과 저술, 논문 등을 모두 입수하여 분석한 결과 한국은 상고사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 결과 배달 민족사를 깡그리 한족사로 바꾸어도 아무른 문제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여기에 힘을 얻어 중국은 배달민족의 역사를 한족의 역사로 만들기 위하여 중화삼조당中華三祖堂이라는 것을 하북성의 귀근원에 만들어 황제와 염제 신농과 치우천왕을 자기들의 조상이라고 하였다.

 

중국인, 즉 한족의 조상은 사마천이 <사기>에 나오는 것처럼 황제헌원 한사람으로 시작한 것이 아니라 염제신농과 치우도 한족의 조상이라고 해 버린 것이다.

그러나 그 당시 재야에서는 중국의 역사왜곡을 비난하고 많은 성토가 있었으나 실증사학자들과 정부는 애써 무관심으로 일관하며 우리 상고사는 역사적인 사실이 부족하다고만 하면서 스스로 우리 역사를 부정하였다.

 

아니, 남의 나라 중국 이야기로 알고 신경도 안 썼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배달 민족사를 한족의 역사로 왜곡하는 중국학자들의 논문과 연구가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자 급기야 동북공정이란 이름으로 고대국가 고구려와 발해는 중국 고대왕국들의 지방정부라고 자신있게 말하게 되었다.

아무리 고구려사와 발해사가 우리 역사라고 입으로만 외쳐 되어도 소용없다. 또한 고구려 역사는 일부분에 불과한 것으로 동이의 역사 전체를 한족 역사로 바꾸는 작업이 어느 정도 완성된 지금에 와서도 우리 실증사학자와 정부는 단군이 신화적 인물이라는 인식을 버리지 못하고 있으니 한심할 뿐이다. 단군의 조선과 한웅의 배달나라, 그리고 9천여 년 전 한인천제의 한국의 역사를 모두 중국에서 중화의 역사로 만들어도 우리는 할 말이 없다. 우리 민족은 신화는 있어도 역사는 없기 때문이다.

 

일제 강점기의 가장 큰 피해는 경제 약탈도, 왕조 몰락도, 민족자존심의 상처도 아닌 남북분단과 우리 역사 왜곡이라고 할 수 있다.

일본의 침략은 해방 후 지금까지 계속되어 왔다. 그 예로 식민사관으로 만들어진 우리 역사책이 단적으로 그것을 말해준다. 식민사관의 시조인 이병도는 죽기 전에 고 최태영 박사 앞에서 단군의 실체를 인정하는 고백과 반성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제자들은 실증주의로 앞세워 아직도 우리의 상고사를 부정하는 어리석음을 저지르고 있다. 우리 스스로 우리 역사를 부정하고 있으니 우리 역사를 남이 가져간들 뭐라고 할 수도 없다.

 

우리 학계에서 우리 역사를 인정치 않고 자기들 밥그릇 지키기에 열중하고 있는 동안 우리의 찬란한 9천년 역사는 중국사로 둔갑하여 세계에 퍼져 나가고 있다.

몇 년이 지나면 분명 중국의 피라미드도 세계문화유산에 등재 될 것이며 그것은 찬란한 중국문화로 둔갑하게 될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북한이 붕괴되고 나면 중국이 조선의 예를 들면서 북한에 개입하여 동북 4성으로 만들어 버릴 것이다. 고조선도 단군도 중국의 역사이기 때문에 당연히 북한은 중국의 영토라는 개념이다.

 

중국과 우리는 영토분쟁이 자주 있어 왔다, 그러나 마지막 국경협약은 조선 숙종 때, 청나라와 맺은 국경조약이 당사자간에 있었던 마지막 극경 조약이다. 그 조약에 따르면 당연히 만주와 동북 3성은 조선의 땅으로 한국의 영토인 것이다.

그러나 발해사 역시 중국사로 편입된 지금에 와서 만주가 우리 땅이라고, 간도협약은 무효라고 해도 아무른 근거가 없다. 우리 역사를 찾지 않고는 논리적으로 대항할 수 없는 일이다.

 

우리 역사에서 일제 강점기를 제외하고 가장 불행한 사건이 신라가 외세의 힘을 빌려 통일한 것과 이씨 왕조이다. 이씨왕조는 탄생해서는 안 될 나라가 탄생한 것이다. 약소국 신라가 반도 통일을 위하여 당나라를 끌어 들인 것은, 스스로 외세의 간섭을 자초하게 되었으며, 건국하면서 부터 소중화주의를 표방한 이씨왕조는 우리와 같은 동이족인 청나라와 여진, 거란 말갈 등을 야만인으로 치부하여 스스로의 정체성을 부정하고 소중화주의에 빠졌다. 명나라가 망하고 청나라가 들어서자 소중화주의에서 명나라의 뒤를 잇는 중화주의에 더욱 깊이 빠졌다. 

 

상해임시정부에서 역사를 편찬할 때 단재 신채호선생은 우리의 역사에 청나라와 여진 말갈 거란의 역사까지 다 포함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그 당시 임시정부에는 소중화주의에 빠져 있는 노론 세력이 주류를 이루고 있어 단재 선생의 주장은 관철되지 못하였으나 지금 생각하면 너무나 안타까운 일이다.

 

그러나 지금이라도 늦지 않다. 실증주의 사학자들을 배격하고 민족주의 사학자들과 정부가 힘을 모아 신화로만 남아 있는 잃어버린 우리 상고사를 복원하고 발해사의 복원과 청나라와 금나라, 거란, 말갈까지 동이의 역사를 총망라한 대배달 민족사를 다시 써야 할 것이다.

 

또한 우리의 찬란한 역사를 세계만방에 널리 홍보하여 중국의 동북공정의 잘못을 일깨워줘야 할 것이며 아울러 주변국인 러시아, 몽골, 베트남 인도 등의 학자들과 공동 연구 등으로 중국의 역사왜곡인 동북공정을 감정적인 대응이 아닌 차분하게 학술적으로 대처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하여 만리장상 안은 중국의 영토요 만리장성 밖은 엄연한 배달민족인 우리의 영토라는 것을 역사적으로 증명시켜, 잃어버린 우리의 역사와 자존심을 되찾고 아울러 우리가 잃어버린 선조들의 고토를 회복하여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