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지창 칼럼

사제의 길을 포기한 무당

愚悟 2006. 10. 31. 11:39
 

사제의 길을 포기한 무당들


무당은 무교의 사제다. 무교는 우리 민족과 더불어 오랜 세월 민중들의 가슴속에 자리 잡고 내려온 민족종교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무교의 사제들이 변하기 시작하였다. 물론 시대의 변화에 따라 변하는 것이 인간들의 모습으로 극히 정상적인 일이건만 무당들이 변하는 것은 사제에서 장사꾼으로 자꾸 변하는 것 같아 마음이 개운하지가 못하다.

몇 년 전부터 유행처럼 번지는 전화 사주 상담만 보아도 그렇다. 전화 상담에 일정비용을 분담하고 자기의 사진을 올리고 자기에게 상담을 원하는 사람 숫자에 딸라 월 배당금을 받는 형식이다. 그러나 무당들은 역술인하고 달라서 신점으로 상담을 한다.

신점이란 글자 그대로 신령님들의 힘의 빌어서 상담자의 운명을 감정하는 것이다. 신점이란 생년월일 등 사주를 묻지를 않아도 얼굴만 보면 그 사람의 운명이 나오는 것인데 전화로 상담을 하려니 사주와 더불어 여러 가지를 묻게 된다. 사람을 척 보고 느끼는 신점과 이렇게 전화로 상담하며 느끼는 신점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분명 사람과 직접 마주 앉았을 때 나오는 점사와는 정확도에서 많은 차이가 있다 하겠다.  상담자와 얼굴을 맞대고 하여도 무당에 따라 정확도가 많은 차이가 나는데 하물며 얼굴을 보지 않고 무작정 사주만 가지고 역학적으로 풀어내는 덜떨어진 무당들의 어설픈 역학 실력으론 무당들의 신뢰도만 자꾸 떨어뜨릴 뿐이라 생각한다.      

또 어떤 업체는 모든 사람의 사주를 컴퓨터에 입력을 해놓고 엉터리 무당들을 얼굴마담으로 이용하고 있다. 이것은 전화상담 업체가 영업 전략상 광고를 많이 하니 덩달아 얼굴을 빌려준 무당도 유명해 진다는 논리로 전화상담 업체에 얼굴마담 노릇 하는 무당들도 많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또 이런 전화로 운세상담 서비스를 하는 업체에 전화를 하는 일반인들의 마음가짐도 장난기와 심심풀이로 하는 것이 대부분이라 생각한다. 

일반인들이 장난으로 심심풀이로 하는 전화 상담료 몇 푼에 눈이 먼 무당들이 그 장단에 춤추고 있으니, 이 모든 것들이 무당들의 신뢰도를 스스로 떨어뜨리는 행위로, 당장 들어오는 몇 푼에 눈이 어두워 민족종교인 무교를 장사꾼의 집단으로 전락시키는 행위라 하겠다.

또 무당들을 장사꾼으로 전락시키는 행위 중에 하나가 카드 가맹 업소로 등록하는 것이다.

얼마 전부터 무당들 집에 카드 가맹점 표시가 되어 있는 것을 종종 볼 수가 있다. 물론 신용사회에서 카드 가맹점을 하는 것이 잘못이라고 말할 수 도 없다. 정부에서도 적극 권장하고 있는 것이 카드 가맹점이다.

복채 몇 만원을 현찰 대신 카드결제로 받으면 손님은 당장 돈이 없어도 상담을 할 수가 있고, 무당도 신용사회 정착에 동참이라는 사회의 흐름을 따라가면서 또 상담자 수가 늘어나는 것 같아 당장 좋은 듯싶겠지만, 민족종교의 사제인 무당 집에 카드 가맹점이라는 것이 좀 우스운 일이다. 정부에서 카드사용을 권장하는 것은 자영업자들의 탈세를 막기 위한 방편이건만 무당들은 자영업자도 아니며 세금 또한 안내면서 카드 가맹점으로 등록하였다는 것은 무당도 팔을 걷어 부치고 장사꾼으로 나섰다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이렇게 무당 집에 카드를 사용하는 것은 단지 복채만을 받기 위한 것이 아니라 생각한다. 복채는 몇 만원에 불과하지만 고액의 굿 값을 카드로 결제 받으면 당장 돈이 없어도 굿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즉 외상이면 소도 잡아먹는다는 속담처럼 사람들의 얄팍한 외상심리를 이용하겠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굿은 외상으로 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굿상에 차리는데 소요되는 제물 비용이나 그 외 부대 비용들을 모두 무당 주머니에서 충당하게 되는 것이니, 그것이 무슨 정성인가?

종종 무당이 사채업자를 소개하고 그에게 빚을 얻게 하여 정성을 드린다는 소리는 간혹 들어보았지만 이런 경우도 결국 제가집이나 무당들이나 다 끝이 좋지 못하다는 것을 많이 보았다. 그럼에도 이제는 카드결제나 속칭 카드깡까지 해주며 노골적으로 외상으로 정성을 드리라고 부치기고 있으니 돈만 벌겠다는 무당들의 장사꾼 같은 속셈의 극치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교회에서 십일조를 카드로 결제하라고 하는 목사를 보았는가? 사찰에서 시주 돈을 카드로 결제해도 된다고 하는 승려를 보았는가?

왜? 외래 종교의 사제들도 다 같이 신도들의 돈을 받고 운영해 나가건만 유독 무당들만 무식하게 행동을 하여 돈만 밝힌다는 소리를 듣는지 모르겠다. 타종교의 사제들은 돈을 받아도 품위를 잃지 않고 있다. 목사나 승려가 돈을 챙기지만 그들 개인의 영달을 위하여 돈을 받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믿고 따르는 신들을 위하여 돈을 받는다는 느낌을 가지게 하는 돈 받는 기술이 뛰어나다.

우리 무당들 보다 더 많은 돈을 강요하고 받고 있지만 그들은 욕을 먹지 않는다. 유독 무당들만 돈을 밝히는 집단이라고 일반인들이 느끼게 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많이 있겠으나 무당들의 일상생활이 너무 눈이 튀고 세속적이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또한 고액의 굿 값을 아무렇지 않게 함부로 뱉어내는 무당들의 욕심에서 비롯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여 본다.  

무엇을 하든 돈이란 놈은 필요조건이다. 돈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는 것이 지금의 현실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누구나 돈을 벌기 위하여 경제적인 활동을 하고 있다. 그러나 누구든 돈에 너무 집착하면 주위에서 욕을 먹게 된다. 지금의 무당들이 장사꾼들 보다 더 돈에 대한 집착이 강한 것이 이러한 현상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아닌가 한다.

무당은 장사꾼이 아니고 민족종교의 사제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최소한의 체면을 서로 지켜나가면 무당들을 보는 시각이 조금씩 달라지리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