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지창 칼럼

너무나 착하고 고운 당신들

愚悟 2007. 3. 5. 14:08

 너무나 착하고 고운 당신들

 

사람들은 무당이라고 하면 사납고, 고집세고, 돈만 밝히고, 막무가네로 나가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편견이 생기게 된데에는 우리 무당들의 잘못된 행동과 왜곡된 이야기들이 더해져서 사람들의 생각을 지배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당들은 보통사람들보다 훨씬 착하고, 순하고, 부드럽고, 아름다운 마음씨를 가진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고등종교라고 일컫는 외래종교의 사제들이 사회에서 존경받고 대우를 받는 것은 일정한 교육을 거쳐 사제로 임명되기 때문으로, 일정교육 기간에는 인성교육도 상당부분 차지하고 있다.

그들은 화가나고, 자기고집을 부리고 싶어도 신도들이나 사람들 앞에선 참고 눌리며 지낸다.  

그러나 우리 무교인들은 그때 그때 감정에 충실했어인지 그 순간을 참지 못하고 자기의 감정을 다 들어내다보니 남들의 눈에는 막무가네로 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사제들과 달리 무당은 하고 싶다고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하기 싫다고 하지 않아도 되는 그런 사제가 아니다. 

시세말로 하나님께 한번 찍히면 영원히 벗어날 수없는, 무당이 되지 않고는 다른 방법이 없다.

그러면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인 삼신께서 무당으로 점지할 때 시냇물에 돌 던지듯 던지다 아무나 맞으면 무당을 만드는 그런 것은 아니라 생각한다.

한사람의 무당을 만들기 위하여 태어날 때 부터 점지하여 지켜보시다 때가 되면 무당이 되게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면 무당으로 점지하는 조건은 무엇일까? 현재 무당들이 처한 상황을 역으로 추적하여 유추해 보겠다.

현재 대부분의 무당들이 무식하고 성질이 변덕스럽고, 돈만 밝히고, 고집이세다고 이야기 한다.

지금 무당들은 많이들 배웠지만 예전에는 거의 학교 교육을 길게 받지 못한 분들이 많았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인간의 교육이란 인간의 삶을 살아가는데 기본적인 지식을 알려주는 것이지만, 신의 길을 가는데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 다는 것이다. 즉 , 조금 배우고 아는 사람이 모르는 사람을 속이고 사기를 치는 일이 많다. 인간의 학문을 좋은 곳에 쓰지않고 남을 속이고, 신의 공수를 인간의 짧은 이치로 의심하고, 잔머리 굴리는데 많이 사용될 수 있기에, 신은 많이 배운 사람보다 머리 속에 인간의 교육에 물들지 않는 깨끗한 사람을 좋아하지 않나 생각한다.

성질이 사납고 변덕스럽다는 것은 무당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으로, 무당을 인간으로만 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무당들은 하루에도 여러 신령들이 몸에 실여 이런 저런 공수를 내리고 요구를 한다. 그러나 문제는 여러 신령들이 일괄되게 한가지를 공수만 주는 것이 아니라 저마다 다른 공수나 요구를 할 때, 제자인 무당들은 많은 고통과 어려움을 겪는다.

또 장군이 실리면 장군의 위용을 나타내기도 하고, 선녀나 별상이 실리면 여자로서의 모습과 언어를 사용하기도 하는 등 그 신령에 맞게 행동을 하게 된다. 무당들이 억제하려고 애를 쓰도 그런 모습은 자주 접하는 사람들은 금방 알게 된다. 그러니 무당이 변덕스러운 것이다.

이 신명 저 신명, 신명마다 요구하는 것이 다르고, 무당이기 전에 인간적인 느낌과 감정도 있는데 그것을 무시하는 공수나 요구는 무당들을 성격을 변화시키고 사납고 변덕스럽게 만들기도 한다고 생각한다.

무당을 만신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만신령을 모시고 살기 때문이니 성격도 만가지 성격이 나올 수 있다. 이런 특수한 무당들의 삶을 이해한다면 이런 말은 하지 못할 것이다.

돈 만 밝힌다?

이 말은 자본주의 사회에 사는 사람으로서 무당들도 어쩔 수 없는 것이다. 다른 종교와 달리 헌금이나 보시 등 수단이 없는 무교에서는 상담이라는 점만 보았어는 경제적으로 안정이 될 수 없다. 당연히 굿이라는 의식을 통하여 경제적인 이익을 추구한다. 그러나 이러한 굿을 돈 버는 수단으로만 생각하는 무당과, 굿은 돈을 벌어먹으려는 무당들의 수단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의식이 문제다.

옛말에 '정성들여 나쁜 것은 없다.' 라고 하였다. 정성이란 말 그대로 정성이다. 굿을 하는 무당의 정성이요. 굿을 드리는 제가집의 정성이요. 그 정성을 받아 정성을 보답하는 신령님들의 정성이다. 굿을 하고 난뒤 내가 바라는 것이 이루어졌다, 이루어지지 않았다가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나의 조상들께 대접하면서 뿌리를 다시 깨우치고 현재의 자신이 있게 해준 것에 감사드리고, 천지신령님께 고개 숙이면서 겸손을 배우는 것 자체가 정성인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자신이 바라는 일에 더욱 열심히하게 되고 그 결과로 소원을 이루게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굿만 하면 안되는 것도 되고, 모든 것이 다 이루어지는 것 처럼 이야기하는 무당들의 잘못이 굿의 의미를 왜곡시켜 지금의 상황을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무당이 고집이 세다고 하는데 많은 사람들을 상담하고 신령님들의 공수대로 움직이게 하려면 고집이 셀 수밖에 없다.

수많은 사람들은 자기나름대로의 가치관과 이해력이 있기 때문에 인간의 이치에 맞지않는 공수가 내려지면 그것을 수용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러나 인간의 이치로 이해하고 해결하려면 혼자 알아서 처리 할 것이지, 왜 무당에게 상담하러 왔는가? 

자기가 원하는 대로 방법이나 공수가 나오지 않으면 귀담아 듣지않고 자기 마음대로 처리해 버린다. 이런사람들을 바르게 인도하고 잘되게하려면 그들의 기를 꺽지 않으면 되지도 않는다. 또 무당들이 고집이 있지 않으면 그들이 따라 오지도 않는다. 이런 이유로 무당들이 고집이 세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습관이 일상생활에서도 그대로 나타날 때가 많기 때문에 그런 말이 나오는 것이다.

무당들을 바라보는 편견과 오해는 그들을 이해하지 못하고 단순한 인간으로 바라보는데서 비롯된다. 무당들로 보통사람들처럼 평범하게 그렇게 살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살지 못하는 무당들의 아픔을 이해하여야 한다.

무당들은 본디 착하고 착한 사람들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착하고 마음씨가 곱고 부드럽고 아름답기 때문에 신들이 무당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사회가, 환경이 무당들을 나쁘게만 바라보고 몰고 가기 때문에 무당들이 자꾸만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닌가 한다.

민족종교인 무교의 사제인 무당들의 삶을 이해하고 무당들도 부드럽고 아름다운 여자라는 것을 알아주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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