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지창 칼럼

어느 老교수의 정해년 운세

愚悟 2007. 3. 31. 01:08

무속과 관련한 많은 저서와 방송 출연으로 무당뿐만 아니라 일반인에게도 널리 알려진 노교수가 얼마전 30대 무속인 권모씨로 부터 성폭행 혐의로 검찰에 고소를 당하였다.

이 사건을 두고 총여학생회에서 기자회견과 농성, 그리고 학교 측에 강력한 항의로 노교수는 불명예스럽게 명예교수에서 직위해제를 당하고 교수 연구실을 쓸쓸히 떠났다.

그러나 검찰 조사 결과 무속인 권모씨가 제출한 녹취록은 뛰어난 편집기술을 동원하여 평소의 대화를 짜집기한 것으로 들어났고, 도리어 성폭행 당하였다고 고소한 무속인 권모씨가 무고죄로 불구속 수사를 받게 되었다.

이 사건의 소식을 접한 필자의 생각은 "아니 땐 굴뚝에 연기나랴?" 라는 속담을 떠오르게 한다.

그동안 노 교수는 많은 무속인들을 만나서 인터뷰를 하고, 결과물로 무속에 관한 책도 많이 출판하였다. 또 출판과 아울러 유명세를 타면서 방송 등 여러 언론 매체에 얼굴을 내밀고 기고를 하면서 무속인들에게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노교수는 교수라는 사회적인 지위와 유명세를 빙자하여 무당들을 대하는 이런 저런 행동을 전해 듣고 알고 있는 필자로썬 <사필귀정事必歸正>이란 사자성어가 떠오르는 것은 어찌된 영문일까?

어찌 이렇게까지 되었는지 이 사건만 두고 보면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평생을 쌓아온 명예가 하루아침에 무너져버리는 비애감과 분통함은 필자도 조금은 이해가 된다. 

그러나 여기서 노교수에 대하여 전해들은 평소의 행동들에 대한 구체적인 사실은 나열하지 않겠지만, 어찌 그럴 수가 있을까 하는 의문이 생기는 것과 동시에 노교수는 무속인들을 너무 쉽게 생각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오죽했으면 무속인이 노교수를 성폭행으로 고소하였겠는가?

아무른 관계도 없고 잘못이 없다면 그런 일은 생길 수가 없다.

모든 사건에는 인과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분명 노교수는 지금까지 해온 대로, 자신이 무당들을 생각하고 느낀 대로 무당들을 무시하고 쉽게 생각하여 행한 행동이 오늘의 이 사태를 일으켰다고 생각한다.

노교수를 고소한 무속인 권모씨 역시 아무른 이유 없이 저명한 노교수를 성폭행으로 고소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고소한 무속인 권모씨는 녹취록을 조작하여 증거로 제출한 것은 명백한 잘못이다. 그러나 성폭행을 하였다는 사람은 사회적으로 저명인사로 널리 알려져 있는 노교수다. 

아직까지도 사회에서 편견과 멸시를 받고있는 이름 없는 일개 무속인이 아무른 증거 없이 성폭행 당하였다고 한다면 웃음거리 밖에 되지 않을뿐더러, 계란으로 바위치기로 도리어 자신이 당할 것 같아 녹취록을 조작하였으나 그 결과는 마찬가지로 자신이 무고죄로 불구속 되었다. 

그러나 계란으로 바위를 친 무속인 권모씨의 그 용기에 찬사를 보내고 쉽다.  

또한 더 이상 노교수가 무속인들을 만나 이런 저런 헛된 생각과 망상을 못하게 차단하였다는 소기의 성과에  많은 무속인들은 찬사를 보낼 것이다.

필자는 예전에 "무속에 기생하는 세 마리 기생충" 이라는 글을 몇 번 쓴 적이 있다.

세 마리 기생충이란 학자충, 언론충, 작가충을 이야기 한다.

지금은 세 마리 기생충들 중 작가충과 언론충은 거의 사라졌다.

그러나 유독 사라지지 않고 무속인들을 병들게 하는 기생충인 학자충은 사라지지 않고 있다.

아니 이 기생충들은 무당들이 스스로 키우고 있으니 사라질 수가 없다.

유명세를 타보려는 무당들이나 무형문화재에 관심이 있는 무당들은 무속학자나 교수라고 하면 그냥 코를 땅에 박고 어떻게 하면 눈에 들어 잘 보일 수 있을까 하는 어리석은 생각들을 하고 있으니, 무당들이 학자들을 기생충으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특히 얄팍한 장사꾼 심보를 가진 무당들은 노교수를 등에 업고 유명세를 타보겠다고 노골적으로 노교수에게 접근 하였으며, 또 노교수가 접근하여 오기를 기다렸다.

노교수 역시 조금 뜰 기미가 있는 무당이 있으면 잊지 않고 찾아다니며, 장사꾼 같은 무당들의 얄팍한 심리를 잘 이용하였다.

몇 년 전 노교수 덕택에 방송을 타면서 유명해졌다가 그 유명세가 부메랑이 되어 방송으로 매장당한 무당도 있다.

결국  오늘의 이 웃지 못 할 사건의 발단은 학자충을 이용하여 유명세를 떨쳐보려는 무당과 그들의 얄팍한 심리를 잘 알고 있다고 스스로 믿고 있는 노교수의 자만이 무당을 너무 쉽게 생각하여 비롯된 행동의 결과물이다.

조금 유명한 무당치고 노교수를 만나지 않은 무당은 없다. 그러나 대부분의 무당들은 노교수를 결코 반기지 않는다. 그리고 노교수의 사회적 직위와 유명세 때문에 거절하지 못하고 끌려 다니는 무당들도 많이 있다.

대부분의 많은 무당들은 자신이 모신 신명님만 믿고 민종종교의 사제로서 묵묵히 소임을 다하고 있건만, 장사꾼이 되어버린 일부 무당들이 더 유명해져서 더 많은 돈을 벌겠다고 이런 저런 학자충을 키우고 있으니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동안 노교수가 접촉한 많은 무당들이 정해년에 관재수와 망신수가 있다고 아무도 일러주지 않았는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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