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근교 사외 삼당 답사기
무가에서 자주 등장하는 사외 삼당, 사외삼당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모르고 그냥 중얼거리거나 아예 무슨 말인지 조차 모르는 무교인들이 많다.
사외삼당私外三堂이란 궁 밖에 있는 세 개의 성황당을 이야기 한다. 즉 도성 밖에 있는 성황당으로 <충렬화주당>, <왕십리수풀당> <금성당>을 일컫는 말이다. 특히 <금성당>은 만리동에 있던 밖금성당과 은평구에 있는 안금성당으로 나누어 불렀다.
비록 도성 밖에 있지만 그곳을 찾는 일반인이나 무교인들이 인산인해를 이루었던 곳으로 영험함에 모두 고개 숙이던 곳으로 우리 무교의 성지가 되는 곳이다.
그런 관계로 지난 15일 학생들과 함께 서울에 위치한 사외 삼당을 답사하였다.
< 충렬화주당 내부 모습>
먼저 삼성동에 자리 잡은 <화주당>을 들렀다. <화주당>의 본래 이름은 <충렬화주당>이었다.
남한산성 축성과정에서 억울하게 죽음을 당한 이인고를 기리기 위하여 세운 성황으로 이인고장군이 모셔져 있다.
예전에 위치에서 쫓겨나 다시 지어기 때문에 한옥이 아닌 양옥으로 지어져 있다. 건물은 사자졌지만 화분은 남아 아직도 많은 무교인들이 찾고 있다. 하지만 화분의 보존상태가 너무 열악하여 형태를 잘 알 수 가 없었다.
각종 규제와 배타적인 시각 등 세월의 도도함에 이겨내지 못하고, 초라하기 짝이 없는 <화주당>의 모습은 우리들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예전에 영혼결혼식을 하는 곳으로 유명한 <화주당>, 강남의 중심지인 삼성동에 자리 잡은 탓에 그 위세에 주눅이 들었는지 초라하기만 한 모습이 바로 우리 무교의 현주소가 아닌가 하는 아픔이 있었다.
이어서 동대문 밖 <자주당성황> 예전에 동쪽 무녀들이 반드시 들리며 정성을 드렸다는 <자주성황당>은 창신동 동망봉 부근에 위치한 것으로 추정만 되었지 세월의 무상함에 그 흔적조차 찾을 길이 없었다.
예전에 자주동이라고 불렀다는 창신동의 이름에 금시초문이라는 그 동네 어르신들의 말에 허탈함을 느끼며, 정순왕후가 단종을 그리워하며 매일 올라 영월을 바라보고 눈물 흘렸다는 <동망봉東望峰>에 올라 동망봉산신제에 대한 간단한 이야기를 들었다.
이어서 미아리 고개에 존재하였던 <되네미성황> 된 놈들에게 잡혀간 사람들이 다시 돌아오기를 기원하는 뜻으로 생긴 미아리고개의 옛 이름이다.
예전에 미아리 고개 정상 부근에 되네미성황이 자리잡고 있었다.
내가 다니던 6~7년 전만 하여도 매원초등학교 뒤편 미아리 고개 정상에 초라하지만 세월의 깊이를 알 수 있는 당 집을 볼 수가 있었다. 그러나 아파트광풍의 희생물이 된 <되네미성황>은 아프트 건설 현장으로 변해 있어 그 흔적조차 찾을 길 없었다.
이어서 찾아간 곳은 자하문 근처에 있었던 것으로 기록이 남아있는 <독낙정성황>, 창의문과 자하문 근처를 헤매다가 말았다. 그곳 역시 빌라로 변해버려 그 흔적조차 알 수가 없었다.
이어서 현재 존폐의 기로에 서 있는 은평구 <금성당>을 찾아갔다. 조선 세조대왕의 동생 금성대군을 기리는 사당인 금성당은 쉽게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은평 뉴타운으로 온통 공사현장이 되어버린, 회색 먼지와 시멘트 밀림 속에 초라하게 자리 잡은 금성당의 모습을 찾았을 때는 가슴이 벅첬다.
하얀 먼지 속에서도 위풍당당하게 자리잡고 서 있는 금성당 서낭나무는 너무나 반가웠다.
그러나 반가운 마음도 잠시 금성당은 사방이 공사 펜스로 막아놓아 들어갈 수가 없었다.
<은평구 금성당> <소공동의 원구단>
<이태원 부군당 모습> <부군당 안 모습과 신령님들>
현재 옮기느냐, 이 자리에 두느냐를 두고 한창 논란이 진행 중이라고 한다. 이어서 무악재에서 두 번씩이나 쫓 겨 다니다 결국 사라져 버린 <사신성당>에 얽힌 이야기와 아픔을 전해들은 학생들은 무악재를 넘는 동안 잠시 침묵이 흘렀다.
이어서 남대문 밖에 존재하였던 <오수재노인성황당>, 서울역에서 후암동으로 올라오는 길이 오수재길로 되어있지만 그 흔적은 찾을 수가 없었다. 그 동네에서 60년을 살았다는 어르신의 이야기로는 힐톤호텔 부근 쪽에서 옛날에 굿을 많이 하였다는 것만 알뿐 다른 것은 알지를 못하였다.
이어서 사외삼당은 아니지만 덤으로 이태원부군당을 들렀다.
부군당 건물은 잘 보관되어 있으나 그곳 역시 부군당 터를 자손이 팔아치워 소송이 한창 진행중인관계로 예전에 화려했던 제사가 축소되고 굿도 하지 못하고 있다고 하니 안타까울 따름이다
이어서 조선 대한제국으로 선포하고 고종이 황제로 등극하여 하늘에 제를 지냈던 원구단을 들렀다. 원구단 팔각정 지붕 위에 자리 잡은 잡상만이 당시의 위세를 느낄게 할 뿐 조선호텔의 위세에 눌린 원구단은 지금 우리 대한민국에서 처한 무교의 현실 같았다.
<왕십리 수풀당 현판> <왕십리수풀당 내부 모습>
마지막으로 땅거미가 짙어지는 시간에 <왕십리수풀당>을 들렀다.
그나마 <왕십리수풀당>은 관리하는 무교인이 있어 나름대로 깨끗하고 단정하게 정리가 되어있다.
하늘에 계시는 물애기씨를 모시는 곳이라고 한다. 물애기씨가 두 분이다. 여탐굿을 하던 곳이라고 한다. 또 삼신을 받는 곳으로 유명하였다고 한다.
무신도도 더 이상 훼손을 막기 위하여 표구를 잘해 두었지만 옛날의 흔적이 많이 사라진 것 같아 관리의 어려움과 아쉬움이 남았다.
그러나 이렇게라도 보존하고 관리하고 있는 그 당주 무교인에게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다.
이런 시설물들을 지자체나 서울시에서 관리를 하여야 함에도 불구하고 개인이 관리하고 있다는 것이 너무 서글픈 현실이다.
성황이라는 말은 <부도지>를 보면 작은 소도라고 하였다. 즉 소도와 같이 하늘에 제사를 드리는 신성하고 엄숙한 곳이다. 일본 같으면 신사와 같은 곳으로 그것도 나라에서 관리하고 엄숙한 성지로 변해 있을 것이다.
우리 민족의 정체성과 사상을 담고 있는 성황당이 외래문화에 의해 비틀거리고, 경제 논리에 의하여 사라지고 황폐해지는 모습들을 바라보면서 우리 민족의 정신이 바로 서는 날이 언제일까 안타깝다. 우리 민족의 정체성이 바로서기 위해서는 현장에서 활동하는 무이 무교인들의 책무가 막중하건만 그런 책임감을 느끼는 무교인이 과연 몇이나 될까하는 생각에 마음이 답답하기만 하다.
사라진 성황당이나 현존하는 성황당 터에 정복자처럼 기독교의 십자가가 우뚝 서있다.
하늘을 찌를 듯 서 있는 십자가는 우리를 보고 못난 후손들이라고 조롱하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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