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속 이야기

굿과 무속

愚悟 2009. 1. 10. 20:56

 

 

 

우리 무속은 수 천년을 내려오면서 온갖 고초와 수난을 당하였지만 그 맥이 끊어지지 않고 우리 민족 생활 전반에 깊이 뿌리 내리고 있는 것은 바로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의 가치를 인정하는 생생지생(生生之生)의 대 원칙에 충실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 무속은 자연의 모든 것에 생명이 있다고 생각을 하고 그것을 아끼고 사랑하며 몸소 실천하기 위하여 신으로 승화시킨 것이라 생각을 한다. 이 말의 뜻을 가장 잘 나타낸 말이 바로 무당을 다른 말로 부르는 만신(萬神)이라는 말이 아닌가 한다.

이 생생지생(生生之生)을 다시 세분하여 우리 굿에 잘 나타나고 있는 것이 화해동심(和解同心)과 해원상생(解寃相生)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는 마을의 도당굿이나 부군굿 등에서 굿의 중간이나 또는 굿을 다 마치고 난 뒤 무당과 그 굿판에 참여한 사람들이 모두 한데 어우러져 한마당 걸죽하게 춤을 추고 즐긴다.

우리는 이렇게 굿판 마지막을 함께 즐기는 가운데 자연스럽게 우리는 같은 민족으로 너와 내가 아닌 우리라는 하나의 공동체를 만들어 내면서 굿의 대미를 장식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일상생활에서 생긴 이웃간에 생긴 반목과 개인간의 오해와 갈등을 모두 한 순간에 다 풀어버리고 서로 협력하여 마을의 발전과 개인의 번영을 위하는 상생(相生)의 관계로 발전시키는 것이다.

 

개인이 하는 굿거리 중에서 유일하게 제가 집(굿을 하는 집) 사람들과 바로 연결되는 굿이  조상거리이다. 즉 제가 집의 4대 조상님들을 전부 모셔서 비록 육신은 죽어 없어졌지만 혼백만이라도 무녀의 입을 통하여 자손들과 대화를 하는 거리다. 이것은 아무리 부모 자식간이라도 살아 생전에 할말을 다하고 살지를 못한다.

살아 생전에 자손들에게 하지 못하였던 말들을 무녀의 눈과 입을 통하여 자손들을 만나 가슴에 맺힌 말들을 풀어놓고, 자손들과 살아 생전에 맺힌 가슴의 응어리를 푸는 해원거리다.

엊그제 죽은 부모님이나 할머니가 무녀의 입을 통하여 가슴에 묻어 두었던 한 많은 사연들을 다 풀어 놓는데  어느 자식인들 울지를 않겠나 이렇게 무녀와 제가집이 한바탕 실큰 울고 나면 인간들의 마음은 한결 후련해지는 것이다.

 

이것은 한마디로「화해동심(和解同心)」「해원상생(解寃相生)」이라고 압축할 수가 있다. 조상거리는 죽은 자와 산 자가 무당을 통하여 대화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인 것이다. 그래서 조상거리를 하기 위하여 굿을 하는 사람도 있다. 즉 조상님과 대화를 하면서 실큰 울고 싶어서 굿을 하는 것이다.

이렇게 굿을 통하여 화해동심과 해원상생을 이루어 냄으로서 크게는 민족의 대동단결을 이끌어 내는 하나의 구심점 역할을, 작게는 한 가정의 화목을 이루게 하는 것 또한 무속의 큰 역할이었다.

 

그러나 이런 긍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무당을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왠지 꺼림직하고 가까이 하기를 꺼리는 경향이 있다. 또한 무당이라하면 탐욕과 무지의 대명사로 생각하고 우리는 업신 여기거나 폄하하기도 하였다. 

무당과 가까이 하면 왠지 귀신이 자기에게 붙을 것 같고, 이상한 현상이 자신에게 일어나 불행해 질까 염려하기도 한다.

또한 무당들이 신을 모시고 있는 신당에 들어가기가 왠지 거북스러운 느낌을 많이 받는다.  이러한 느낌을 받는 것은 우리가 무당을 귀신을 모시는 집단으로 잘못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무당들은 귀신을 모시는 것이 아니라 한많은 귀신들과 대화를 통하여 그 귀신의 한을 풀어주고 잘 달래어 이승에서 떠돌면서 자손들을이나 사람들을 괴롭히지말고 저승으로 갈 것을 요구하며 안내해 주는 사람이다. 

 

이렇게 무당을 보는 시각이 좋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무당에게 불확실한 자신의 미래에 대한 예언은 듣고 싶어 한다. 무당에게 점을 보는 것을 무꾸리라고 한다.

요즘 무꾸리하러 오는 세대는 20대부터 노인까지 다양하게 분포되어 있다. 특히 남자들도 많이 무당집을 다닌다.

전 국민의 85%가 점을 본 적이 있다는 통계가 나왔다. 지금은 점을 보러 다니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상의 문화가 되어 버렸다. 그러나 아직도 무당과 가까이 하는 것을 꺼리면서 자신에 관한 일에는 무당에게 매달리는 이중적인 면을 보이는 것이 사람들의 마음이다. 그러나 지금은 시대가 많이 좋아졌다. 무당을 보고 선생님이라 부르며 젊은 학생들과 직장 여성들이 많이 찾아든다.

 

무당이라고 하면 반드시 굿을 하여야 한다. 굿을 할지 모르는 무속인은 무당이라 하지 않는다.

굿이라고 하면 무당이 돈을 벌기 위한 수단으로 단순히 기복적인 행위로만 치부해 버리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굿은 단순한 기복행위를 비는 미신적인 행위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굿에는 앞에서 말한바와 같이 아주 깊은 뜻이 담겨져 있다. 굿은 바로 우리 민족의 정체성이며 우리 민족의 삶 그 자체였던 것이다.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한곳으로 결집시키는 구심점 역할을 하였으며, 인간들의 마음속에 맺힌 한을 풀어주고, 막힌 곳은 뚫어주는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또한 굿은 우리 문화의 근간으로 굿에서 많은 전통 문화가 파생되었다.

무복에서 의상이 나왔으며 굿 음식에서 전통음식, 그리고 무당 춤에서 무용이, 굿 장단에서 음악이, 무당들의 소리에서 국악과 판소리가, 무당들의 놀이에서 연극이, 무당들의 재담에서 만담 등 수많은 문화가 파생되었다. 그 중에서도 무당이 하는 재담은 많은 사람들을 웃기는데, 황해도 굿을 할 때 무당과 장고가 주고 받는 재담 하나를 소개하고자 한다. 도산 말명거리에서 나오는 도산 할머니 재담으로 무당과 장고할머니가 하는 발음대로 기록한 것이라 좀 어색한 부분이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