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방

불꽃처럼 나비처럼

愚悟 2009. 9. 19. 11:23

 

요즘 배우 수애가 명성황후를, 조승우가 홍계훈역을 맡은 구한말의 이룰 수 없는 애틋한 love story를 주제로 한 영화 <불꽃처럼, 나비처럼/김용균 감독>이 세간의 관심을 끄는 것 같다.

 

엄격한 유교사회에 그것도 일반 어염집 여인이 아닌 조선황실의 황후가 지아비인 고종을 두고 다른 남자를 연모하였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며, 상상하는 것 조차 불경죄로 대역죄에 해당하는 중죄이다.

 

그러나 필자는 1993년 명성황후의 억울한 죽음을 해원해야 한다는 생각과 명성황후의 억울한 죽음과 일본의 악랄한 침략 방법을 널리 알려야 한다는 취지아래 명성황후를 신으로 모신 무속인과 함께 <명성황후해원굿보존회>를 결성하여 8월 15일과 10월 8일 두번에 걸쳐 우이동과 롯데월드 민속관에서 해원굿을 가졌다.

 

그리고 지금까지 매년 10월 8일 이면 명성황후의 억울한 영혼을 달래는 해원굿을 17년 이상 <명성황후해원굿보존회>에서 해오고 있다.

 

그 당시 명성황후에 대한 자료를 수집하고 관련 서적을 탐독하다보니 그 당시 명성황후의 마음과 심정을 조금은 읽을 수 있었다고 할까?

필자는 그 당시 임오군란으로 명성황후가 위급에 처했을 때 홍상궁의 오라비되는 홍재희의 재치로 무사히 성난 구군사들의 손아귀에서 빠져 나올 수 있었다.

 

그때 한치 앞을 내다 볼 수 없는 위급한 상황이었지만 31살의 풍만한 여인 명성황후는 시아버지인 대원군위 기세에 눌려 우유부단하고 연약한 고종과 달리 무예로 단련된 홍계훈의 넓고 단단한 등에 엎혀 궁궐을 빠져 나가는 그 순간의 감정은 어떠했을까?

 

사태의 심각성보다 건장한 사내의 등에 엎혀 가는 이상한 모습에서 처음 느끼는 야릇한 감정에 더 충실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불경죄가 될련나? 그러나 그 순간 명성황후는 생전 지금까지 느껴보지 못한 이상한 감정에 몰입되어 아무른 생각도 없이 행복하고 황홀했을 것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31살의 젊은 여인의 뜨거운 몸은 홍재희라는 단단한 사내의 등에 풍만한 가슴을 겹쳐진 것만 하여도 그 당시는 파격적인 모습이었건만, 부득이 등에 업기 위하여 엉덩이를 손으로 감싸 안아야 한다는 그 자체는 지금 상황의 위급함 보다도 그 손길과 느끼는 감촉, 그리고 사내다운 그 냄새에 잠시 명성황후도 취했으리라고 생각하게 되었으며, 그때부터 명성황후가 마음 속에 간직한 사내는 홍계훈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또한 홍계훈 역시 일국의 국모를 등에 엎는 순간 등에서 느껴지는 풍만한 여인의 젖가슴, 그리고 자신의 손에서 꿈틀거리는 엉덩이의 예민한 부분 등 이런 민감한 부분들과 함께 엉켜버린 미묘한 감정에 몰입하게 된 두 사람은 상대방이 누군지를 생각하기도 전에 서로에게 충실한 한 남자와 여인이 되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 후 홍계훈은 명성황후의 충실한 신하가 되어 중요한 일이 있을 때 마다 항상 명성황후를 도왔으며 명성황후 역시 홍계훈을 믿고 의지하며 일을 맡겼다는 것을 기록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홍계훈 역시 명성황후를 마음의 여인으로 생각하여 항상 그 주위를 맴돌면서 그의 안위를 보살피고 자신이 가진 연모의 정을 남몰래 드러내었다는 것을 알 수 가 있다.

그런 홍계훈의 사랑은 을미사변이 일어날 때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그 당시 대세는 일본쪽으로 기울어, 홍계훈은 사실 훈련대장이었지만 우범곤(우장춘 박사 조부)을 비롯한 많은 훈련대 간부들과 대신들이 일본공사의 지시를 받을 때 였다. 또한 일본은 훈련대를 해산시켜버려 사실상 무장해제를 시킨 때였다.

 

그런 가운데 미우라 고로<三浦梧樓> 일본 공사가 이끈 일본군들과 낭인이라는 집단은 음력 8월 20일 새벽에 대원군을 앞장 세워 경복궁으로 명성황후를 시해하려 쳐들어 왔다.

그때 무너진 훈련대 병사들을 이끌고 없는 몇자루 되지도 않는 총을 들고 명성황후를 지키기 위하여 일본군과 맞서다 광화문에 장렬히 전사한 장군이 바로 홍계훈 장군이다.

 

자신의 죽음으로 명성황후가 피신할 시간을 벌어주려고 하였을 것이다.

그 무엇이 홍장군에게 목숨을 요구하였을까? 목숨도 아끼지 않고 지킬 수 있었던 것은 국가의 존망보다는 명성황후 즉, 사랑하는 여인의 목숨을 지키기 위한 마지막 발버둥이었을 것이다.

이렇게 홍계훈이 사랑하는 여인 명성황후 민자영을 보호하지 못하니 그날 명성황후는 일본인 낭인들에 의하여 시해 당하고 말았다.

 

시간까지 당하였다는 기록도 있고 보면 그 당시 일본인들이 명성황후에 가진 적개심은 대단하였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아니 그만큼 명성황후를 두려워했는지도 모른다.

일본이 조선을 삼키기 위하애서는 반드시 없어져야 할 인물이 명성황후였으며, 명성황후를 일본이들이 시해하는 과정에서 홍계훈 역시 사랑하는 여인과 함께 저 세상으로 가기를 원했는지도 모른다.

 

자신이 지키지 않으면 아무도 지켜줄 수 없는 조선의 국모 명성황후를 자신의 힘으로 지킬 수 없음을 안 홍계훈은 마지막 저 세상에 가는 길 만은 함께 가기 위한 길을 택했는지도 모른다.

홍계훈대장은 처음에는 별감으로 시작하였지만 후에 훈련대장까지 오르게 된다. 그리고 을미사변 떄 명성황후를 지키려다 전사한 후 군부대신에 추증되고 장충단에 모셔져 있다.

기록에는 홍재희와 홍계훈 등으로 거론되고 있으나, 처음에는 홍재희를 사용하였으나 나중 홍계훈으로 개명한 것이다. 

 

이렇게 16년이 지난 지금 명성황후의 애틋한 사랑이야기를 주제로 한 <불꽃처럼, 나비처럼> 영화가 나오게 되어 반갑다. 그 당시 연극인들을 만났을 때 명성황후와 홍계훈의 사랑을 주제로 한 연극을 만들어 보라고 권하였던 기억이 난다.

 

그떄보다 지금 이런 주제의 영화가 나오게 된것은 이제 명성황후와 홍계훈 장군의 사랑이야기를 거부감 없이 한 여인의 이룰 수 없는 사랑이야기로, 아니 한 시대를 풍미한 여인의 Platonic love를 이제 이 시대가 받아들일 수 있는 시기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지하철에 붙어 있는 <불꽃처럼, 나비처럼> 영화 광고판을 볼 때 마다 그 당시 공부하면서 느꼈던 명성황후와 홍계훈의 마음을 읽은 것처럼 가슴이 저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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