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도異道로 빠진 무당들
무당이라 하면 우리 민족종교인 무교의 사제로서 오랜 세월 민중과 더불어 삶의 애환을 함께 나누고, 느끼며 살아온 것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래도 외래종교가 들어오기 전에는 무교가 민족의 전통종교로써, 민족종교의 사제로서 무당이라는 직책도 위상을 높이 세울 때도 있었다.
그러나 외래 종교의 힘에 밀리고, 시대의 변천에 따라 무교의 위상이 땅에 떨어지고, 무당을 천시하는 사회를 살아오면서 무당으로써 자존심과 긍지는 사라지고, 비굴하고 추한 행동과 도저히 사제라고 할 수 없는, 사회적으로 지탄받을 행동만 일삼는 무식한 집단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지금까지 온갖 탄압과 멸시, 설음과 비난을 감수하면서 풀뿌리처럼 끈질긴 생명력으로 지켜온 우리의 정체성이며 민족종교인 무교가 좋은 세상을 만난 지금에 와서 왜 이 모양 이 꼴이 되었는지 한심한 생각에 가슴이 아프다.
무교를 탄압하고 천시하던 조선시대나 일제 강점기 시절에 비하면 지금은 얼마나 좋은 세상인가?
무교의 활동이 자유롭게 보장되고, 우리 민족 전통문화의 중요한 한 축으로 인정을 하여 우리 굿이 무형문화재로 지정되는 좋은 세상을 만났다고 할 수가 있다.
그러나 무당들은 어두웠던 과거를 생각하여 이 좋은 시기에 똘똘 뭉쳐 외래종교와 어깨를 나란히 하기 위한 사제로서 갖추어야 할 개인의 자질과 능력을 향상시키고, 무당으로서 갖춰야 할 덕목을 키워나갈 노력은 하지 않고 있다.
그리고 민족종교로써 정당한 대접을 받기 위하여 모두의 힘을 하나로 결집할 생각은 하지 못하고, 이도異道로 빠져 서로 시기하고 의심하고 싸우는 일에만 전념을 하고 있으니 한심하기 짝이 없다 하겠다.
신라 눌지왕 때 박제상 선생이 쓴 <부도지符都誌)> 25장을 보면
「사람들이 천부天符의 본음本音을 잊어버리고, 탑을 만드는 유래를 깨우치지 못하고, 도를 와전하여 이도異道가 되고, 서로 시기하고 의심하여 싸우고 정벌하는 것으로 일을 삼았다.」란 구절이 있다.
이 구절은 소희巢姬로부터 이어온 백소白巢와 흑소黑巢의 무리가 금단의 열매인 포도를 따먹는 어리석은 행동을 저지르고, 그로 인하여 발생한 오미五味의 변을 뉘우치지 못하니, 마고 삼신의 가르침인 천부의 본음을 잊어버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천부의 본음을 잘못 해석하고 이해하여 후손들에게 가르치니 인간으로서 가져야 하는 참마음을 버리고, 사악한 마음을 가지게 함으로써 소희의 후손들은 이도異道로 변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 결과 서로 시기하여 모략과 비방을 일삼고 또 의심하고 서로 믿지 못하여 싸움으로 일관하는 사악한 인간으로 전락하고 만 것을 안타까워하는 대목이다.
여기서 부도지에 나오는 이도異道를 들먹이는 것은 바로 지금의 무당들이 이도에 빠진 것이 아닌가 하여 소개하는 것이다.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무당들의 행태를 한번 보자.
과연 삼신의 뜻인 천부의 본음을 이해하고 깨우쳐 인간 본래의 선한 마음, 참마음을 가슴에 새기고 살아가는 무당들이 몇이나 되는가?
아니 이런 거창한 천부의 본음이니 하는 어려운 말은 집어치우고 무당들이 무쟁이라 일컫는 일반인들 보다 남을 배려하고 이해하고 사랑하는 참 마음 선청후善淸厚를 실천하고자 하는 무당들이 과연 몇이나 되는지 의심스럽다.
그리고 지금 무당들은 누가 적이고 아군인지를 구분하지 못하고 조그만 이익에, 보잘것없는 자존심 때문에 민족종교의 사제로서의 체면과 명예를 헌신짝처럼 버리고, 목에 핏대를 세워가며 서로 비난하고, 시기하고, 의심하면서 싸우고 있다.
아무리 좋은 시절이 왔다한들 아직 무당이라고 하면 한 번 더 쳐다보는 시절이다.
깃털보다 가벼운 그깟 자존심을 세우자고, 개도 안 물어 가는 돈 욕심에 눈이 멀어, 만나면 서로 헐뜯고 시기하고 싸우는 일부 무당들 때문에 전체 무당들이 욕을 먹는 것이다.
물론 다른 종교에도 이도異道에 빠진 무리들이 없다고 할 수가 없다.
그러나 우리도 스스로 반성하고 고치지 못하면서 남의 종교를 비방하고 탓하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니다. 그것은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를 보고 나무라는 격이기 때문이다.
어찌 무당들은 만나기만 하면 십중팔구 피 터지게 싸우고 있는가?
무당이 무당을 욕하고, 다른 무당이 잘되는 것을 보면 울화가 치밀고 속이 역겨워, 입에 개 거품을 물고 헐뜯고 욕을 하여야 직성이 풀리는 무당들, 또 군중 심리에 휩싸여 한 사람이 비난하면 너도나도 같이 맞장구치면서, 그 사람을 잘 모르면서 비난의 초점도 없이 비난을 하기 위한 비난을 일삼고 있는 무당들만 자꾸 늘어가니 무교의 발전을 기대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여 본다.
또 이런 무당들은 무당으로써 자질과 교양을 높이는데 게을리 함으로 남의 충고는 잘 듣지 않고, 책 또한 잘 읽지도 않는다. 무교의 심오한 사상과 이치에 대하여서는 전혀 알려고 노력도 하지 않고 장구에 맞춰 허수아비 춤추듯 춤만 추면 다 되는 줄 아는 무당들이다.
이런 이유는 신께서 아니면 성철스님께서 도를 닦는 사람들은 책을 보지 말라고 한 말을 잘못 이해하여, 무식한 무당이 되는 지름길로 들어서는 줄도 모르고, 노력하기 싫은 자신을 합리화시키기 위하여 “책을 보지 말라”는 그 말만 가슴속에 새겨둔 무당들이다.
또 중심을 잡고 자기가 모시는 신명님의 말씀만 따른다는 아주 그럴듯한 핑계를 들먹이며 개뿔도 모르면서 아는 척하며 남의 충고와 남의 의견을 비난하는 무당들이다.
부도지 25장을 또 보면「마고麻姑 삼신에 관한 이야기와 천부의 이치를 설設하였으나, 모두가 의아하게 여기고 받아들이지 아니 하였다.」라는 구절이 있다.
이 말은 지금 덜 떨어진 막가파 무당들의 소행을 일컫는 말이라 난 생각한다.
아무리 무교의 깊은 이치와 사상을 설명하여도 엉터리 무당들이 무슨 말인지 모르니, 듣지를 않고 도리어 자기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비난하고 나서며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어찌 지금으로부터 1600여 년 전에 쓴 책이지만 그 당시의 백소의 무리들이 취한 행동들이 지금 이 시대에 사는 무당들에게 딱 맞아 떨어지는지, 박제상 선생의 예지력에 감탄할 뿐이다.
민족종교의 사제로서 최소한의 자긍심과 명예를 생각하고, 지키려고 스스로 노력한다면 이런 추한 모습들을 보여주지 않을 것인데, 지금의 무당들은 어찌 이렇게 되었는가?
아무리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신에 의하여 무당이 되었다 하더라도, 그 순간부터 인간이 아닌 사제로서 품위를 스스로 지키고 닦아나가야 함에도 불구하고, 일반인들보다 못한 망나니나 다름없는 행동을 보여주고 있으니 정말 신을 모신 사제들의 집단인가 의심이 갈 뿐이다.
요즘 무당들의 언행을 보면 정말 신은 존재하는 것인지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된다.
언제까지 무당이라고 손가락질을 받으며 설움을 겪을 것인가?
무당이 되고 난 뒤 받은 설움도 억울한데, 자식에게까지 무당의 자식이라고 억울한 일들을 당하게 하려고 하는 것인가?
진정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존경받는 무당이 되는 것인가를 깊이 한번 생각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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