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12월 22일은 동짓날이다.
동짓날은 24절기 중 22번째 절기로 추분을 지나면서 밤의 길이가 길어져 음의 기운이 가장 센 날로 밤의 길이가 가장 긴 날이다.
동지는 대설로부터 15일 후, 소한 15일 전 날이다. 일 년 중 밤이 가장 길고 낮이 가장 짧은 날로 음陰이 가장 센 날이지만 동짓날이 지나면 밤의 길이가 짧아지고 낮의 길이가 조금씩 길어진다.
이 말은 음陰의 기운이 약해지고 양陽의 기운이 강해진다는 말이다. 그래서 이 날을 우리 조상들은 亞歲라고 하여 관상감에서 달력을 만들어 임금님에게 진상을 하면 임금님은 달력에 황장력과 청장력으로 구분하여 신하에게 나누어 주었다.
이러한 풍습을 하선동력夏扇冬曆이라고 하여 단오 날은 더위를 피할 수 있는 부채를, 동짓날에는 달력을 나누어 주는 것을 말한다. 또 동짓날에는 집 안으로 들어오는 나쁜 기운을 물리치기 위하여 뱀을 뜻하는 한자 ‘사蛇’자를 써서 벽이나 기둥에 거꾸로 붙이는 풍습이 있었는데 이것을 '동지부적'이라고 한다.
동짓날은 팥죽을 쑤는데, 팥죽 속에 들어가는 옹심이를 새알심이라고 한다.
새알심은 새(鳥)의 알을 나타낸 말이다. 새의 알은 바로 봉황의 알이란 뜻이며, 봉황은 상상의 새로 바로 염제신농을 의미한다.
염제란 불을 다스리는 황제라는 뜻이다. 불의 근원은 태양이므로 염제란 바로 태양을 의미하기도 한다. 새알심을 다른 말로 불의 알이라고도 부른다. 즉 염제신농의 씨라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팥죽에 넣어 먹는 새알심은 봉황새의 알이 되고, 불의 알이 되며, 불알은 바로 태양이 되는 것이다.
불알은 염제신농의 씨를 가진 알로써 자손을 번창시킨다. 이 말이 ‘부랄’이 되었다고 생각한 다.
불의 시조는 한인천제이며 그를 이어 염제신농도 불의 신이다. 이 불의 씨인 새알심을 동짓날 팥죽에 넣어 먹는 것은 바로 한인천제와 염제신농으로 이어져 온 태양숭배 사상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하여 낮이 길이가 가장 짧은 날인 동짓날에 팥죽을 쑤어 새알심을 넣어 먹는 것이다. 팥죽은 붉은 기운으로 부정한 것을 물리치고 깨끗하게 다시 부활하는 태양을 맞이한다는 의미가 담고 있다고 하겠다.
새알심을 나이 숫자보다 한 알을 더 먹어야 한 살을 더 먹는다는 속설도 역시 태양을 맞이한 숫자를 의미하는 것으로, 태양을 상징하는 새알심을 하나 더 먹어야 새해에 떠오르는 태양을 맞이하였다는 뜻이 되고 그러므로 한 살을 더 먹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해맞이는 바로 동짓날 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낮이 가장 짧은 동짓날 해맞이를 하는 것은 동짓날이 지나면 다시 낮의 길이가 길어지기 때문에 정기를 잃었던 태양의 부활로 생각하여 전해온 우리 민족의 풍습으로, 동짓날을 아세亞歲, 또는 작은설이라고도 한다.
로마에서는 이 날이 바로 <새터날리아>라고 불리는 토속종교의 축제일이다.
이 축제는 일 년 농사에 대한 감사의 의미로 농경신에게 제물을 바치고 풍년을 자축하는 대규모 축제로 기간은 12월 7일부터 24일까지다.
<미트라교>에서는 이 날은 의로운 태양이 다시 탄생하는 날로 여겨 축제를 벌였다. 태양이 다시 탄생하는 거룩한 날을 예수그리스도의 탄생일로 하였으며 그날이 바로 크리스마스가 되었다.
24절기는 태양력에 의해 자연의 변화를 24등분한 절기로 태양 황경이 270도 지점에 오는 때를 동지라 한다. 그러나 양력과 음력의 차이가 있어 동지의 음력날짜가 다를 때가 많다. 동지가 음력 11월 초순에 들면 ‘애동지’라 하고, 중순에 들면 ‘중동지’라고 한다. 20일이 지나서 동지가 들면 ‘노동지’라고 한다.
동짓날엔 붉은 팥죽을 쑤어 문과 벽에 뿌리며 상서롭지 못한 기운을 물리치며 복을 기원하였다. 이것은 팥의 붉은 색이 바로 치우천왕의 기운을 나타내며, 치우천왕의 기운이 붉은 색으로 나타나 나쁜 기운과 역귀를 물리치는 벽사의 힘을 지녔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또 붉은 색은 양陽으로, 나쁜 기운이나 악귀는 음陰으로 여겨 양으로 음을 물리친다는 의미도 된다.
기독교에서는 양을 잡아 집집마다 문설주에 피를 발라 두어 화를 면할 수 있었다고 성경
기록되어 있다. 이 날을 유월절이라고 한다.
유월절은 애급 사람들에게는 죽음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생명이 주어진 날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문설주와 안방에 어린 양을 잡아 피를 발라두면 여호와의 천사가 그것을 보고 유월 즉 건너뛰어 죽음을 면할 수 있었다는 의미다. 이때 양의 피는 우리의 팥죽과 같이 붉은색으로 벽사를 나타낸다.
유월절은 히브리어로 '페사크'라고 한다. '페사크'라는 말은 ‘지나간다’ ‘넘어간다’ ‘넘어뛴다’ ‘용서한다’는 뜻이다.
하나님께서 양의 붉은 피가 있는 집은 여호와의 종들이니 죽음을 유월하였으니 생명을 주었다고 하여 기념하는 날이다.
또 유월절인 1월14일은 무교병無酵餠이라는 빵을 먹었다. 무교병은 누룩을 넣지 않아 부드럽지 않고 딱딱하고 맛없는 빵을 의미하며 애급에서 급하게 탈출할 때 먹었던 빵을 기억하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다음날인 1월15일부터 일주인 동안은 무교절無酵節이라고 하여 신앙심이 깊은 사람들은 일주일 내내 무교병을 계속 먹는다고 한다.
우리도 예전부터 동짓날엔 팥죽을 쑤어 집안 고사를 지냈지만 지금은 그냥 팥죽만 쑤어 먹는다.
동짓날에 민간에서는 옹심이 점을 차기도하였는데 팥죽 속에 들어 있는 옹심이를 꺼내어 화롯불에 올려놓으면, 그 열에 의하여 옹심이의 모양이 달라진다. 이 때 옹심이의 모양이 길게 늘어지면 아들을 낳고 동그랗게 오그라들면 딸을 낳는다고 하였다.
또 각 사찰에서는 사월 초파일 다음으로 큰 축일로 여겨 많은 신도들이 줄을 이어 절을 찾아 부처님께 정성껏 기도하고 팥죽을 먹기도 한다.
동짓날의 팥죽은 옛날 공공씨라는 사람이 재주 없는 말썽꾸러기 아들을 하나 두었는데, 그 아들이 동짓날에 죽어 역귀가 되었다. 그 후 동짓날만 되면 이 역귀가 나타나 사람들을 괴롭히므로, 아들이 생전에 두려워했던 팥죽을 쑤어 역귀를 물리치는 데서 비롯되었다고 <형초세시기>에 기록되어 있다.
이것을 홍석모의 <동국세시기>에 인용됨으로써 민가에 널리 퍼졌다.
이 설화를 바탕으로 음력 11월 초순에 드는 동지를 애동지, 중순에 들면, 중동지, 하순에 들면 하동지라고 한다. 애동지에는 팥죽을 쑤면 아이들이 안좋다고 하여 팥죽 대신 시루떡을 하여 부정한 것을 물리쳤으며, 노동지가 들면 노인들이 세상을 많이 떠난다고 한다.
금년이 노동지라 김정일도 갑자기 죽었을까?
또한 동짓날 팥죽을 쑤는 이유는 역귀가 된 공공씨의 아들을 물리치기 위함이다.
하지만 애동지에 팥죽을 쑤면 역귀가 된 공공씨의 아들뿐만 아니라 멀쩡한 아이들까지 좋지 않다는 이유로 팥죽을 쑤지 않는다.
그러나 이 설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형초세시기>에는 애동지에 대한 기록이 없다. 또 팥죽을 쑤었다고 역귀도 아닌 아이들이 다칠 수 있다는 논리도 맞지가 않는다. 아이는 인간으로 역귀 즉, 귀신과는 다르다는 사실을 간과한 것이다.
또 우리민족은 옛날부터 아기가 태어나서 10살까지 아이의 생명과 안전, 우환 등 모든 것을 삼신할머니가 관장한다고 믿어 왔다.
삼신은 우주를 창조하고 만물을 만드신 하나님으로 인간의 탄생을 관장하시는 우리 민족 최고의 신이다.
이러한 삼신이 하찮은 팥죽의 붉은 기운에 밀려 아이를 보호하지 못하기 때문에 아이가 있는 집은 애동지 때 팥죽을 쑤지 않는다는 이야기는 말이 되지 않는다.
또한 팥죽의 붉은색은 치우천왕의 기운을 나타내는 의미라고 하였다. 치우천왕은 삼신의 후손이다. 후손이 조상을 귀신으로 취급하여 물리친다는 말은 도통 이해가 되지 않는다.
다시 말하여 애동지에 팥죽을 쑤지 않는다는 것은 삼신도 역귀로 생각하여 팥죽을 쑤면 삼신의 기운도 물리쳐 아이들이 삼신의 보호를 받지 못하기 때문에 안전을 보장 받을 수 없다는 논리가 될 수 있다.
이 말은 삼신을 역귀와 똑같이 취급하였다는 이야기로 중국의 논리에 우리 스스로 빠져 버린 것이 아닌가 한다. 아니면 조선시대는 스스로 우리의 정체성을 잊어버리고 중화주의에 빠졌기에 이런 풍습이 전해지는 것이 아닌가 한다.
언제부터 이런 풍습이 전해져 왔는지는 아직 정확하게 이야기할 수도 없고 문헌도 찾을 수 없다. 그러나 1849년 <홍석모>에 의하여 <동국세시기>에 동짓날 풍습이 소개되면서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는 동지팥죽은 아마 소중화주의를 표방하는 조선의 시대적 배경에서 탄생한 풍습으로, 말 만들기 좋아하는 인간이 만들어 낸 악습이 아닌가 한다.
조선시대에는 중국을 능가하는 역사서와 민족사상을 기록한 사상서들이 전부 음지로 숨어들었다는 기록을 보면 당시 시대의 상황으로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형초세시기>의 기록을 인용 왜곡하여 우리의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애동지라고 팥죽을 쑤지 않고 그냥 지낸다면 정말 역귀가 집안으로 들어와 아이들을 괴롭힐지도 모르는 일이다.
20세기 초 최영년崔永年은 <해동죽지海東竹枝>에서 동지 팥죽을 이렇게 노래했다.
“집집마다 쑤어 만든 팥죽 향기
문에 뿌려 부적과 굿을 대신 하네
오늘 아침 산귀신 모조리 쫓아 버리고
양기 생기는 동지에 상서로움 맞이하네”
애동지라고 팥죽을 쑤지 않는다면 산散귀신을 어떻게 다 쫓을 것이며 양기 생기는 언제 맞이할 것인가 묻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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