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속 이야기

무신도가 가지는 의미

愚悟 2013. 3. 13. 15:37

 

 

 

 

무신도巫神圖는 신병을 통해 신의 존재를 체험 한 강신무가 모시는 신의 초상이다.

무화巫畵, 무속화, 맞이, 화분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무화는 신의 화상뿐만 아니라 무구에 그려진 그림이나 무의식을 할 때 그리는 간단한 그림 등을 포함, 굿하는 장면이 묘사된 민화까지도 포함한다.

 

신병을 앓고 무교의 사제가 된 강신무는 자신이 받은 신을 몸주신으로 모시고 그 신의 모습을 형상화한 무신도를 신단에 봉안한다.

그것은 무당의 모든 영력靈力이 자신들이 모신 신으로부터 나온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런의미에서 무신도는 무교의 대표적인 상징물이라고 할 수 있다.

 

예전에 무당들은 죽기 전 자신이 사용하던 무신도와 무구를 아무도 모르는 곳에 묻거나 태워버렸다. 뿐만 아니라 사용중인 무신도라도 훼손되면 새로 제작하여 봉안하고 원본은 태워버렸다.

이러한 관례는 엄격하게 지켜져 사제지간이라도 대물림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따라서 무교의 오랜 역사에 비하여 연대가 오랜된 무신도는 거의 전하지 않는다.

현재 전하는 대부분의 무신도는 조선후기 이후에 제작된 것들이며 강신무가 존재하는 한 앞으로도 계속 생산될 것이다.

 

무신도는 언제부터 그려졌는지 정확하게 알 수가 없다.

『삼국유사』「기이」제2에

“나라 사람들이 처용의 형상을 문에 그려 붙여서 사귀를 물리치고 경사스러운 일을 맞이하게 되었다.” 는 기록과

『동국이상국집』「노무편」병서에

“ 방벽을 단청으로 그린 신상을 가득 걸어놓고 칠원성군과 구요성은 액자에 그려 붙였다.” 는 기록이 있으며,

『오주연문장전산고』

“목멱산 국사당에 고려 공민왕을 비롯한 무학, 나옹, 지공상 등의 여러 신상이 걸려있다.”는 기록이 있다.

 

이들 세 기록 중 ‘처용의 형상’은 무신도라 하기보다 부적에 가깝고, ‘단청으로 그린 신상’이나 ‘국사당에 걸린 신상’이 훨씬 무신도를 지칭하는 구체적인 표현이라고 보아, 늦어도 고려시대 이전부터 무신도가 그려졌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러나 강신무가 신의 화상을 봉안하는 것이 통례였던  만큼 무교가 시작되면서부터 그려졌을 것이라는 추정도 가능하지만, 무신도가 쉽게 그려지거나 얻을 수 없는 것이라 그 시기를 단정지을 수가 없다. 

 

제정일치시대를 지나 사회가 점차 분화하기 시작하면서부터 무교는 사회통합보다 개인의 기복에 무게 중심을 두는 종교가 되었고, 그런 까닭에 무신도 역시 신당이라는 폐쇄적 공간에서 신상으로서 기능을 하며 오늘날 까지 이어져오고 있는 것이다.

또 무당을 만신萬神이라 하듯이 무신도에 등장하는 신은 매우 많다.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이지만 공통적으로 모시는 신으로는 옥황상제, 일월성신, 삼불제석, 삼신, 칠성신, 산신, 서낭신, 그리고 장군, 신장, 대사 등을 들 수 있다.

이들 중 칼을 휘두르며 말을 내닫는 모습의 장군신, 고깔을 써고 장삼을 입은 모습의 삼신, 대사, 등은 대부분 외형상 일정한 형식이 있어 그림만으로도 신의 성격을 알 수 있다.

 

이렇듯 외형상 별차이가 없어 보이는 그림이라도 구체적 이름으로 불리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면 장군신을 임경업, 최영, 남이 등으로 부른다든가 대사신을 무학, 나옹, 서산, 사명 등의 이름으로 부르는 것이다.    

이는 무신도가 신 내림을 받은 무당의 기억에 의존하여 그려지는 그림인데다 화기畵記마저 없어, 무당이 자위적으로 명명한 것을 그대로 답습할 수밖에 없었던 것과 관련이 있다.

 

무신들은 개별적 혹은 복합적 권능을 가지고  있으며, 대체로 인간의 수면장수와 길흉화복, 그리고 마을의 안녕 등을 관장하는 신앙으로 숭상되어 왔다.

그 결과 마을의 수호신으로 장군신이나 산신이 많이 등장하게 되었으며, 해안가에는 서낭신으로 여신이 많이 등장하게 되었다.

요즘은 자신의 뿌리를 중히 여기는 무당들이 많아 자기 성씨의 시조의 모습을 무신도로 그려 모시는 사례도 많이 있다.

 

무신도는 보통 명주나 무영, 한지에 청, 백, 적, 흑, 황의 오방색 안료로 그려진다. 안료로는 주로 당채와 색채를 사용하며, 현대의 물감을 사용하기도 한다.

무신도를 마지라고도 무르는데 이 마지麻紙라는 이름은 삼베와 종이를 이용하여 무신도를 제작하였기에 붙여진 명칭이 아닌가 한다. 

지금도 황해도 무당들의 무신돌르 보면 삼베와 같은 누른색을 띄는 뚜거운 종이에 무신도를 그리고 있다. 

  

무신도는 단독형태든 집단 형태든 하나의 신을 표현하기 위한 그림이라는 점에서는 초상화의 성격을 가지며, 인물의 주된 직무와 능력을 상징하는 내용을 담는다는 점에서는 종교화의 성격을 가진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무신도巫神圖의 자세와 표정이 대체로 일률적이고 변화가 크지않은 것도 예전에 그려진 무신도를 표본으로 다시 무신도를 그렸기 때문이다. 

 

무신도의 특징 중 하나는 주신을 강조한다는 것이다. 무당이 죽어 신격화된 성수를 표현할 때 성수를 중심으로 좌우에 배치되는 장구와 징할머니가 성수보다 훨씬 작게 그려진다.

보조자를 작게 그림으로써 상대적으로 주신의 종교적 기능을 강조하려는 것이다.

 

무신도는 무당이나 민간화공에 의해 그려진 민화풍 그림과 불화를 전문적으로 그리는 금어金魚에 의해 그려진 불화풍의 그림이 있다.

민화풍의 그림은 구도, 화법, 채색이 미숙한 반면, 불화풍의 그림은 필선이 유려할 뿐만 아니라 구도와 채색이 조화를 이룬다.

황해도 만신들은 예전부터 민화풍의 무신도를 선호하고 있어 지금도 민화풍으로 그려 모시고 있는 반면, 서울 한양 이남의 만신들은 불화풍의 무신도를 선호하고 잇다.

그러나 민화풍이나 불화풍이나 지금은 제작 비용이 많이 들어 무신도도 쉽게 모실 수 없는 실정이다. 

 

무신도는 우리 민족의 삶의 근간이 된 무교의 상징적인 초상으로 소중한 우리 문화유산임에는 틀림이 없다. 

하지만 아직 무신도는 불화와 달리 정부나 학계의 관심과 지원이 부족하여 무신도에 대한 이해와 연구가 미흡한 것이 사실이다.

그 결과 점점 사라져 가는 무신도의 원형들을 보존할 기회를 잃어버리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까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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