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단수神檀樹와 보제수菩提樹 그리고 생명수生命樹
우리 상고사에‘신단수神檀樹’아래에서 한웅천왕이 배달나라를 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단군세기>를 보면,「한웅천왕 시절 소도에서 제사를 지내고 예법을 숭상하였다. 또한 땅에 제사 지내기 위하여 방구단方丘壇을 만들었다. 각목을 세우고 아버지에게 제사지내며 그리고 산에 웅상雄像을 만들었다. 이때부터 소도에 한웅천왕의 형상을 만들어 세우고 이를 웅상이라고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또 「경인원년(BC 1891) 11세 도해 단군에 이르러 오가에 명을 내려 열두 명산의 가장 뛰어난 곳을 골라 국선의 소도를 설치케 하였다. 많은 박달나무를 심고 가장 큰 나무를 골라 한웅의 상으로 모시고 여기에 제사를 지내며 웅상雄像이라고 이름 했다.」는 기록도 있다.
이것은 우리 민족이 나무를 숭상하는 신앙을 가졌다는 것을 이야기 한다. 이렇게 우리 민족은 한웅천왕이 신단수 아래로 내려와 신시를 열면서부터 나무에 대한 외경심이 생겨났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이러한 외경심은 신목이 되어 인간들에게 재앙을 막아주는 구실과 아울러 복을 주는 목신으로 존재하여 왔다.
이렇게 나무가 목신으로 존재하게 된 이유는 나무는 하늘로 솟아 있기에 하늘로 통하는 연결고리로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즉, 신이 강림하는 통로이기도 하고 인간이 신에게 다가갈 수 있는 유일한 길로 여겼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특히 우리민족은 나무에 대한 외경심이 대단하여 서낭제를 지내기도 하는데, 여러 지방에 많이 존재하고 있는 당산나무, 서낭나무가 그 좋은 예라 하겠다. 또 잎 · 꽃 · 과일을 맺는 힘을 주술적으로 여겼는지도 모른다. 나무를 신격화한 이야기는 <삼국유사>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데, 수로부인을 빼앗아간 해룡海龍에게 버들가지를 꺾어 노래 불러 되찾았다는 기록이다.
또 벼락 맞은 대추나무에 벽사의 의미를 부여하여 부적을 만들거나 그 나무를 그냥 몸에 지녀도 나쁜 기운이 사라진다고 믿었다.
제주도의 우도에서 자란 소나무는 사귀를 물리친다고 믿었기 때문에 해송으로 비녀나 칼자루, 단추 등을 만들어 몸에 지니고 다녔다고 한다.
집안에 금기사항으로 담장에 찔레나무를 심으면 호랑이가 다칠까 염려된다고 하였고, 복숭아나무는 조상의 영혼까지 쫓아 버릴까봐 집안에 심지 않았다.
자귀나무는 부부간의 애정이 더해진다고 믿었고, 엄나무는 나쁜 귀신을 물리치며 석류나무는 자손이 많다고 했다.
수목숭배는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널리 퍼져있다.
기독교에서도 나무가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기독경에 나오는 나무는 예수를 상징하는‘생명수’를 비롯하여, 지옥을 상징하며 악령과 함께한다는 ‘선악수’, 이스라엘 백성을 의미하는 ‘무화과’, 하느님의 생명과 축복 풍요를 의미하는 ‘올리브’, 하느님의 뜻을 이루도록 해준다는 의미를 가진 ‘포도나무’가 나온다.
포도나무는 동이東夷의 창세기인 <부도지>에도 인류를 타락시킨 나무로 등장한다.
그리고 불교에서도 나무가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먼저 석가가 깨우침을 얻었다는‘보리수’가 있으며, 그리고 근심과 걱정을 없애 준다는 뜻과 근심걱정을 용납하지 않는다는 뜻을 가진 ‘무우수無憂樹’와 ‘린비수燐比樹’가 있다.
이 ‘무우수’와‘ 린비수’는 마야부인이 석가를 놓을 때 붙잡았다고 한다. 이렇게 오래 종교에 나무가 중요한 역할을 하면서 등장하는 것은 모두 우리 상고사에서 비롯된 것이라 볼 수 있다.
또 우리 상고사를 살펴보면 그 당시 한인천제나 한웅천왕, 그리고 단군왕검의 신정정치의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기독교 구약에 이스라엘 신정정치의 역사가 등장하는 것이다.
종교와 신앙의 공통점은 기도와 주문이 존재한다는 것으로, 종교는 기도와 주문의 대상이 유일신에게 국한되며 일정한 기도문이 존재한다.
그러나 신앙은 일정한 기도문이 없으며, 특정 유일신이 기도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 민족의 기도와 주문에는 그 대상과 방법이 다양하였다.
우리 민족이 추구하는 기도와 주문은 개인의 이익보다 집단 , 즉 우리라는 개념 속에서 함께 동참하는 무리에게 임하는 주문이며 기도였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신명’ ‘신바람’ ‘얼쑤’ 등과 같은 추임새 등으로 표현되었으며 ‘신명나는 사회’ ‘신바람 나는 사회’ 등은 자기 혼자만이 즐겁고 행복한 것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더불어 잘사는 사회를 이루자는 뜻이다.
특히 우리가 국악 공연 중 판소리나 탈춤을 출 때 사용하는 추임새 역시 함께 동참하는 무리에게 신명나게 놀자고 하는 주문인 것이다.
그러나 외래종교들은 우리 민족의 정체성과 개성을 말살하고 자기들의 주입하는 사상에 물들게 하여 종교의 노예로 만들어 버렸다.
종교는 모든 것이 신이 조종한다는 미명아래 결과에 대한 인간들의 책임을 감소시킴으로서 신의 계시라는 핑계로 참혹한 범죄도 정당화 할 수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진실을 알면서도 종교를 이용하여 사회를 지배하고 조종하려는 사람들에게 권력을 부여한다는 것이다.
종교는 인류가 지금껏 고안해 낸 가장 강력한 통치기구이며 이념이 되어, 우리 민족이 스스로 자재하며 지키는 자재율을 망각하게 하고, 민족 신앙을 사이비 종교로 전락시킨 외래종교에 물든 이 나라가 과연 종교가 추구하는 목적을 완성할 수 있을까 염려된다.
지금 한국에서 거대 종교로 자리 잡고 있는 모든 종교들은 진정으로 개인의 독창적인 사고와 창의성을 존중하는 본래의 신앙으로 돌아가야 한다. 경전이나 조직을 이용한 협박이나 구속이 없는, 개인의 자유로운 의사를 존중하는, 스스로 자재하는 신앙생활이 널리 전파되었을 때 종교가 가진 본래 목적인 개인과 인류의 평화를 이룰 수 있으며, 종교의 존재 가치를 다시 한 번 확인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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