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속 이야기

천신대감과 도깨비

愚悟 2025. 1. 17. 12:52

천신대감과 도깨비

 

- 도깨비의 원형은 대장간의 모루와 방망이

- 치우천왕은 도깨비 대왕

 

우리의 민담에는 도깨비와 관련된 이야기들이 많이 있다. 어릴 적 할머니 무릎에 앉아 듣던 구수한 이야기 속에는 반드시 도깨비 이야기가 나온다. 도깨비를 다른 말로 허주(虛主) · 독각귀(獨脚鬼) · 망량(魍魎) · 이매(魑魅)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음허기(陰虛氣)로서 원시 신앙적인 귀신사상에 의하여 형성된 잡신으로 취급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 도깨비는 귀신이 인간을 보호 해주는 신이다. 한국 도깨비의 모습은 코믹하고 귀엽게 그려져 친숙하게 느끼고 있다. 하지만 일본이나 중국의 도깨비는 아주 무시무시하게 괴물처럼 그려져 있다.

 

배달나라 14대 한웅 자오지천왕은 일명 치우천왕 또는 도깨비 대왕이라고 불렀다. 도깨비 대왕이라고 부르는 연유는, 치우천왕이 갈로산에서 청동으로 창과 칼을 만들었을 뿐 아니라 갑옷과 투구를 만들었는데, 이때의 투구 모습은 소머리를 본떠서 뿔이 양옆으로 두 개가 달려 있었다. 이것을 사람들이 구리로 된 머리에 쇠로 된 이마라고 치우천왕을 도깨비라 부른 것이다.

 

용광로에서 불을 다룰 때 화기(火氣)로부터 얼굴을 보호하기 위하여 가면을 사용하였다고 추측할 수 있다. 이때 사용한 가면이 투구가 되고 탈이란 형태로 변형되어 민간에 전승되었다고 생각된다. 이 투구를 만들 때 대장간에서 사용하는 필수적인 도구가 바로 모루. 모루의 모습이 자와 닮았다.

 

경주 지역의 독특한 민간신앙으로, 두두리(豆豆理) 신앙이 있다. 두두리 신앙은 고려시대로 이어져, 경주 출신들은 다른 지역에서 살더라도 두두리를 신앙했다. 고려 무인 정권 때 이의민(李義旼, ?1196)은 집에 신당을 차려놓고 두두리 신의 화상을 모셨으며, 이의민이 패망할 무렵에는 두두리 신이 울면서 이 신당을 떠났다는 기록이 있다. 또 고려 고종 18(1231) 몽골군이 침입했을 때는 두두리 신이 무당을 통해 무기와 말을 제공하면 몽골군을 격퇴해 주겠다고 공언했다고 전한다.

 

두두리는 목랑(木郞) 또는 목매(木魅)라고도 하는데, 목매는 나무도깨비란 의미이다. 두두리는 두드린다는 의미가 있다. 그러므로 두두리의 신체(神體)는 대장간의 모루 위에 쇠붙이를 두드리는 방망이를 연상하게 한다. 또 일설에는 두두리는 나무 방망이라는 설도 있다. 그러면 도깨비의 신체는 방망이는 확실하다는 생각이 든다. 또 도깨비는 나무 방망이였다는 설화가 전승되고 있으니, 대장간의 모루와 방망이를 두두리 신으로 여기고 이를 도깨비의 원형으로 간주해도 무방하다고 본다. 두두리는 대장장이의 옛날 이름이란 것을 보아도 치우천왕의 금속신앙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황해도 굿거리 중 천신대감거리가 있다. 천신대감은 도깨비대감이라 한다. 천신대감은 불을 다루는 신으로 굴뚝과 아궁이를 드나들면서 복과 재물을 준다고 믿고 있다. 천신대감은 굴뚝과 아궁이를 드나들기에 얼굴과 손에 검정이 묻은 모습을 재현한다. 그리고 손과 얼굴에 묻은 아궁이의 검정을 사람들의 얼굴에 묻히면서 재수를 준다고 한다. 이렇게 천신대감거리는 검정으로 분장한 우스꽝스러운 모습들로 무당을 비롯한 참가자들이 모두 배꼽을 쥐고 웃는 재미있는 굿거리다. 이 굿을 통하여 치우천왕은 도깨비대왕으로 최초로 청동기 문화를 시작한 연금술사로 대장장이 신이었다고 생각한다

 

치우천왕은 중화민족의 시조라 할 수 있는 공손헌원과 74번 전쟁을 하였다. 그때 치우의 부대는 도깨비부대라고 부르며 공손헌원의 부대는 귀신부대라 하였다. 공손헌원의 귀신부대는 치우천왕의 도깨비부대에게 매번 전쟁에서 패하였고 공손헌원 부대는 치우천왕의 깃발만 보아도 달아나기에 급급하였다. 치우천왕은 큰 안개를 일으켜 적을 무찔렀으므로 도깨비가 등장할 때는 반드시 안개가 일어나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 후 치우천왕이 죽고 난 뒤 진나라와 한나라 때 주민들이 10월이면 치우 능에서 제사를 지냈는데 반드시 한 줄기의 붉은 띠 모양의 연기가 나타났다고 한다. 이것을 치우의 깃발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도깨비의 형상은, 치우 깃발의 붉은 색 얼굴과 부리부리한 눈 그리고 머리와 이마에 뿔이 달린 모습으로 그려지게 되었다. 그 후 중국에서는 용맹하고 덕이 많은 장군들의 얼굴색을 모두 붉은 색으로 나타나게 되었는데 그 대표적인 인물이 삼국지에 나오는 관우다. 관우는 긴 수염에 부리부리한 눈에 붉은 색의 얼굴을 하고 위용을 떨쳐 조조 군사들의 오금을 저리게 하였다.

 

중국의 기록에 의하면 치우가 황제헌원과의 전쟁에서 패하고 난 뒤 죽임을 당하게 된다. 그때 치우가 차고 있던 수갑과 족새를 들판에 갖다 버렸는데 그 자리에서 단풍나무가 자라났다고 한다. 또는 치우가 흘린 피에서 단풍나무가 자랐다고 하기도 한다. 치우가 죽은 지방을 ()’라고 하는데 치우가 죽을 때 흘린 피가 흘러들어 해지(解池)라는 연못이 되었다.

 

치우가 부활할까 두려운 황제헌원은 그의 몸을 육시를 하였다. 지금 중국 산동성 수장현에 있는 치우 묘는 치우의 머리가 묻혀 있다고 전한다. 이렇게 육시를 하는 처형이 조선시대에는 사지를 소나 말에다 묶어 사방으로 끌고 가게 해 육시를 해서 죽이는 것을 가장 무거운 형벌로 쳤다.

 

치우천왕의 다섯 곳의 시신은 죽어서도 황제헌원이 부리는 귀신들을 쫓아다니며 괴롭혔다. 그 결과 치우천왕의 다섯 곳의 시신은 귀신들이 치우라는 이름만 들어도 달아나던 옛날의 위용을 이어받아 지금도 귀신 쫓는 신장으로 추앙받는 것이다. 이렇게 귀신들이 치우천왕, 즉 도깨비를 무서워하는 것을 이용하여 궁궐이나 사대부의 기와집, 심지어는 사찰의 기와지붕에서까지 집안에 들어오는 귀신의 침범을 막으려는 뜻으로 치우천왕의 형상인 도깨비 모습의 귀면와를 만들어 놓게 되었다.

 

황해도 굿거리 중 군웅거리가 있다. 이 굿은 바로 죽은 치우천왕의 영혼을 위로하는 굿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 굿에서 돼지를 육각으로 자르는 이유는 치우천왕의 죽음을 잊지 말자는 의미가 아닌가 한다. 그러나 지금은 전쟁터에서 죽은 사람들의 혼()을 위로하기 위한 굿으로, 제명에 가지 못한 조상, 즉 험악하게 죽은 조상을 위로하는 굿거리로 변하였다. 군웅거리를 한자로 군웅(軍雄)’으로 쓰고 있는데, 임금 ()자를 사용하여 군웅(君雄)이라 해야 한다.

우리는 55일 단옷날이 되면 천중부적을 만들어 집안에 붙여 귀신을 쫓는 데 사용하고 있다. 조선시대 관상감에서 만든 부적문의 내용을 보면

55일 천중지절에 위로는 하늘의 녹을 얻고, 아래로는 땅의 복을 받아 치우지신(蚩尤之神)의 구리 머리, 쇠 이마, 붉은 입, 붉은 혀로 44병이 일시에 없어져라 빨리빨리 시행하라.라고 기록되어 있다.

치우천왕이 본격적으로 더위가 시작되는 단오를 맞아 더위와 함께 찾아오는 온갖 질병 즉, 사백 네 가지 질병을 몰고 오는 악귀들을 쫓아내는 도깨비부적으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가 있다.

 

서울 뚝섬에서 60년대까지 치우천왕을 모신 사당이 있어 매년 둑제를 드렸다. 이 둑제라는 이름은 치우의 깃발을 둑()기라고 한 데서 유래되었다. 둑기는 조선시대 전쟁을 할 때나 임금이 행차나 사열할 때 맨 앞에 등장하는 깃발이다. 지금은 사당도 사라져 버렸다. 현재 대한민국은 도깨비가 장난을 친 것이 아닌가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