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수를 상징하는 <거북이>
우리 민족에게 거북이는 매우 상징적이며 상서로운 동물이다. 미래를 미리 알려주기도 하고 신의 뜻을 전달해 준다. 그뿐만 아니라 거북이는 재물 복을 갖게 하는 영물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거북은 나쁜 의미보다 좋은 뜻을 가진 동물로 우리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아 왔다. 특히 거북은 장수의 동물로 십장생의 하나로 널리 그려졌고 오랜 삶에서 터득한 경험으로 지혜로운 동물이기도 하다.
거북은 오랜 옛날부터 점복의 상징으로 널리 사용되어 왔는데 지금도 널리 통용되고 있다. 즉 거북의 등을 태워 등짝이 갈라지는 것을 보고 길흉을 예언하기도 하였는데 이것을 귀복 龜卜 하였다. 그 예로 <삼국사기> 기록된 의자왕 20년에 있었던 백제의 멸망을 예언하는 거북이 등을 들 수 가 있다.
거북이는 각종 일상생활 도구에서도 많이 볼 수가 있다. 거북이 모양을 형상화한 대표적인 곳은 바로 문방사우라고 할 수 있으며 또 비석의 받침으로 많이 사용되었다. 비석의 받침으로 사용된 거북, 즉 귀부龜趺 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사용되었다는 것을 알 수 가 있다.
비석 밑에 거북이가 그려지게 된 때는 신라시대 부터이다. 커다란 거북에 용머리를 하고 있는 비석 받침돌을 비희贔屓라고 하는데 그 대표적인 유물로는 태종 무열왕릉 기념비를 들 수가 있다. 그리고 임금의 옥새나 왕의 인보 등에는 반드시 거북의 형상으로 손잡이를 만들곤 했다. 이것은 거북이 같이 그 왕조가 오랫동안 번창하기를 기원하는 의미가 있다. 이렇게 인장의 손잡이로 사용되는 거북을 귀뉴龜紐 라고 한다.
그밖에 집을 짓고 상량을 할 때 대들보에다 하룡河龍 해귀海龜 라는 글씨를 거북이 대신 쓰기도 하였다.
거북이는 은혜를 갚는 동물로 설화 속에 많이 등장한다.
그 대표적인 예로 이제현의 <역옹패설>에 나오는 이야기로 거북이를 살려주고 거북이의 도움으로 삼대가 재상이 되었다는 설화가 전해진다.
「통해현 포구로 큰 거북이가 잘못 들어왔다. 이를 발견한 당시 현령 박세통이 다시 바다로 살려 보내준다. 그날 밤 꿈에 백발노인이 나타나 “내 아들의 생명을 구해주었으니 공과 아들 손자 삼대에 걸쳐 재상을 지낼 것이다.”라고 말한 뒤 사라졌다. 이후 박세통과 아들 홍무는 재상에 올랐으나 손자 박함은 상장군에 그쳤다. 박함은 불만을 품고 거북이의 예언이 거짓이라고 시를 지어 노래했다. 그러자 박함의 꿈에 거북이가 나타나 말하길 “그대가 주색에 빠져 스스로 복을 찬 것이지 내가 은덕을 잊은 것은 아니다. 조그만 기다리면 좋은 소식이 있을 것이다.”라고 사라졌다. 그 후 박함은 재상이 되었다.」
거북이가 장수한다는 것은 신성한 동물로 여겨 옛사람들은 고분 벽화에 사신도로 많이 그려져 왔다. 즉 북방을 지키는 현무로 북쪽은 죽음을 의미하지만 현무는 죽음을 지키는 신을 의미하기도 한다. 또한 오랜 삶에서 터득한 경험이 바로 지혜로 연결되어 지혜로운 동물로 여겨졌다. 그 대표적인 이야기로 <토끼와 늑대 거북이의 지혜겨루기> 이야기를 들 수가 있다. 몇 번을 지고도 승복하지 않은 토끼 때문 마지막 내기로 나이가 가장 많은 사람이 이기는 것으로 하였다. 그때 성질 급한 토끼는 자기는 천살이라고 하였고, 늑대는 이 세상이 생길 때 자신은 태어났다고 하였다. 그 말을 듣고 있던 거북이는 눈물을 흘리면서 늑대 너를 보니 죽은 내 손자가 생각난다고 말하였다는 이야기다.
거북이가 민속놀이에도 등장을 하는데 충북의 거북이 놀이가 일제 강점기에는 대표적인 놀이였다. 사람이 둥근 멍석을 덮어쓰고 거북이 형상을 하여 집집마다 다니며 지신밟기로 액을 막아주고 한해의 풍성함을 축복하는 고사 등을 지내며 그 집안의 무사태평과 발복을 기원하는 놀이로 추석날에 행해졌다.
거북이와 같이 지혜롭고 보은을 행하는 사람들로 넘치는 사회가 되었음 하는 바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