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교는 기복신앙인가?
우리의 무교는 인류의 시작과 더불어 삼신으로부터 시작하였다.
유인시대를 거쳐 한인시대에 우리의 조상들이 이 땅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하면서 제일 먼저 행한 것은 하늘에 감사의 뜻으로 올리는 천제였다.
한웅 시대에 와서 참교(眞敎)라는 이름으로 삼신사상이 활짝 피워나 소도를 비롯한 무교의 근간이 되는 많은 형상과 이론이 정립되었다.
이후 단군 시대로 넘어와 부루 단군이 붕어 한 후 그의 업적을 기리고 찬양하기 위하여 흙으로 단을 만들고 옹기 속에 햇곡식을 넣어 올려놓고 기도를 드리기 시작하였다.
이 옹기를 부루단지라고 부르게 되었으며 일명 업주가리라고 하였다. 그리고 그 앞에서 기도하던 여자들 중 늙은 여자들이 자연스럽게 영적인 힘을 얻으면서 제사장 겸 통치자로써의 무당이 아닌 민간인 신분인 최초의 무당이 탄생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생긴 민간인 최초의 무당들은 인간의 나약함을 보완하기 위하여 절대적인 힘을 지니고 있는 유․무형(有․無形)의 존재 즉 자연의 힘에 대하여 간절히 기원하므로 인간에게 초복축사(招福逐邪)를 할 수 있다고 믿어 왔다.
이러한 단순한 믿음이 널리 세상에 전파되면서 일종의 종교적인 성격을 뛰면서 끊임없이 행하여 온 것이 지금 우리들의 무교인 것이다.
그러면 우리의 무교는 그 시절부터 지금까지 단순히 신을 섬기고 개인의 발복(發福)과 액(厄)을 막는 기복적인 행위만 하여 왔을까? 우리의 무교는 절대적으로 기복만을 비는 신비주의에 빠진 샤머니즘이 아니라는 것을 난 말하고 싶다.
무교는 인간이 시대를 살아가는데 꼭 필요한 그 시대의 정서를 우리의 가슴에 심어주고, 굿이라는 형태를 빌어서 좁게는 개인, 나아가서는 마을단위, 더 나아가서는 나라의 안녕과 풍요를 기원하면서 우리 민중들과 함께 하여왔다. 이렇게 민중들에게 굿을 통하여 무교의 가장 큰 근본을 자연스럽게 가르치며 실천해 왔는데 그것이 바로 퇴계 이황 선생이 말하신 생생지생(生生之生)이라고 말하고 싶다. 즉 우주의 모든 만물에는 모두가 생명이 있으며 각자 서로의 생명을 중요시하여 서로 아끼고 사랑하는 것이 모두가 함께 살아갈 수 있는 길이다 라고 하였다.
이 생생지생을 다시 말하면 우주의 이치에도 부합하는 것이다. 태양이 존재하므로 지구가 존재할 수 있고 지구가 있으므로 달이 빛나고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고로 달이 존재하므로 태양의 존재가 필요하다는 것으로 풀이 한다면 이 생생지생이라는 말은 대 우주가 생성될 수 있었던 대원칙을 말해주는 것으로 접화군생(接化群生)이라고 할 수도 있다 하겠다.
다시 말하여 네가 있음으로 내가 존재할 수 있으며 고로 모두 존재한다는 우주의 대 원칙을 가르치며 실천하여 왔으며 이것이 바로 무교의 근본이라고 말하고 싶다.
우리 무교가 수 천 년을 내려오면서 온갖 고초와 수난을 당하면서도 그 맥이 끊어지지 않고 우리 민족 생활 전반에 깊이 뿌리 내리고 있는 것은 바로 생생지생(生生之生)과 접화군생(接化群生)의 대 원칙에 충실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 무교는 자연의 모든 것에 생명이 있다고 생각을 하고 그것을 아끼고 사랑하며 또한 몸소 실천하기 위하여 신으로 승화시킨 것이라 생각을 한다. 이 말의 뜻을 가장 잘 나타낸 말이 바로 무당을 다른 말로 부르는 만신(萬神)이라는 말이 아닌가 한다. 이 말은 또 여러 군생들과 잘 화합하여 지내왔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 생생지생(生生之生)을 다시 세분하여 우리 굿에 잘 나타나고 있는 것이 화해동심(和解同心)과 해원상생(解寃相生)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는 마을의 도당굿이나 부군굿 등에서 굿의 중간이나 또는 굿을 다 마치고 난 뒤 무당과 그 굿판에 참여한 사람들이 모두 한데 어우러져 한마당 걸죽하게 춤을 추고 즐긴다.
우리는 이렇게 굿판 마지막을 함께 즐기는 가운데 자연스럽게 우리는 같은 민족으로 너와 내가 아닌 우리라는 하나의 공동체를 만들어 내면서 굿의 대미를 장식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일상생활에서 생긴 이웃 간에 생긴 반목과 개인 간의 오해와 갈등을 모두 한 순간에 다 풀어버리고 서로 협력하여 마을의 발전과 개인의 번영을 위하는 상생(相生)의 관계로 발전시키는 것이다.
이렇게 굿을 통하여 화해동참과 해원상생을 이루어 냄으로서 민족의 대동단결을 이끌어 내는 하나의 구심점 역할을 하여 온 것 또한 무교의 큰 역할이었다.
그러나 언제부인가 무교는 이러한 생생지생(生生之生)의 대 원칙과 화해동심(和解同心)과 해원상생(解寃相生) 그리고 접화군생(接化群生)이라는 덕목을 모두 잊어버리고 인간의 기복(祈福)에만 전념하는 신비주의와 자신만을 위하는 이기주의로 빠져 버렸으니 이 지구상의 사제 중 가장 능력이 뛰어나고 훌륭한 자질을 가진 무당으로서 존경받는 사제의 길을 스스로 포기하고 장사꾼의 길로 들어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여본다.
무교가 기복만을 기원하는 저급한 종교가 아니고, 타종교와 대등한 위치에서 어깨를 나란히 하기 위해서는, 아니 타종교 보다 월등히 우수한 민족종교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무교의 사상과 정신의 정립이라는 어려운 말을 쓰지 않고도 생생지생(生生之生)의 대 원칙과 화해동심(和解同心)과 해원상생(解寃相生), 그리고 모든 군생들과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 접화군생(接化群生)이라는 덕목만이라도 실천해 나간다면 무교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각이 달라질 것이며, 무교를 비하하고 멸시하는 못된 행동들이 사라지리라 생각한다.
이렇게 하려면 무교인들이 나보다는 남을 위한다는 생각과 자기가 최고라는 아집과 탐욕, 교만함과 거짓의 거적을 모두 벗어 던져버리고 환골탈태하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할 것이다.
이렇게 하여 비록 내숭이라 할지라도 겸손함과 교양을 지닌 아름다운 무당으로 다시 태어나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종교의 사제 중 가장 뛰어난 사제로서의 자세를 한번 보여주었으면 한다.
진정 남을 위하는 참된 무당으로 거듭 태어나 무당이라는 단어가 최고로 존경받는 말이 될 수 있도록 우리 모두 노력하여 보자.
그러나 지금의 현실은 모래알처럼 뭉치지 못하고 흩어지기만 하는 우리 무교인들 상호간에 가장 필요한 덕목이 화해동심(和解同心)과 해원상생(解寃相生) 그리고 접화군생(接化群生) 이라는 덕목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여본다.
'삼지창 칼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비싸도 너무 비싸다 (0) | 2006.05.15 |
---|---|
하늘의 소리를 듣는 귀고리 (0) | 2006.04.03 |
무당과 굿 (0) | 2006.01.26 |
숙정문의 액막이 (0) | 2006.01.23 |
무형문화재 관리의 허점 (0) | 2005.05.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