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방

유통기간

愚悟 2006. 3. 26. 19:16

유통기간


2006년 3월 31일

이마에 낙인처럼 선명한 유통기간은 세월이 먹어버려 얼마 남지 않았다 바스락거리는 상쾌함과 전율에 떨었던 달콤함, 행복이라 생각했던 고소함 그리고 많은 이들의 눈길을 끌었던 매혹적인 포장까지도 지난 시절 훈장으로 남아 시커멓게 타버린 가슴에 꿰매고 눈길 하나 주지 않는 어둡고 칙칙한 창고에 폐기처분 될 것이다 타인의 결정에 자신의 운명을 맡겨야 하는 순간에도 외마디 비명 한번 내 뱉지 못하고 숫한 변명 하나 늘어놓지 못하는 무력감에 스스로를 억겁의 세월 속으로 가둔다 황홀한 조명과 안락한 진열대 그리고 함께했던 많은 이야기를 세월의 박스에 쓸어 담는다 확신하지 못하는 낯선 세계에 대한 불안감에 또 다시 자신의 운명을 결정하지 못하고 엄습해 오는 두려움에 몸을 숨긴다 비워야 채워지고 유통기간이 다하기 전에 떠나야 하는 평범한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소낙비가 오고 칼바람이 불고 지척을 분간할 수없는 안개가 앞을 가렸다고 망설이고 주저한 나약했던 모습에 분노를 느끼지만 이미 낡고 무디어진 감정의 칼날은 시뻘겋게 녹을 뒤집어쓰고 유통기간이 끝나기만 기다리고 있다 마른 나뭇가지처럼 건드리면 부러질 것 같은 손가락에 눈물과 悔恨을 발라 유통기간을 지우려 문질러 본다 깨끗이 지우지는 못하더라도 푸른 잉크가 퍼진 흔적이 추하게 보이겠지만 유통기간을 다시 찍고 당당하게 진열대에 올려지고 싶다 박스 틈 사이로 비집고 들어온 지친 햇살을 온 몸으로 움켜잡고 실낱같은 희망에 태산을 묶어 혼돈이 가득한 현생에서 바둥거린다 별을 모두 삼켜버려 잔뜩 배가 부른 해는 서둘러 잠자리에 든다 언덕길에서 항상 고개를 쳐드는 가슴이 해체되는 듯한 통증도 핏줄의 흐름을 막고 있는 바위덩어리의 뻐근함도 해금 줄 같이 애절한 소리를 뽑아내는 후들거리는 다리의 떨림도 수많은 업들로 숨 쉴 공간마저 막혀버려 세월의 고통을 감당하기 버거운 허파의 탁한 비명소리까지도 황홀한 오케스트라의 연주처럼 느껴질 때 조각달은 깜깜한 밤하늘에 별들을 하나씩 만들어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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