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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황당과 서낭 성황당은 작은 소도 서낭은 웅상의 상징 서낭신과 성황신은 다른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서낭과 성황은 다 같이 그 마을, 또는 인간에게 안녕과 풍요를 가져다주는 수호신이라고 생각한다. 성황(城隍)이란 말을 처음 나오는 곳은 바로 부도지(符都誌) 제 14장이다. 부도지에는 성황당을 제일 먼저 세운 곳은 바다가로 되어있다. 그곳에서 하늘에 제사를 올리고 성황을 중심으로 사람들을 모여 살게 하였던 것 같다. 결국 성황은 씨족단위나 부족 단위로 천제를 올리던 장소 즉 소소도(小蘇塗)인 것이다. 그런 연휴인지 지금도 강릉을 비롯한 바다가 마을에 성황당이 많이 존재하고 있다. 몇 년 전 태풍 매미가 강릉에 폭우를 쏟아 부어 많은 희생자가 났다. 그러나 강릉 주변의 마을 중 성황당을 모시고 있는 마을은 불가사의하게 홍수를 피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것은 성황님을 잘 받들어 모신 결과라고 마을 사람들은 믿고 있다. 그러고 보면 성황당은 바로 마을의 지킴이라고 할 수도 있다. 여기에 제를 지내는 주민들의 모습이 바로 마을 굿이라는 형태로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면 서낭과 성황은 어떻게 다른가? 큰 나무로 모실 땐 서낭신이 되고 사당을 지어 모실 때는 성황당이 되는 것이다. 또 다른 형태로 산길에 돌무더기로 놓여 있는 서낭당도 있다. 이런 돌무더기 서낭은 전쟁시 서낭당에 쌓아 놓은 돌을 사용하여 적을 물리치기도 하였다. 그 대표적인 예가 행주산성에서 아낙네들이 행주치마로 돌을 나르고 그 돌로 왜구를 물리쳤다는 이야기가 증명해 준다. 그런 이유로 산성 안에 돌무더기 서낭이 많이 존재하는 것을 볼 수가 있다. 이렇게 서낭당은 경제적인어려움이 있는 마을이거나, 아니면 사당을 짓기에 입지적인 조건이 충족하지 못하면 그 마을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나무로 정하였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소도에는 항상 웅상이라는 큰 나무가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하였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나라는 곳곳에 성황신을 모신 사당을 볼 수가 있다. 또 동네 어귀에 오랫동안 지내온 큰 나무를 서낭이라고 하면서 동네의 안녕과 복을 주는 수호신으로 많이 모시고 있으며 매년 정월이 되면 많은 곳에서 성황제를 드린다. 이능화의 <조선무속고>에 「모엄이란 자가 자기의 일을 도와 달라고 성황에게 빌었으며, 당나라 장설과 장구령의 성황에 대한 제문이 있고, 송나라 이후에는 성황신사가 천하에 퍼졌다. 명나라 초기에는 경도의 군현에 단을 쌓고 제사를 드렸으며, 청나라도 이에 따랐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려 문종 때 신성진에 성황사를 두었으며 위엄 있게 숭배했다.」라고 되어 있다. 여기서 보면 성황신은 중국에서 시작되어 한반도로 건너온 것처럼 말하였으나 성황신은 우리 민족의 고유의 신이며 우리 조상인 한웅천왕 때부터 시작되었다고 볼 수가 있다. <태백일사/삼신오제본기>와 <단군세기>를 보면, 「한웅천왕 시절 소도에서 제사를 지내고 예법을 숭상하였다. 또한 소도 곁에는 반드시 경당(화랑의 전신)을 세워 결혼하지 않은 사내들로 하여금 글을 읽고, 활을 쏘고, 말을 타고, 예절을 익히며, 노래를 부르며, 격투기, 검술 등 여섯 가지 기예를 닦았다. 10월 상순에는 국중대회를 열어 둥근 단을 쌓고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 또한 땅에 제사 지내기 위하여 방구단을 만들었다. 각목을 세우고 아버지에게 제사지내며 그리고 산에 웅상을 만들었다. 이때부터 소도에 한웅천왕의 형상을 만들어 세우고 이를 웅상이라고 하였다. 」는 기록이 있다. 그러다 삼황오제시절에 들어오면서 나무에 옷을 만들어 입히는 풍속이 생겼다고 한다. 지금도 강릉단오굿을 할 때엔 꼭 신목을 앞장세우고 한다. 그 신목은 무당들이 산에 올라가서 천지신명께 축원을 한 다음 주위의 나무 중 가장 많이 흔들리는 큰 나무를 신들린 나무라 하고 그 나무를 베어 옷을 해 입혀 신목으로 삼는다. 이 나무가 바로 웅상인 것이다. <한단고시/단군세기> 에 「경인원년(BC 1891) 11세 도해 단군에 이르러 오가에 명을 내려 열두 명산의 가장 뛰어난 곳을 골라 국선의 소도를 설치케 하였다. 많은 박달나무를 심고 가장 큰 나무를 골라 한웅의 상으로 모시고 여기에 제사를 지내며 웅상이라고 이름 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 한웅의 상으로 모신 큰 나무가 지금의 서낭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여 본다. 이런 풍습이 계속 내려오면서 우리 민족은 마을마다 서낭나무를 정해 놓고 즉 웅상을 만들어 놓고 마을에서 또는 개인이 정월 초하루 또는 보름날 서낭제를 올리며 일 년 동안의 마을의 안녕과 번영을 기원하는 것이다. 이익(李瀷)의 <성호사설>에는 「사람의 생사는 일정하지 않아 예부터 좋게 죽지 못하는 자들의 종류가 많았다. 전쟁에서 죽은 사람, 구타를 당하여 죽은 사람, 물에 빠져 죽은 사람, 불에 타 죽은 사람, 강도에 의하여 죽은 사람, 불의에 압사를 당한 사람, 죄 없이 모함에 빠져 형을 당한 사람, 재물로 인해 핍박당해 죽은 사람, 처첩으로 인해 죽은 사람, 위급하여 자살한 사람, 난산으로 죽은 사람, 벼락 맞아 죽은 사람, 떨어져서 죽은 사람 등등 그 종류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이 외로운 혼들은 의탁할 곳이 없어 제사를 받지 못한다. 이들은 거의 음혼이 흩어지지 않고 요귀로 화한다. 이를 모두 성황에 고하여 여러 신들을 소집하여 맑은 술과 음식을 대접하면 신들은 천자께 말씀드려 화를 물리치고 좋은 기운을 달라 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능화의 <조선무속고>에서는, 「문헌비고(文獻備考)에 이르기를 본 조의 성황당은 바람 ․구름 ․우뢰 ․비를 함께 하고 성황신을 받들었다. 바람․ 구름 ․우뢰 ․비의 신을 오른쪽에 정좌시켜 남향으로 하고, 풍우단(風雨壇)에 신사를 행했다. 여제(厲祭)를 먼저 행한 다음 성황단에 제사를 드렸는데 이것을 여제일이라 했다. 또한 성황신은 곳곳에 있으며, 무격이 기축하는데 반드시 신이 있다 하였다. 모든 성황신은 국도(서울)를 비롯한 팔도를 편안하게 하는 신이므로 나라를 보호하는 신이라 부른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는 농사와 직접 관련이 있는 바람․ 구름․ 우레․ 비의 신에게 먼저 제를 올려 풍년을 기원했던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나오는 여제의 신들은 인간을 괴롭히는 신들이 아니고 바로 한웅천왕을 보필하던 신하 중 풍백․ 운사 ․뇌공 ․우사 등 4분의 신장을 말하는 것으로 그 당시에는 사람들이 가장 두려워한 것 중 하나가 바로 자연 재해로 홍수와 태풍, 그리고 천둥 번개와 안개였을 것이다. 성황당은 곧 한웅천왕을 상징하는 것이므로 당시의 신하들을 같이 모시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다 후대로 내려오면서 그 지방에서 출생한 훌륭한 장군들을 기리기 위하여 성황신으로 모시는 사례들이 많이 생기게 되었다. 그 예를 보면, 신숭겸이 죽어서 전남 곡성과 춘천의 성황신이 되었고, 김홍술이 죽어서 경북 의성의 성황신이 되었으며, 당나라 소정방이 대흥의 성황신이 되었다는 등 모두 기록할 수 없을 만큼 많이 있다. 그 결과 성황신들을 모신 사당을 가보면 장군형상을 한 성황신들을 많이 볼 수 있다. 무당들은 길을 가다 만나는 큰 나무만 보면 서낭으로 생각하고 꼭 예를 표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모든 행위들이 수 천 년 동안 계속되는 것은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이어가는 일이며 우리의 조상을 숭배하는 즉 한웅천왕과 단군왕검을 숭배하는 후손의 정성이라고 할 것이다. 서낭나무가 후손들에 의하여 개발이라는 미명 아래, 귀신이 붙었다는 타 종교의 어처구니없는 그들의 잣대로 마구잡이로 잘려나가고 파헤쳐지고 있는 현실을 보면 무당들이 오계의 도를 널리 닦지 못하여 백성들을 교화하지 못한 탓이라 하겠다. 지금도 황해도 굿거리에는 목신서낭거리가 있다. 여기서 목신은 웅상으로 삼은 나무의 신이라는 뜻이며 서낭은 한웅천왕을 나타내는 것이므로 목신서낭거리는 한웅천왕을 받드는 거리로 생각을 하면 굿을 하는 자세가 좀 달라질 것이다. 서낭이란 어원은 우스개 소리로 옛날 노인들이 이빨 빠진 발음으로 성황을 발음하다 보니 서낭이라고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하여 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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