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속(東夷)의 신

업신이 된 '부루'

愚悟 2006. 9. 12. 15:23

업 신이 된 부루단군

최초의 무당을 탄생케 한 부루

  무신으로 추앙받는 부루


부루 단군이 살아 전에 태자시절 때부터 왕검시절까지 뛰어난 능력과 위엄을 널리 떨치면서 백성들을 위하여 너무나 많은 선정을 베풀어, 온 백성들이 추앙을 하였다.

「BC 2183년 부루 단군께서 붕어하시니 이 날 일식이 있었다. 산짐승도 무리를 지어 미친 듯 소리를 지르고 백성들은 심하게 통곡했다. 그 후 백성들은 집안에 땅을 골라 단을 설치하고 흙 그릇에 쌀과 곡식을 가득 담아 단 위에 올려놓았다. 이를 부루단지라 부르고 업신으로 삼았다. 또 완전한 사람이 받는 계명이라고 전계(佺戒)라고도 불렀다.」라는 구절이 <단군세기>에 나온다.

이 말은 전계란 7일을 기한으로 삼신께 3번 빌었는데 이것을 임금이 시행을 했으므로 ‘신왕종전의 도(神王倧佺之道)’라 부르고 임금들은 제사를 지낼 때 3, 7일을 기한으로 삼신께 빌었다고 한다.

<태백일사/신시본기>를 보면 칠회제신(七回祭神)의 책력이 있었다고 한다.

「첫 회 날엔 천신(天神)에게 제 지내고, 2회의 날엔 월신(月神)에게 제 지내고, 3회 날에는 수신(水神)에게 제 지내고, 4회 날엔 화신(火神)에게 제 지내고, 5회 날에는 목신(木神)에게 제 지내고, 6회 날에는 금신(金神)에게 제 지내고, 7회 날에는 토신(土神)에게 제를 지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하늘의 칠정(七政)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한다. 칠정을 달리 칠요(七曜)라고도 부르는데 지금 일주일의 기본이 7일인 것이 여기서 비롯되었지 않았나 생각한다. 이렇게 모두가 7일을 기한으로 삼신님께 나아가 세 번을 빌고 모든 사람이 모여 계를 지켰다. 이 계를 지켜야만 온전한 사람이 된다고 하여 전계(佺戒)라고 하였다. 이것이 오늘날 무당들이 기도를 드릴 적에 3, 7일 기도를 드리게 되는 근본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3, 7일을 21일이라 한다. 7일간 기도를 세 번 드리니 21일이 되는 것이다. 무가에도 ‘삼일입시 칠일제배’라는 구절이 나오고 아기를 낳고 난 뒤 우리는 부정이 탄다고 3, 7일, 즉 21일이 지나야만 방문을 한다. 이것 또한 전계를 지키기 위한 것으로 3, 7일이 지나야 아기가 완전한 사람이 된다는 뜻이다. 여기서 우리는 계(戒)외 비슷한 말로 계불(禊祓)라는 말이 있다.

계불(禊祓)이라는 말은 <부도지> 제 10장을 보면「유인씨가 천년이 지내고 나서 아들 한인(桓因)씨에게 천부를 전하고 곧 산으로 들어가 계불(禊祓)을 전수하며 나오지 아니 하였다.」란 대목에서 처음으로 계불이라는 말이 나온다. 여기서 말하는 계(戒)와 그 의미가 거의 같다고 보면 될 것이다.  

계불(禊祓)이란 소도(蘇塗)제천행사(神市, 朝市, 海市)를 지내기 전에 먼저 목욕재계하는 유습으로 아직도 우리 민족의 제사의식에 남아 있다. 또한 계불과 유사한 계욕(禊浴)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 말이 처음 나오는 곳은 <삼국유사/가락국기>에서 나온다. 이것은 계불과 계욕이 비슷한 의미로 같이 사용되었다고 볼 수 가 있다.

계불은 수계제불(修禊除祓), 계사(禊事), 불제(祓除), 제불(除祓) 등의 말과 함께 쓰이고 있는데 이것은 박달나무에 신시(神市)를 열고 마음을 깨끗이 하여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의식의 일부라고 한다.

또한 계불 의식은 처음에는 종교적인 행사로 시작하였으나, 신시시대에 인간들이 어육(魚肉)을 많이 먹었기 때문에 인간으로 하여금 반성하고, 조상에 대하여 기른 공을 보답하기 위하여 희생제(犧牲祭)를 올리면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이 희생제를 올릴 적에는 피에 손가락을 꽂아 생명을 성찰하고, 땅에 피를 부어, 기른 공을 보답하게 하였는데, 여기에는 물체(物体)가 대신하여, 오미(五味)의 과(過)에 보상함으로써 재앙을 멎게 하려는 육신고충(肉身苦衷)의 고백이 있었다고 <부도지>를 해석한 김은수 선생은 말하였다.

이러한 의식이 전 세계로 전파되어 신에 대한 제사의식으로 행하게 되었으며, 또한 지구상의 모든 종교의식 및 인간들의 제사의식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우리 무교에서 하는 굿이라는 행위도 바로 계불 의식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가 있으며 우리의 굿이 가장 전통을 지키고 있는 제사의식이 아닌가 생각한다.

또 계불(禊祓)이란 말뜻을 한자어로 풀어 보면, 부정을 씻기 위하여 목욕을 하는 것이 계(禊)라 하였고, 부정을 없애기 위하여 푸닥거리하는 것을 불(祓)이라 하였다. 이 말은 계불이라는 말 자체가 부정을 없애기 위한 방법으로 계(禊)는 목욕재계하는 것이고 불(祓)은 푸닥거리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니 계불이라는 말 자체는 부정한 것을 깨끗하게 정화시키는 푸닥거리라는 뜻을 가진 말이라 생각한다.

부루단지를 업주가리 또는 업양(業樣)이라고 부르는데 ‘업양’은 ‘업왕’이 변전된 것으로 업왕가리라고도 부르고 있다. 벼를 익는 것을 축하하여 업이라 하였는데 업을 생산, 작업의 신이라 했다. 시골에 가면 지금도 집안 한 곳에 단지에다 볏짚으로 주저리를 틀어 지붕을 씌워 놓고 곡식을 담아 모시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는데 이것은 모두 우리가 단군의 자손, 부루단군의 자손이기 때문에 이어져 오는 것이다.

  이것을 미신이니 귀신을 모시는 단지라고 하는 이들도 있지만 어디까지나 우리들의 조상님을 기리는 행위로, 지금은 집안의 업신 즉 재물을 벌어들이는 신으로 모셔진다.

무당들도 업양이라고 하여 업주가리를 모시는데 벼를 넣어 둔 단지와 콩을 넣어둔 단지, 물을 넣어 둔 단지가 따로 있는데 벼는 터줏대감을 모시는 것을 나타내며, 콩은 긴 대업이라 하여 집안을 지키는 지킴이 즉 구렁이 족제비 등을 모시는 것을 말한다. 마지막으로 물은 무량대복이라고 하여 용신을 업으로 모시는 항아리로 집안에 샘이 있거나 물이 많이 나는 집에 모시게 된다.

부루단지 앞에서 많은 백성들 중 전계의 도를 완성한 여인들이 기도를 드렸는데 그 중 나이 많은 여인들이 영이 밝아 하늘의 뜻을 잘 받아들이므로 이들로 하여금 전계를 지키는 일을 맡겼다. 이를 무당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여기서 최초로 무당이라는 말이 나오게 되는 것이다. 제정일치 시대에 제사장으로서의 무당이 아닌 일반 백성들에게서 처음으로 무당이 탄생하게 되어 민간신앙으로 뿌리를 내리는 계기가 되지 않았나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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