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경뉴스 5월호
청와대는 주인이 따로 있다?
“칠궁에 방치된 후궁들의 원혼이 비극을 부른다”
청와대 담장 안에는 청와대의 건물들과 어울리지 않는 몇 채의 기와집이 있다. 인왕산 길로 많은 사람들이 다니면서도 무심코 지나치기 쉬운 이 낡은 기와집이 바로 육상궁으로써 칠궁이라고 부르는 건물이다. 지금의 청와대 자리는 조선왕조의 경복궁 부지였다. 일본이 조선총독부 관사를 거기다 지은 탓에 해방 후부터 줄곧 대통령 집무실로 사용해왔다. 오래 전부터 풍수학자들은 청와대 터를 귀방(鬼方)즉, 귀신의 방위라고 했는데, 사람이 사는 데 맞지 않는 귀신이나 신명이 활동하는 공간이라는 뜻이다.
글;무속칼럼니스트 조성제(muam777@naver.com)
그것도 숨어서 활동하는 이귀방(裏鬼方)이기 때문에 칠궁을 세워서 한을 품고 눈을 감은 여인들을 모셨다고 한다. 한마디로 대통령이 기거하는 장소로는 적합하지 않다. 귀신들과 함께 기거하면서 귀신들을 몰라라하고 있다면 분명 귀신들은 자신들의 존재를 알려 합당한 대우를 받으려고 그곳에 사는 사람들에게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미친다. 따라서 조선시대에는 일 년에 한 번씩 칠궁에 제를 지내 일곱 영령들을 위로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대한제국이 망하고부터 오늘날까지 <전주 이씨 종약원>외 정부차원에서 칠궁에 제를 지낸 적이 없다고 한다. 또 그렇게 하고 싶어도 청와대가 나서기엔 종교적인 이유 등으로 문제가 있으니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청와대 터의 유래는 일본인들이 조선의 주산인 백악산의 맥을 끊기 위하여, 경북궁 후원 백악산 밑에 총독부 관저를 세우면서 시작되었다. 해방이후 경무대란 이름으로 이승만 대통령집무실과 거처로 사용하면서 지금까지 몇 번의 개보수와 증축으로 오늘에 이르렀던 것이다.
올해도 대권주자들은 청와대의 주인이 되고자 한 치의 양보도 없이 기 싸움을 하고 있지만 청와대에 들어가는 순간부터 비극은 시작되리라고 생각한다. 역대 대통령들이 온 국민의 축복과 기대 속에 당당하게 청와대에 입성 하였지만, 청와대를 나올 때는 하나같이 비참하게 생을 마감하거나 국민의 지탄을 받는 신세로 청와대를 떠났다. 그런 청와대의 비극이 칠궁에 얽힌 한과 관련이 있다고 해석하는 근거 있는 이유인 것이다.
청와대의 불행은 칠궁에 얽힌 한과 관련
그러면 칠궁은 무엇이며 왜 청와대 안에 있는지 아는 사람들은 별로 없다. 조선왕조의 임금과 정비인 왕비는 죽어서 종묘에 위패가 모셔지지만, 왕의 생모가 후궁이 경우는 세상을 떠난 후 종묘에 위패를 봉안하지 못하고 별도로 위패를 봉안하는 곳을 마련하였으니 칠궁이 그것이다
처음에 칠궁은 조선시대 숙종의 후궁이며 영조의 생모인 숙빈 최씨의 위패를 모시기 위해 숙빈묘라는 명칭으로 세워졌다. 구중궁궐 최하위 신분인 무수리 출신으로 숙종의 눈에 들어 성은을 받아 영조를 잉태하였지만, 장희빈의 투기로 온갖 고초를 겪으며 한 많은 삶을 살다 간 그녀였다.‘최무수리’ 즉 최숙빈의 위패가 모셔져 있었으나 1753년 영조 29년에 육상궁으로 개칭하였으며 그 후 영친왕의 어머니 순빈 엄씨를 포함한 일곱 분을 모시면서 칠궁이라고 불리어 왔다.
여기에는 돌아가신 후 왕으로 추대된 원종(광해군을 몰아내고 왕이 된 인조의 생부)의 어머니 인빈 김씨, 조선왕조 후궁 중에 대표적인 인물인 경종의 어머니 희빈 장씨(장희빈), 영조의 어머니인 무수리 출신의 숙빈 최씨, 돌아가신 후 왕으로 추대된 진종(영조의 장자인 효창세자)의 어머니 정빈 이씨, 사도세자의 어머니 영빈 이씨, 순조의 어머니 수빈 박씨, 조선조 마지막 왕세자인 영친왕의 어머니 순빈 엄씨 등 일곱 분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이런 역사적인 유래가 있기에 청와대를 옮겨야 대통령과 나라가 편안해 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현실이 그러하지 못하니 비록 차선책이지만 이후 대통령으로 당선된 분이 청와대에 들어가기 전, 자신이 믿고 따르는 종교와 상관없이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라도 칠궁에다 제를 올렸으면 한다. 그렇게 하여 칠궁에 계신 일곱 영령들과 그 곳에서 활동하는 귀신들을 달래주는 것이 마땅하다.
누가 전세방을 얻어 가도 사는 동안 주인에게 잘 부탁한다고 인사를 하는 법인데, 하물며 5년 동안 거기 들어가 살면서, 원래 살고 있는 집주인을 나 몰라라 하고 쳐다보지도 않는다면 영령들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살아서는 구중궁궐의 엄격한 법도와 후궁과 정비의 시샘과 음모 속에서 숨 한 번 크게 쉬어 보지도 못하고 살았던 한 맺힌 귀신들 아닌가. 더구나 임금의 씨를 품은 것이 도리어 화근이 되어 모자가 목숨을 연명하기 위하여 감수했던 그 수모와 한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자식이 나라의 임금이 되었는데, 본인은 죽고 나서도 후궁이라는 신분 때문에 종묘로 가지 못하고 경복궁 후미진 구석에 팽개쳐졌으니 어찌 한이 없겠는가?
제3공화국 시절 당시 청와대에 근무한 사람으로부터 들은 이야기에 의하면, 인왕산 길을 내면서 칠궁을 건드리지 않는 방향으로 도로 계획을 세웠다고 한다. 하지만 자기 별장이 도로에 포함된 어느 재벌과 당시 서울시 책임자의 장난으로 칠궁의 담을 헐어내고 인왕산 길을 내게 되었다. 우연의 일치로 보이겠지만 그로인해 1974년 8월15일 문세광의 저격사건이 일어났고, 온 국민들로부터 존경받던 영부인이 서거 했다고 믿고 있었다.
종묘로 못가고 칠궁에 방치된 일곱 영혼들 달래줘야
그리고 몇 년 후 경호 책임자가 칠궁의 정문을 마음대로 방향을 바꾸고, 지금의 방향으로 대문을 다시 세우고 난 뒤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 저격사건이 일어났다고 한다. 그냥 가볍게 넘겨 버리기에는 무엇인가 이상하고 찜찜한 사건의 연속이다.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고 하였다. 칠궁의 일곱 여자는 살아서도 한 많은 삶을 살고, 죽어서까지 방치되어 자손들로부터 제삿밥 한 그릇 제대로 못 얻어먹는 신세가 되었다. 원망과 독기가 가득 찬 곳에 새 대통령이 들어와서도 인사 한번 없이 살며, 일곱 영령들에게 허락도 구하지 않고 담장을 헐어 길을 내고 대문 위치까지 바꾸어 달았다. 그래도 후손이라고 참았던 한과 분노가 미친 결과가 바로 대통령의 서거나 사법처리 같은 불행한 말로가 아닌가 한다. 의친왕의 아들 이석 공도, 어렸을 때 간혹 칠궁으로 들어가곤 하였지만 들어갈 적마다 항상 찬바람이 불고 무시무시한 기분이 들었다고 회고한 적이 있다. 궁내 어른들이 그곳에는 출입을 못하게 항상 만류를 하였다고 한다.
고대 한 무제 시절부터 봉선(封禪)이라는 의식을 통해 황통을 계승한 자는 즉시 스스로 예를 갖추고 하늘과 천지영령들에게 고하는 제의를 올렸다. 자신이 나라를 다스리는 동안 나라의 번영과 태평을 기원했듯이, 우리도 대통령이 새로 취임하면 반드시 하늘에 고하여 자신의 임기동안 국태민안(國太民安)을 기원하면 어떨까. 대통령이 하늘에 천제를 올리는 시간에는 대한민국의 모든 종교인들도 자신들이 믿는 신께 국가의 번영과 발전을 함께 기도하면 될 것이다. 왕이 종묘에 제를 올렸듯이 칠궁에 제를 올려 일곱 영령들을 위로하고 잠시 사용하겠노라고 고하기만 해도 그 기가 누그러뜨려질 것이다.
잠시 칠궁에 모신 분들의 영혼을 위로하는 제를 올린다고 하여 같은 땅에 사는 후손으로 부끄러울 것은 없다. 종교를 이유로 곤란하다면, 청와대에서 직접 제를 올리지 않고 행정부에 일임하여도 무방할 것이다. 종묘에서 일 년에 한 번씩 종묘제례를 드리고 있듯이, 칠궁의 영령들도 당연히 자신들의 존재를 알아주고 일 년에 한 번이라도 합당한 대우를 받고 싶어 하지 않겠는가.
칠궁에 계신 일곱 분들은 일반 제사를 지내기보다 그분들의 한을 풀기 위해선, 예부터 우리 민족이 해온 해원굿을 하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죽은 이들의 영원을 위로하고 달래기위해선 해원굿보다 더 좋은 의식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세상 모든 이치가 과학만으로 다 설명되지는 못한다. 21세기에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로 들리겠지만, 칠궁에 계신 일곱 분의 분노에 찬 모습이 자꾸만 느껴져 두렵기만 하다.
'무속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굿과 힙합이 만나는 무대 (0) | 2007.10.20 |
---|---|
떡의 유래와 의미 (0) | 2007.06.04 |
부적은 미신인가 과학인가? (0) | 2007.04.26 |
내림굿의 종지잡이 (0) | 2007.04.19 |
굿의 의미와 절차 (0) | 2007.03.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