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속의 큰 별 김유감 선생의 명복을 빌면서
서울새남굿으로 무형문화재로 지정받아 인간문화재로 살아 온 큰무당 김유감 명인이 2009년 5월 15일 새벽 2시30분 서울 한양대학교 병원에서 노환으로 88년의 길고도 짧은 생을 마감하였다.
이 시대에 몇 분 남지 않은 구대만신으로 학습과 재주가 뛰어나 감히 유개미를 능가하는 서울굿 만신이 나타나지 않았기에 고인의 죽음이 더욱 안타까울 따름이다.
고인은 1996년 서울새남굿(중요무형문화재 제104호) 예능보유자로 인정받아, 새남굿이란 생소한 굿을 세간에 널리 알리게 되었다.
서울 새남굿은 서울지역의 전통적인 망자 천도굿으로 죽은 사람의 넋을 위로하고 좋은 곳으로 가기를 바라는 뜻으로 행해지는 지노기굿이다.
새남굿은 굿과 불교의 영산제 · 유교의 제사 등이 혼합되어 이루어졌으며, 특히 화려한 복식으로 이루어진 무복과 우아한 춤사위, 그리고 갖은떡을 비롯한 정교한 장엄구 등이 사용되는 아주 큰굿이다.
김유감 선생은 7살 때 구업이를 파오면서 무당이 되었다.
구업이는 무속인이 죽으면 자신이 쓰던 부채나 방울 등 무구를 무덤이나 땅에 묻어두는 것을 말한다.
예전에는 무당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구업이를 파와야 무당으로 인정하여 내림굿을 해 주었으며, 영험한 무당으로 인정하였다고 한다.
유감이란 이름이 구만신들이 부르면서 유개미로 변하여 지금도 고인의 별명은 ‘유개미’로 통한다.
명성황후 앞에서 굿을 했던 구한말의 큰 만신인 어머니의 피를 이어받아서 인지 고인 또한 굿의 재주와 기량이 아주 뛰어나 그를 능가하는 무녀가 없었다.
최영장군을 몸주신으로 모시며 특히 “상산거리”만큼은 반드시 고인이 하였다.
특히 창부거리는 지금까지도 서울 장안에서 능가하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재주가 뛰어난 이 시대의 명인이었다.
이제 화려했던 명성과 시간을 뒤로 한 채 고인은 저 멀리 좋은 곳으로 떠났다.
무당이 되어 겪은 많은 고초와 멸시를 가슴 속 깊이 묻어두고, 더 이상 돌아올 수 없는 저 먼 곳, 칠성님 전으로 고인은 떠났다.
무당이라고 멸시와 천대를 받지 않는 곳으로, 신을 모신 것이 큰 죄가 되는 양 이런 저런 눈치를 보며 살지 않아도 되는 좋은 곳으로, 한 시대를 풍미하던 큰 무당 김유감은 조용히 그리고 품위를 잃지 않고 우리들 곁을 떠나갔다.
부디 김유감 선생이 살아생전 이루었던 많은 흔적들이 빛을 잃지 않게 서울 새남굿 보존회이성재 회장을 중심으로 더욱 열심히 활동하고 전승하여 고인의 영전 앞에 부끄럽지 않는 후진들이라는 것을 보여주리라 굳게 믿는다.
칠성님 전으로 돌아가신 큰무당 김유감 선생의 명복을 빌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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