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교에는 많은 신들이 존재한다.
이렇게 많은 신들이 무교에 존재하는 이유가 바로 무교의 정신인 생생지생이라는 정신에 충실하기 때문이다.
생생지생이란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의 가치를 인정하는 것이다.
생명이 있고 없고를 가리지 않고 존재하고 있는 그 가치만으로 인정을 하여 함께 상생의 길로 가자는 뜻이다.
그러다 보니 많은 사물을 신격을 부여하여 돌에도, 나무에도, 흙에도, 바다에도, 산에도, 우리 주변 곳곳에 신이 존재한다고 여겨 받들어 모시고 있다.
이러한 행동이 바로 홍익정신에서 비롯되었으며 제세이화의 기본이 되기도 한다.
무교에는 이렇게 하늘과 땅과 그리고 조상 중에서 많은 신명들이 생겨났으며 또 그렇게 알고 모시고 지내왔다.
너무나 많은 신들을 모시다 보니 무교의 사제인 무당들을 보고 만신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렇다보니 신명을 바로 모시기가 너무 힘들어진 경우도 있다. 즉, 신명가리가 잡히지 않아 헷갈릴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그래도 천신이나 지신은 그다지 어렵지 않지만 가장 무교인들이 어려워 하는 부분이 바로 조상신명의 가림이다.
어느 무속 카페에 어떤 무녀가 축융장군이 무엇인가요 라고 질문을 하였다.
그랬더니 여러대답이 나왔지만 가장 우려되는 답변은 바로 축융장군은 용왕장군이라는 의미로 설명하였다.
그것을 본 필자는 안타까운 마음에 축융에 대하여 설명을 해주었다.
축융祝融은 바로 한인천제를 의미하는 것으로 불의 신을 의미한다.
한인천제는 풍주 배곡에서 한국을 세우면서 남방적제로 여겨졌다. 휘가 부해요, 호가 축융이라고 <부소부서>에 기록되어 있다.
또 축융이라는 의미는 하늘에 노여움을 풀기위하여 빌고 기도하는 사람이란뜻이다.
즉, 인간들의 잘못을 하늘에 용서를 구하고 노여움을 푸는 사람이란 뜻으로 바로 우리 무교의 사제들의 역활을 의미하는 말이다.
덧글 란에 길게 설명할 수 없어 간단하게 불의 신으로 한인천제를 의미한다고 이야기 하였다.
그러니 축융장군이란 바로 불을 다스리는 장군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그러나 축융을 용장군이라고 설명한 무당은 필자를 나무랐다.
어찌 신명을 이론으로 이야기 하는냐고, 신명은 이론이 아니라 무녀들만 신을 받은 사람들만 이야기 할 수 있다고 한다.
맞는 말이다. 신명에 관하여 무쟁이가 이렇쿵 저렇쿵하는 것은 옳지않다.
신명에 관해서는 무교인들만 이야기할 수 있고 그래야 한다.
그러나 신명의 가리와 임무에 대하여는 무교인들의 전유물이라고 하지만 사실 그 속내를 들여다 보면 그 신이 무엇을 하는지를 자세히 모르는 경우가 많이 있다.
무교인들도 신명의 역활에 대하여 잘 모른다는 이야기다.
이렇게 모르면서도 아는체 할 수 밖에 없는 무교인들이 많이 있다.
안타까운 현실이지만 어쩔 수 없는 지금 무교의 현실이다.
그러면서 공부는 하지 않는다. 설명해줘도 들을려고 하지 않는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자기대로 고집을 부린다.
자기는 신명을 그렇게 받았다고 하면 그만이다.
축융을 용장군이라고 한 무당처럼, 그냥 우기면 된다. 누가 아니다고 할 수 있을까?
그러나 그런 무식한 생각과 행동들은 무교의 발전에 아무른 도움이 되지 않는다.
분명히 기록에 나오는 신명은 그 기록에 의존하여 설명하여야 한다.
기록에 나오는 것도 부정하고 엉뚱한 소리를 한다면 많은 사람들이 무교를 무식한 집단, 미신이라고 욕을 하여도 할 말이 없다.
무교의 많은 조상신들은 대부분 우리 역사에 나오는 인물들이 많다.
자신들이 잘 아는 최영장군, 이순신장군, 등은 장군이라고 하면서 자신들이 처음들어 보는 축융장군을 용장군이라고 억지소리를 하면서 우기는 모습은 정말 화가 난다. 무식하면 가만히나 있을 것이지, 가르쳐줘도 아니라고 우기는 것은 알량한 자기 자존심에 상처를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모르는 것은 죄가 아니다. 배우면 된다, 그러나 모르고 틀린 것을 맞다고 계속 우기는 행위야 말로 죄악이라면 죄악이다.
자신의 잘못된 의견으로 잘못 인식하게 되는 많은 애동들의 앞날을 생각해서도 그런 행동은 삼가하여야 한다.
신명 세계를 무쟁이가 뭐라고 하는 것은 결코 잘못된 것이지만 조상신 중에서 옛날 상고사의 기록에 나오는 이름이 나오면 그것을 인정하고 그렇게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 무교의 발전을 위하여, 또 무교가 민족종교가 되기위한 지름길 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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