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속 이야기

조선시대 巫稅의 종류

愚悟 2010. 2. 23. 11:46

조선시대 巫稅의 종류

 

우리 민족의 정체성이 서려있는 신교, 즉 무교는 우리 민족과 더불어 굴곡의 세월을 지내왔다.

절대권력을 누리던 제정일치 시대를 지나 제정분리 시대의 제사장 시절엔 우리 민족의 정신적인 지주로서, 민족의 일체감을 심어주는 구심점 역할을 충실히 해왔다.

 

이렇게 수천 년 내려온 무교의 영향력은 민중들에겐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으며 그 결과 무교가 백성들의 생활이자 삶 그 자체였으며, 무교에 의하여 인간의 가치관과 철학이 결정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불교가 이 땅에 들어온 후 급격히 제사장의 지위를 상실하고 중심세력에서 밀려나면서 더 발전하지 못하고 퇴보의 길로 접어들었다.

 

왕권강화를 위하여 의도적으로 불교를 받아들였지만 불교는 이 땅에 쉽게 뿌리를 내리지 못하였다.

그 이유는 민중들의 가슴 속엔 무교가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불교는 무교의 여러 가지 제도와 의식을 모방하게 되었으며 그 결과 사찰마다 산신각과 칠성당을 두게 되는 등 무불습합巫佛褶合이이루어 지게 되었다.

 

그러나 무교는 불교와 달리 고려시대에 성리학을 공부한 선비들에 의하여 배척당하게 되는 등 더욱 여건이 어려워졌다.

역사상 무속을 가장 박해한 시대가 조선시대라고 하지만 사실 고려 중반부터 벌써 무속에 대한 박해와 말살기도는 선비들에 의하여 꾸준히 진행되었으며, 그들의 주장에 의하여 도성 안에 거주를 금지하기까지 하였다.

그리고 조선시대로 접어들어서도 무속은 여전히 도성 안의 거주를 더욱 엄격히 금지당하고, 무속을 말살하기 위하여 무거운 세금을 부과하기 시작하였다.

 

무당들의 세금은 구리와 면포, 그리고 쌀과 돈으로 내었다.

조선조 세종 때 호조에서 임금에게 올린 상소문에 무당에게도 업세業稅를 구리로 바치게 하였다.

그 세금 내역을 보면 국무당國巫堂은 9근, 전의 국무당은 8근, 송악松嶽무당은 8근, 덕적德積무당은 6근, 삼성三聖무당은 6근, 당무녀堂巫女는 2근, 무녀는 1근을 수납하도록 하였다.

 

그 당시 정승에 해당하는 정, 종일품들이 세금이 10근 이었고, 말단 종8품은 8냥쭝이었다는 것을 비교하면 국무당은 정승인 정일품보다 1근을 덜 내었다는 것은 무당들의 세금이 얼마나 과중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조선 중종 때 실학파들은 무당들에게 세금을 부과한다는 것은 국가에서 무속을 인정하는 것이므로 무당들의 세금인 무세를 없애야 한다고 주장하면서까지 무속을 말살하려고 했다.

 

이렇게 무속을 없애기 위하여 무당들에게 세금을 과중하게 부과하는가 하면 또 한편으론 무속을 인정하지 않기 위해선 무세를 없애야 한다고 주장하는 등 조선시대 선비들의 최대과제는 무속의 말살이었다.

그러나 무속을 말살시키려는 많은 시도와 노력에도 불구하고 조선 중반부터는 무당들의 세금이 지방제정에 막대한 부분을 차지하여 말살정책이라기 보다는 지방제정을 충당하는 정책이 되어 버렸다.

 

영조 20년 (1744)에 발간된 ‘속대전續大典’의 기록에 정식국가 수입 항목으로 무세가 들어가 있다는 것은 그 당시 무세를 국가의 정식수입항목에 포함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국가 수입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또 19세기 국가재정을 기록한 ‘만기요람萬機要覽’를 보면 평안도와 황해도 무당을 제외한 전국 무당들에게서 거둬들인 무세가 총 1,326필 이라고 한다.

 

이것은 대략 환산하면 무세를 납부한 무당이 약2,000명이라고 추산할 수 있다.

특히 평안도와 황해도 무당들의 무세는 지방관찰사가 직접 징수하여 북방을 경계하는 국방비로 사용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지금이나 그때나 국가재정에서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바로 국방비라고 한다면 평안도와 황해도 무당들의 숫자가 많았다는 것과 또한 걷어 들인 그 무세가 엄청난 금액이었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다.

 

이렇게 무세는 지방제정의 중요한 수입원으로 지방관의 재량권에 의하여 무세가 걷히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탐관오리들은 지방제정을 확충한다는 명목아래 더 많은 무세巫稅를 걷기 위하여 무세의 종류를 늘려 더 많은 세금을 거둬들였다는 것을 기록으로 알 수 있다.

 

초기에는 무세로 무업세巫業稅만 있던 것이 점차 ‘무업세’ 외에 ‘신당퇴미세神堂退米稅’ ‘신포세神布稅’란 명목으로 세금을 수탈해 갔다.

신당퇴미세는 신당에 바쳐진 제물 중 쌀이나 돈 등을 내릴 때 일정부분을 세금으로 내야 한다는 것이며, 신포세는 무녀들이 내는 세금이 아니라 일반 백성들이 내는 세금으로, 신을 믿기 때문에 내는 세금이다.

즉 굿이나 치성을 드리는 것은 신을 믿기 때문으로 하는 의식이므로 정성을 드릴 때 일정부분 의 면포나 금전 등을 세금으로 바치게 하는 특별소비세라고 할 수 있다.

 

또 조선시대의 의료기관인 동서활인서는 많은 백성들이 치료받을 수 있는 유일한 국립의료기관이다.

이 활인서에 무당들이 배치되어 한의사들과 함께 환자를 치료하게 하였는데, 이 동서활인서의 운영비는 거의 무세로 충당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손노선의 조사연구에 의하면 ‘만신연록기萬神年錄記’ 의 기록에 조선 말기에 과중한 무세로 인하여 무당들이 무업을 접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그러자 굿판에서 수입을 얻어 온 <풍류방>의 악사들도 자기들의 수입이 줄어들자 궁여지책으로 굿판에서 얻은 수입 중 일정부분을 갹출하여 정립해 두었다 무당들이 무세를 낼 시기에 무당들의 무세를 들어주었다는 기록을 발견하였다고 한다.

 

무당들의 무세는 일년에 초기에는 두 번을 내었지만 나중에 한 번씩 내었다고 한다.

그러나 무세의 종류가 늘어나면서 무당들은 일 년에 한 번씩 내는 무세와 수시로 내는 신당퇴미세, 그리고 신포세까지 감당해야하는 무당들은 많은 세금 때문에 무업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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