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속 이야기

성황당과 서낭당

愚悟 2010. 3. 26. 17:12

城隍堂과 서낭당

 

 

보통 우리는 성황당과 서낭당을 같은 기능을 가진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성황당과 서낭당은 그 탄생 배경과 기능이 완전히 다른 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904년 외국인 밀러 부르다레(mile Bourdaret) 가 본 성황당에 대한 기록이다.

Song-hang-Sine 이라는 것은 城 〮村落 〮地方 또는 도시의 신이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이는 행여行旅를 안전하게 하고 도중에서 악령 등을 만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정월 보름날 그들을 식재息災 초복招福을 위하여 이에 기원을 드린다. 이때 제물을 바치는 단壇을 그들은 선왕당이라고 한다.

 

도로의 옆, 촌락의 부근, 원야原野의 한 구석, 길가 등 도처에서 이를 발견할 수 있다.

이 제단은 소석小石의 퇴적堆積으로써 되어 있고 그 퇴적은 통행인들이 던진 한 개 한 개가 쌓여서 이루어진 것이다.

이 누석단累石壇은 수목 또는 총림叢林의 밑에 쌓여 있거나 또는 장승 옆에 쌓여 있기도 하며, 때로는 산신당의 곁에서도 볼 수 있다.

 

산신당이라는 것은 土石 또는 土木으로써 이룩하고 기와 또는 짚으로 이은 작은 집으로서 그 안에는 산신의 숭배대상인 동물의 솜씨 없는 화상이 있는 것을 알게 된다.

또 선왕당의 수목의 가지에서 사람의 주의를 끄는 것은 포편布片(베조각), 지편紙片(한지조각), 오색백편五色帛片(오색비단조각), 의편衣片(옷), 모발毛髮, 기혈器血(그릇에 담은 피), 전화錢貨(돈과 재물) 등이 무수히 걸려 있는 것이다.

 

전화錢貨는 재리財利를 획득하기 위하여, 포편布片은 아동의 장수를 빌기 위하여 그곳을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걸은 것이다.

상인은 재리財利을 얻기 위하여 짚세기의 작은 것 또는 상품을 거는 일도 있다.

오색백편五色帛片을 거는 것은 신랑 신부가 부모의 집을 떠나서 새 집으로 옮겨갈 때 보모계의 가신家臣이 그를 따라 가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라 한다.

 

만약 이를 막지 못하면 부모의 집은 망하기 때문이라 한다. 이는 보편적인 신앙이다.

신부가 자기의 의복을 일편一片 찢어서 선왕당의 나뭇가지에 건다는 것은 부모의 가신이 그 이상 수행하지 아니하고 본래의 집으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밖에 그들은 이 누석단과 관목灌木(신이 내린 나무)에 대하여 이를 읍락, 촌락의 수호신 또는 산신 또는 行旅의 신이라고 믿고 있다.

더욱이 부인들은 때때로 이에 향하여 어린 아이의 질병쾌유를 기원하기 위하여 밥 한 그릇을 석단위에 차려놓고 꿇어앉아서 두 손을 모아 기원하고 그것이 끝나면 다시 그 밥을 가지고 가서 병든 아이에게 준다.

 

무녀도 또한 이곳에서 병든 아이를 위하여 장고杖鼓 또는 발라鉢鑼를 치며 제의를 지내는 일도 있다.

통행인은 나그네 길을 안전하게 하기 위하여 헌납獻納하는데 그것은 극히 간단한 일로써 한조각의 작은 돌을 석단 위에 던지거나 또는 그에 향하여 침(타액唾液)을 뱉으면 된다.

이 침을 뱉는 것은 떠돌아다니는 악령 즉, 부귀浮鬼를 두려워하는 조선 사람들의 신앙과 관계가 있다. 죽은 자의 영靈으로써 도로에 배회하는 악령으로부터 피하기 위하여 그들은 이렇게 하는 것이다.

 

경기 황해 지방에서는 선왕당先王堂으로 통칭하여 불려진다. 이 선왕당이 변하여 서낭당이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많은 기록들이 성황당은 중국 육조六朝 때부터 성황城隍이라고 불렀으며, 당대唐代에 이르러 그 신앙은 더욱 성행되었으며 宋代에 이르러 전승하였다고 한다.

우리나라는 고려 때 성황당이 들어 왔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부도지(박재상 원저/김은수 번역)를 보면 성황당은 우리 민족 고유의 전통신앙이며 바로 소도를 대신하는 지방의 작은 소도蘇塗라고 하였다.

 

그러니 성황당과 서낭당은 분명히 다르다.

서낭당은 누석단累石壇을 말하는 것으로 小石의 퇴적堆積으로써 되어 있고 그 퇴적은 통행인들이 던진 한 개 한 개가 쌓여서 이루어진 것이다.

또 서낭당은 선왕당이 변하여 생긴 이름으로 작은 소도를 의미하는 성황당과는 그 기능 자체가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서낭당 즉, 누석단累石壇은 선왕당의 수목의 가지에 포편布片(베조각), 지편紙片(한지조각), 오색백편五色帛片(오색비단조각), 의편衣片(옷), 모발毛髮, 기혈器血(그릇에 담은 피), 전화錢貨(돈과 재물) 등이 무수히 걸려 있다는 것이다.

서낭당은 그 마을의 수호신이나 마을과 마을의 경계를 표시하기도 하고, 여행자들을 보호하는 行旅의 神의 역할도 한다.

 

서낭당 앞을 지나가는 통행인은 나그네 길을 안전하게 하기 위하여 헌납獻納하는데 그것은 극히 간단한 일로써 한조각의 작은 돌을 석단 위에 던지거나 또는 그에 향하여 침(타액唾液)을 뱉으면 된다.

죽은 자의 영靈으로써 도로에 배회하는 악령으로부터 피하기 위하여 이렇게 하는 것이 라고 기록되어 있다.

성황당이 치우와 풍백, 우사, 운사를 모시거나 그 지방의 영웅을 모신 것과 달리 서낭당은 산신과 서낭신을 모셨다는 것이 다르다.

 

경기 동서문외 小神祠 성황당은 중앙에는 <南無城皇大神之位> 좌측에는 <南無三神之位> 그리고 우측에는 <南無后口阿氏之位>를 모셔 두었다.

여기서 공통점은 바로 세분의 신이 모두 여성신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성황당은 관에 주도하여 축조한 당이 존재하는 반면, 서낭당은 민간인들에 의하여 초라하게 지어진 초가집이 대부분이다.

또 성황당은 해변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서낭은 산골, 내륙지방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또한 손진태는 <조선민속문화의연구>에서 누석단累石壇은 원래 山神이요, 경계신境界神임과 동시에 산신의 제사를 지내는 장소였다고 하였으니 주로 바닷가에 세워진 성황당과 확연히 구분된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