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신할미 이야기

절과 사찰寺刹이란 명칭에 대한 의문

愚悟 2010. 5. 17. 13:50

절과 사찰寺刹이란 명칭에 대한 의문

 

 

절과 사찰의 용어 대하여 요즘 낳은 의문을 가지고 있다

분명 절이란 우리말과 사찰寺刹이란 용어가 민족종교인 무교의 신들을 모신 장소를 말하는데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먼저 ‘절’자를 생각해 보자.

‘절’은 몸을 굽히고 조아려 존경을 나타내는 행동이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흔히 웃어른을 존경하는 뜻으로 나타내는 행동이 어떻게 부처를 모신 곳으로 그 의미가 변질 되었는지 모르겠다.

 

또 사찰寺刹이란 말을 네이버 백과사전에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절 ·사원(寺院) ·정사(精舍) ·승원(僧院) ·가람(伽藍) 등으로 불린다. 불교 사찰의 어원은 산스크리트의 상가라마(Sañgh r ma)이며, 비구(比丘:남승) · 비구니(比丘尼:여승) · 우바새(優婆塞:남자 신도) · 우바이(優婆夷:여자 신도)의 사중(四衆)이 모여 사는 곳이라는 뜻이다. 그것을 중국에서 승가람마(僧伽藍摩)라고 음역(音譯)하였고, 나중에 줄여서 가람이라고 표기하게 되었다. 석가모니의 전도(傳道) 초기인 BC 6세기 무렵, 인도의 출가자(出家者)들은 무소유(無所有)를 이상으로 삼았기 때문에 일정한 주거지를 가지지 않고 독신생활을 하면서 걸식(乞食)으로 수도생활을 영위하였으며, 숲속의 동굴이나 큰 나무 아래에서 선(禪)을 하거나, 유행(遊行)을 통하여 불법(佛法)을 전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인도의 기후적 특성 때문에 우기(雨期)에는 이 같은 생활이 불가능하였는데, 특히 7 · 8월의 장마철에는 바깥에 나가기보다는 한곳에 모여 수도에 정진(精進)하는 장소가 필요하게 되었다. 그래서 석가모니는 우기인 석 달 동안은 바깥출입을 삼가는 것을 계율(戒律)로 정하고, 출가자들이 한곳에 모여 적절한 공동생활을 하도록 함에 따라, 안거(安居)할만 한 장소를 불교 신도들이 스스로 마련하게 되었다.

 

불교의 역사에서 최초로 등장한 안거 장소는 죽림정사(竹林精舍)를 비롯하여 수달다[須達多], 장자(長者)가 동산을 온통 금으로 장식하였었다는 기원정사(祇園精舍) 등이 있다.

‘정사’는 안거를 위한 실제적인 목적에 따라 불교의 사원이 생겨나게 된 것이다. 초기의 사찰은 처음에는 이같이 단순한 공동 주거지의 성격을 띠었는데, 시대가 흐름에 따라 종교의례(宗敎儀禮)를 집행하는 성소(聖所)로 그 성격이 승화하게 되었다. 』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면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불교에서 안거를 위하여 마련한 장소를 부를 때 ‘절’이나 ‘사찰’이 아니라 바로 정사精舍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니 ‘절’이나 ‘사찰’은 부처를 모신 장소나 안거를 위한 장소로 부르는 명칭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앞에서 말했듯이 ‘절’은 몸을 굽히고 조아려 존경을 나타내는 행동이라고 하였다. 그러니 부처를 모시는 장소나 안거를 위한 장소와는 목적과 그 뜻이 완전히 다르다.

 

손진태는 <조선민속문화의 연구>에서 ‘찰刹’은 바로 소도의 솟대에서 비롯된 말이라고 하였다.

또 삼국지 <마한전>에는 마한의 소도蘇塗가 부도浮屠와 유사하다고 하여 소도에서 부도가 생겼음을 이야기 했다.

부도浮屠는 부도浮圖, 불도佛圖, 불타佛陀 등으로 표현하며 그 뜻은 불승佛僧, 불탑佛塔, 불찰佛刹, 불교佛敎로 불렸다고 하니 이러한 말들이 다 우리의 소도蘇塗에서 비롯된 말이라고 할 수 있다.

불교가 사찰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면서 ‘찰刹’자를 많이 사용하고 있으나 옥편에는 찰刹은 주柱라고 하였다. 즉, 찰은 기둥이라는 말이다.

 

또 ‘사寺’ 역시 지금은 절의 의미로 사용되지만 처음에는 불도 혹은 부처를 모시는 곳이 아닌 관청을 이야기 한 글자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중국 한나라 때 서역 인도 승려들이 중국을 방문했을 때 그들이 머물었던 곳이 외국 사신들이 머물던 숙소인 홍로시鴻盧寺였다. 그 후 승려들이 머무는 곳과 관청을 구별하기 위하여 시寺로 읽어지던 글자를 사寺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부처를 모시거나 불도들이 안거를 위하여 머무는 장소는 정사精舍라고 불렀다.

불교가 한반도로 들어오면서 우리 민족종교인 무교에서 신명이나 조상을 모시고 절을 하던 장소를 불교가 부처를 모시는 곳으로 정사대신으로 사용하면서 그 의미가 굳어졌다고 생각한다.

 

사찰寺刹 역시 절 또는 관청의 기둥이라는 말이 되는데 절의 기둥은 다른 말로 당간幢竿을 세우기 위한 기둥, 당간지주를 의미하는 말이다.

이 당간지주의 크기는 그 절의 규모를 나타내는 것으로 고찰에는 반드시 마당 가운데 세워져 있다.

이 당간지주는 바로 우리 민족의 성전인 신시의 소도에 새운 솟대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여러 곳에 기록되어 있다.

 

「증운增韻」에는 <찰刹을 僧寺 又釋塚上立柱 中藏舍利子 亦曰刹>이라는 기록이 있다.

‘찰’을 절 또는 부처의 무덤 위에 세우는 기둥이다. 그 가운데 사리를 숨긴다. 그것을 찰이라고 한다. 라는 말이다.

「강희자전」에는 刹은 불사佛寺인 동시에 찰주刹柱 · 석도釋徒 · 총상塚上의 立柱입주 · 불탑 등의 의미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그러니 찰은 바로 기둥이라는 의미로 바로 솟대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사찰에서 부처를 모신 곳을 대웅전大雄殿이라고 한다.

 

그러나 <고려팔관잡기>에 보면, 「불상이 처음 들어오매 절을 세워 이를 대웅이라 불렀다. 이는 승도들이 옛것을 세습하는 칭호로서 본래 승가의 말이 아닌 것이다.」란 대목이 있듯이 대웅이라는 말은 본디 한웅천왕을 나타내는 말로 대웅전은 한웅천왕을 모시는 곳이다.

그러나 대웅전은 본래 구월산의 삼성사三聖寺가 그러했듯이 우리 민족의 최고 조상인 한인천제, 한웅천왕 , 단군왕검을 모셨던 곳이라 생각한다.

 

그 후 불도들이 대웅전에 부처를 모시면서 뒤편으로 이 세분을 몰아내어 삼성사라고 불렀다. 그러나 이 삼성사도 다시 산신과 칠성 그리고 독성을 모시는 곳으로 변질되고 말았다.

그러니 ‘절’이란 용어는 우리 민족의 조상들과 무교의 신명을 모신 곳으로 그곳에서 허리를 굽혀 몸을 조아리며 존경의 예를 절을 하는데서 비롯된 말이라고 생각한다.

 

찰刹이라는 말 역시 神市의 중심지인 소도蘇塗에 세운 솟대를 나타내는 말이다.

그러니, ‘절’이나 ‘사찰’이란 말은 부처를 모신 곳이 아니라 우리 민족의 조상과 신명을 모신 곳을 나타내는 말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지금은 부처를 모신 곳으로 알려져 불교의 전유물이 되어 버렸지만, 본래 우리 민족 종교인 무교의 신명과 민족의 조상을 모셔놓고 절을 하던 곳이라는 의미로 ‘절’ 이나 ‘사찰’ 이라고 불렀다고 필자는 확신하면서 끝을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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