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 오신 날과 연등
불교가 이 땅에 들어온 후 거부감이 심한 민중들에게 불교를 포교하기 위하여 민족종교인 무교의 많은 부분들을 인용하였고 무교와 더불어 흥망을 같이 하며 오랜 세월 지내왔다.
그러다 보니 지금은 많은 무교인들이 불교를 무교의 일부분으로써 석가모니 부처님을 비롯한 관세음보살 등 여러 불상들을 다른 신명들과 함께 모시게 되었으니 사월 초파일은 무교와도 무관하지 않는 날이 되었다.
사월 초파일은 불교의 석가모니께서 중인도 히말라야 남쪽 기슭 가비라성에서 성주 정반왕과 왕비 마야 사이에서 B.C 623년 룸비니 동산 무우수無憂樹아래에서 태어난 날이라고 한다.
세상에 태어나자마자 사방으로 일곱 발자국을 걸으면서 “천성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이라고 외쳤다 한다.
석가모니의 처음 이름은 ‘싯달다’, 생후 7일째 어머니와 사별하고 이모 손에서 자랐으며, 장성하여 선각왕의 딸 ‘야수다라’와 결혼하여 두 아들을 두었다.
그 후 인간의 생로병사生老病死의 고통을 보고 29세 때 출가하여 선지식仙知識을 만나 배움을 얻고 35세에 정각하여 부처(佛陀, Buddha, 깨달은 자)가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녹야원에서 사성제(四聖)를 비롯한 삼법인설, 팔정도, 십이인연 등의 설법을 설한 뒤 45년간 인도 각지를 다니며 많은 사람들을 불교에 귀의하게 하였다.
그 후 석가모니는 B.C 544년 2월 15일 80세의 나이로 구시나라의 바라쌍수 아래에서 입적하였다.
석가모니가 입적한 후 916년이 지난 고구려 소수림왕 2년(372년)에 중국의 전진前秦으로부터 승려‘순도’가 불상과 경전을 가져오면서 우리에게 전해졌다. 특히 삼국 중 신라는 불교를 배척하고 신교를 믿는 세력들이 강하여 이차돈이라는 순교자를 낸 후 법흥왕(527년) 때 국교가 되었지만 고구려나 백제보다 150년 가령 늦었다.
그 후 불교는 삼국을 거쳐 고려 때까지 국교가 되어 우리 민족 종교인 무교를 대신하며 그 위치를 더욱 확고히 하면서 많은 발전을 하여왔다.
불교에서는 등불을 밝히는 이유를 <설일체 유부경전>의 기록에 보면 ‘아사세왕’이 기원정사에서 부처님께 법문을 청해 들을 때 동참한 모든 불제자들이 기름등을 켜서 법회자리를 밝힌대서 유래 되었다고 한다.
이 자리에 ‘난타’라는 한 가난한 여인이 많은 사람들이 기름등으로 불 공양을 올려 공덕 쌓는 것을 보고, 자신도 공덕을 쌓고 싶어서나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음을 안타깝게 생각하다 자신의 머리카락을 잘라서 기름 한 되를 구하여 불을 밝혔다.
다음 날 아침이 되어 모든 불을 꺼졌으나 이‘난타’의 불만은 꺼지지 않고 밝게 타고 있었다. 아난과 목련 존자가 이 불을 발견하고는 부처님께 여쭈니 부처님께서 “이 등불은 지극한 성심과 큰 원력을 가진 사람이 밝힌 등불이기 때문에 꺼지지 않는다.” 라고 말씀 하셨다.
이때 ‘난타’ 여인이 부처님 전에 예불을 올리자 부처님께서는 네가 오는 세상에 이 아승지겁을 지나 부처가 되리니 이름을 <동광여래>라 할 것이다. 라고 수기를 내리셨다.
이어 난타는 부처님께 출가하기를 기원하여 비구니가 되었다.」고 한다.
이때부터 큰 원력을 세운 사람은, 부처님 전에 은혜에 보답하고 자신의 지혜를 밝히는 등불을 켜게 되었으며 이를 계승하고자 부처님 오신 날에 각 사찰마다 등불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각 사찰마다 등불을 밝히는 뜻은 화엄경을 보면 “믿음을 심지 삼고, 자비를 기름으로 삼아 생각을 그릇으로 하고 공독의 빛으로 하여 삼독(탐내고, 성내고, 어리석음)을 없앤다.” 라고 하였다.
또 대열반경에는 “중생은 번뇌의 어두움 때문에 지혜를 잃는데 비해, 여래는 방편으로 지혜의 등을 켜니 모든 중생을 열반에 들게 한다.” 라고 하였다.
이것은 모든 중생의 번뇌와 삼독으로 인해 불성보배를 보지 못하고 있음을 표명한 것이며 부처님께서는 곧 법신, 보신, 화신의 삼신 모습으로 이 세상에 나타나시어 중생들이 지혜로서 평안하게 살아갈 수 있는 길을 인도하여 주신 것이라 한다.
연등에 관한 기록을 보면 통일신라시대부터 연등행사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 당시는 석가탄신일이 아닌 정월 대보름인 상원上元날에 개최되었다.
이는 중국 상원 날의 연등회 풍속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석가탄신일 보다 더 성행하였다.
그러다 고려 태조 왕건이 상원 연등회를 법으로 정착시켜 온 국민에 참여하는 국가적인 축제인 연례불교행사로 만들었다. 즉 온 국민이 참여하는 우리 민족의 세시풍속인 정월 대보름인 상원의 풍속과 불교의 의식을 가미하여 왕실의 번영을 기원하는 왕실이 주최하는 행사였다.
그리고 사월 초파일에는 사찰별로 소규모 연등행사가 열리고 있었다. 그러다 사월 초파일 연등행사가 왕실 행사인 상원의 연등행사보다 능가하게 된 이유는 바로 무신집권 시대부터이다.
무신정권 즉 최우崔祐가 권력을 잡았을 때부터‘최우’는 왕실이 주체가 되는 상원의 연등행사보다 더 화려하고 웅장하게 사월 초파일일 연등행사를 개최하였다. 또한 그 시기에 몽고의 간섭으로 왕실의 번영과 발전을 기원하는 상원 연등행사가 자주 중단되자 점점 더 사월 초파일 연등회가 발전하게 되었던 것이다.
조선이 건국되자 숭유억불 정책에 의하여 상원의 연등회는 당연히 고려 왕실과 관련이 있으므로 구습이라 하여 즉시 폐쇄되어 버리고 사월초파일 연등회만 존속하여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여기서 부처님 오신 날이라는 4월 8일에 대하여, 또 연등에 대하여 우리 무교와 우리 민족과 어떤 관계가 있는가 한번 살펴보자.
부처님 오신 날은 불교를 국교로 하고 있는 태국(음4월 15일), 그리고 대부분 다른 나라에서는 2월 8일을 석가모니 탄신일로 잡고 있다.
또 1956년 네팔에서 개최된 제4차 세계불교대회에선 부처님 탄신일로 5얼 15일로 정하여 시행하기로 했다.
그러나 우리만 지금까지 부처님 오신 날을 음력 4월 8일로 고집스럽게 지켜오는 것은 무슨 이유가 있지 않을까 한다.
<고구려국 본기 제6편>을 보면 고구려 선조는 해모수로부터 나온다고 하였으며 <조대기>에선
「해모수가 하늘로부터 내려와 웅심산에 일찍이 살다가 부여의 옛 서울에서 군대를 일으켜 무리에게 추대되어 나라를 세우고 왕이 되니 이를 부여 시조라 한다. 까마귀 깃털로 만든 관을 쓰고 용광의 검을 차고 오룡烏龍의 수레를 탔다.
아침엔 정사를 듣고 저녁엔 하늘로 오르니 호령하지 않아도 절로 관경管境이 교화 되었다. 단군 해모수가 처음 하늘에서 내려오심은 임술년(B.C 239년) 4월 초 여드레다.」라고 되어있다.
이렇게 보면 4월 초 여드레는 해모수가 하늘에서 내려온 날로써 불교가 고구려에 들어오면서 고구려 왕족의 신성함을 강조하기 위하여 해모수가 하늘에서 내려온 날을 부처님 탄신 날로 잡은 것이 아닌가 한다.
또한 부처님 탄신일에 밝히는 연등 역시 우리 무교의 인등因燈에서 비롯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하게 한다.
그 이유로 우리 무교의 조왕신을 들 수가 있는데 조왕신은 한인천제의 대리자로써 조왕신에게 제사할 때는 당반(鐺飯:속칭 노구메)을 사용하였으며 장등長燈으로 불을 밝혔다. 이것을 인등 因燈이라고도 하였으며 이 인등因燈은 신등을 말하는데 즉 한인천제桓因天帝의 등이라는 뜻이다.
한인천제는 태양의 신이다. 모든 만물을 태어나게 하고 생성하게 하는 태양을 상징하는 우리 민족의 최고 조상이다. 그러므로 태양인 한인천제에게 악박탁惡濁薄 삼망에 물들어 혼탁해진 인간의 심성을 태양이 가진 선청후善淸厚인 삼진으로 인간의 본성을 되찾겠다는 각오와 한인천제의 큰 뜻을 깨우치고 널리 세상을 밝히겠다는 육신고충의 고백으로 시작된 것이 바로 인등이 아닐까 한다.
또한 연등 혹은 인등을 밝히는 행위는 한인천제를 기리기 위한 것으로 한인천제에게 바치는 불인 것이다. 등불을 밝힘으로써 한인천제의 높은 덕과 사상을 널리 기린다는 뜻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여 본다.
여기서 연등이란 연꽃 모양을 한 등이라는 뜻이다. 연꽃하면 부처님을 생각하는데 연꽃은 바로 태평양에서 사라진 영원한 대륙인 “뮤제국”의 신성한 꽃이 바로 연꽃이라는 주장이 있다.
“뮤 제국”은 영국의 제임스 처치워드(James Churchward)가 인도 힌두교의 전설로만 전해지던 이야기를 50여년 연구 끝에 "잃어버린 뮤 대륙(The Lost Continent of Mu)"이라는 책을 펴내면서 실제 있었던 제국이 되었다.
조선 <왕조실록>을 보면 연등의 모양도 용과 봉, 호랑이와 표범, 새, 짐승, 물고기 등의 모양과 마늘, 박, 학, 잉어, 자라, 병, 항아리, 북 모양의 등을 비롯하여 수많은 등이 있었다는 기록을 볼 수가 있다.
그러나 인등이나 연등은 세월에 따라 기복으로 변질되어 문화나 예술의 가치는 찾아 볼 수 없고 개인 또는 가족의 앞날에 영광과 복을 기원하는 것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삼신할미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언덕에 꽂는 모기旄旗 (0) | 2010.06.18 |
---|---|
神자와 鬼자의 유래 (0) | 2010.06.09 |
절과 사찰寺刹이란 명칭에 대한 의문 (0) | 2010.05.17 |
태백진교 (0) | 2010.05.11 |
巫자와 神자의 출현 (0) | 2010.04.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