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속 이야기

해를 품은 달과 성수청星宿廳

愚悟 2012. 1. 5. 14:41

 

 

 

 

MBC 수목 드라마 ‘해를 품은 달’이 시작과 함께 세간의 주목을 받고 있는 것은, 극의 짜임새도 있지만 새롭게 조명된 무녀가 등장한다는 것이다.

‘해를 품은 달’은 지금까지 드라마 소재 중 무당이 등장하여 시청률이 저조한 적이 없다는 불문율을 이어가는 것에 그치지 않고 ‘해를 품은 달’이란 멋진 제목과 짜임새 있는 스토리 전개로 대박이 터질 것 같은 예감을 받았다.

이 드라마가 주목을 받으면서 무교인들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성수청星宿廳이란 곳에 대하여 새삼 관심을 가지게 되어 성수청星宿廳이 어떤 곳인가를 알아보고 아울러 그 시대 무녀들의 역할에 대하여 알아보자.

 

성수청은 성신청星辰廳이라고도 하는데, 조선 전기 나라무당인 국무國巫를 두고 국가와 왕실을 위해 복을 빌고祈福, 재앙을 물리치는(禳災) 굿을 전담한 국가 공식 무속 전담기구라고 할 수 있다.

무당들은 자신들이 모시는 신들을 성수님이라고 호칭하는 것을 생각하면 성수청의 기능이 무엇인지 금방 알 수가 있다.

조선시대는 숭유억불 정책으로 무교를 음사陰邪라 하여 배척하였는데 어찌 국가에서 성수청을 두어 국가와 왕실의 복을 빌고, 재앙을 물리치는 굿을 하였을까 하는 생각도 가지게 된다.

그러나 무교는 옛날부터 지금까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남모르게 의지하며 믿고 지내온 것이 바로 우리 민족의 심성이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상할 것도 없다.

 

이 성수청이란 곳도 조선시대에서 갑자기 생긴 것이 아니라 고려시대, 더 나아가서는 통일신라시대에도 존재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에는 별례기은도감別例祈恩都監(별기은)이라 하여 나라의 환난患難이 없도록 기도祈禱하는 일을 맡은 임시臨時 관아官衙로 명종明宗 8년(1178)과 고종高宗 4년(1217)에 두었다는 기록이 있듯이, 조선왕조도 고려 때 왕실의 별례기은도감別例祈恩都監을 대신하여 성수청을 두었다.

 

성수청과 관련된 기록은 『성종실록成宗實錄』,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 『중종실록中宗實錄』에 걸쳐 모두 10회 정도 나오는데 대부분 성수청을 폐지해야 한다는 상소들이다.

그러나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에 따르면 연산군 9년(1503년) 5월 1일에 전교하기를 “성수청에 국무國巫를 둔 것은 그 유래가 이미 오래되었다”고 했으며, 또 12년(1506년) 3월 15일에 전교하기를 “성수청의 도무녀都巫女와 수종무녀隨從巫女들에게 잡역雜役을 면제시켜 주라”고 했다.

이 기록으로 봐서 성수청의 최고무녀를 도무녀都巫女라고 하였으며, 그 외 무녀들을 수종무녀라고 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가 흔히 부르는 국무國巫라는 명칭은 왕실과 나라의 안녕과 복을 기원하는 무녀를 통칭하는 것으로, 국가적 차원의 공식적인 굿을 거행하는 국무國巫는 한명이 아니라 여러 명이 있었다.

그리고 조선시대에 국무가 굿을 하는 장소는 궁궐 안이 아니라 조선 팔도의 명산에서 제사를 드렸는데, 감악산, 덕적도, 목멱산 등 여러 곳에 있었으며, 대표적인 장소가 송악, 즉 개성의 국무당이었다.

 

성종 9년(1478) 11월 홍문관 부제학 성현은 상소문을 통해, 성수청을 성내에 두고 있으면서 백성만 무속행위를 못하게 한다면 잘못이라는 주장하였으며, 중종 1년(1506) 10월 소격서昭格署와 성수청을 혁파하라는 조광조 등의 상소를 마지막으로 성수청은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 국가적 차원의 공식적인 굿을 담당하는 성수청은 사라졌지만 왕실 내행內行의 별기은別祈恩은 유생들의 반대 속에서도 조선 말기까지 지속적으로 행해졌다.

 

그리고 조선시대는 공식적으로 무녀를 탄압하고 배척하여 도성 안에는 무녀들의 거주를 금지시켰지만 많은 곳에서 무녀들이 공식적으로 활동했다는 것을 기록에서 찾을 수 있다.

조선시대의 의료기관인 동서활인서는 많은 백성들이 치료받을 수 있는 유일한 국립의료기관이다. 이 활인서에 무녀들을 배치되어 한의사들과 함께 환자를 치료하게 하였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이 동서활인서의 운영비는 거의 무세巫稅로 충당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무녀가 담당하는 마을에 일 년 동안 질병 등 별 탈 없이 지나가면 세금을 감면해 주기도 하였다.

 

조선시대는 공식적으로 무교를 탄압하였지만 그 시대 무녀들의 수입은 굉장히 좋았는지 많은 세금을 거두었다.

그 당시 무당들의 세금을 업세業稅라 하여 구리와 면포, 그리고 쌀과 돈으로 내었다.

조선조 세종 때 호조에서 책정한 무녀들의 세금을 보면, 국무당國巫堂은 9근, 전의 국무당은 8근, 송악松嶽무당은 8근, 덕적德積무당은 6근, 삼성三聖무당은 6근, 당무녀堂巫女는 2근, 일반무녀는 1근을 수납하도록 하였다.

그 당시 정승에 해당하는 정 ․ 종일품들이 세금이 10근 이었고, 말단 종8품은 8냥쭝이었다는 것을 비교하면 국무당을 비롯한 무녀들의 세금이 얼마나 과중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조선 중종 때 실학파들은 무당들에게 세금을 부과한다는 것은 국가에서 무속을 인정하는 것이므로 무당들의 세금인 무세를 없애야 한다고 주장하면서까지 무속을 말살하려고 했다.

그러나 무속을 말살시키려는 많은 시도와 노력에도 불구하고 조선 중반부터는 무당들의 세금이 지방제정 수입에 막대한 부분을 차지하는 재원이 되었다.

 

영조 20년 (1744)에 발간된 ‘속대전續大典’의 기록에 정식국가 수입 항목으로 무녀마다 베 한 필씩을 무세로 거두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것은, 그 당시 무세를 국가의 정식 수입항목에 포함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국가 수입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또 19세기 국가재정을 기록한 ‘만기요람萬機要覽’를 보면 평안도와 황해도 무당을 제외한 전국 무당들에게서 거둬들인 무세가 총 1,326필 이라고 한다.

이 기록은 19세기 무세를 납부한 무당이 1,326명 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세금을 내지 못하고 숨어 다닌 무당들까지 추산한다면 황해도 이남에 거주하는 무당의 숫자는 2,000명 이상이 아니었을까 예상할 수 있다.

특히 평안도와 황해도 무당들의 무세는 지방관찰사가 직접 징수하여 북방을 경계하는 국방비로 사용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지금이나 그때나 국가재정에서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바로 국방비라고 한다면 평안도와 황해도 무당들의 숫자가 많았다는 것과 또한 걷어 들인 그 무세가 엄청난 금액이었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다.

이렇게 무세는 지방재정의 중요한 수입원으로 지방관의 재량권에 의하여 무세가 걷히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탐관오리들은 지방재정을 확충한다는 명목아래 더 많은 무세巫稅를 걷기 위하여 무세의 종류를 늘려 더 많은 세금을 거둬들였다는 것을 기록으로 알 수 있다.

 

초기에는 무세로 무업세巫業稅만 있던 것이 점차 ‘무업세’ 외에 ‘신당퇴미세神堂退米稅’ ‘신포세神布稅’란 명목으로 세금을 수탈해 갔다.

신당퇴미세는 신당에 바쳐진 제물 중 쌀이나 돈 등을 내릴 때 일정부분을 세금으로 내야 한다는 것이며, 신포세는 무녀들이 내는 세금이 아니라 일반 백성들이 내는 세금으로, 신을 믿기 때문에 내는 세금이다.

즉 굿이나 치성을 드리는 것은 신을 믿기 때문에 하는 의식이므로 정성을 드릴 때 일정부분의 면포나 금전 등으로 세금으로 바치게 하는 특별소비세라고 할 수 있다.

 

손노선의 조사연구에 의하면 ‘만신연록기萬神年錄記’ 의 기록에 조선 말기에 과중한 무세로 인하여 무당들이 무업을 접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그러자 굿판에서 수입을 얻어 온 <풍류방>의 악사들도 자기들의 수입이 줄어들자 궁여지책으로 굿판에서 얻은 수입 중 일정부분을 갹출하여 정립해 두었다 무세를 낼 시기에 무당들의 무세를 들어주었다는 기록을 발견하였다고 한다.

 

무당들의 무세는 일 년에 초기에는 두 번을 내었지만 나중에 한 번씩 내었다고 한다.

그러나 무세의 종류가 늘어나면서 무당들은 일 년에 한 번씩 내는 무세와 수시로 내는 신당퇴미세, 그리고 신포세까지 감당해야하는 무당들은 많은 세금 때문에 무업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무속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양굿의 청계배웅  (0) 2012.04.02
예로부터 전해온 귀신퇴치법  (0) 2012.02.25
비수거리(작두거리)  (0) 2011.10.23
건립대감  (0) 2011.10.02
조상굿  (0) 2011.09.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