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지창 칼럼

스스로가 주인인 무교인 모임을 준비하며

愚悟 2013. 10. 30. 00:00

스스로가 주인인 무교인 모임을 준비하며

 

 

          <민들레국수집 현판과 맛있는 국수, 그리고 노숙자 기타리스트 연주와 안베드로 신부님과 포대화상님, 서영남 국수집 수사님>

 

 

                      < 무우단을 다듬과 씻어서 건져내는 것까지 ㅋㅋㅋ 쨤을 내어 무우 맛을 보았습니다. 꿀맛입니다.>

 

 

                                         <도 닦는 기분으로 혼자 무우단을 무우와 우거지로 구분하였다. 무우신공 연마>

 

 

마고삼신으로 이어온 무교가 주체성을 상실한 위정자의 정책에 폄하되고 외래종교의 위세에 밀려 미신으로 추락한지 천년의 세월이 되어 간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해방된 조국에서 무교는 다시 한 번 민족의 구심점 역할을 할 종교가 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지만, 일제의 잘못된 교육과 유교사상의 그림자, 그리고 무교인들의 의식과 자질 부족으로 미신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다시 외래종교인 기독교로부터 지탄받는 귀신을 모신 집단이 되어 버렸다.

 

그러면 무교단체의 변천과정을 살펴보기로 하자.

일본에 패망하기 전 구한말까지 서울에는 무당의 교육기관이라고 할 수 있는 도가禱家라는 곳이 네 곳이 있었다.

이것을 4도가라고 하는데 사대문 밖에 존재하면서 무당들의 제의의례와 예법 그리고 춤을 가르치는 곳이었다.

 

그 당시는 무당이 내림굿을 하였다고 아무나 굿을 하지 못하였으며, 반드시 4도가를 거쳐 교육을 받고 난 뒤 굿을 하였다.

4도가의 위치는 지금 회현동에서 남산을 지나 동작동까지를 담당하던 <우수제>와, 구파발 부근을 담당하던 <구파발도가>, 그리고 사하리라고 부르다가 <되넘>이라고 불렀던 미아리 고개 넘어 장위동 부근 <사하리도가>, 그리고 마지막 도가로는 정확하지 않지만 성안에 있었다고 하는데 경희궁 옆이라고 한다. 또 아현동에는 <산대도감>이라고 하여 산대놀이를 총괄하던 곳이 있었다.

 

도가의 우두머리를 패두霸頭 또는 도방禱方이라고 불렀는데 패두의 권위는 절대적이었다.

이렇게 4도가가 지속되어 오다 대한제국이 일본에 패망하고 일본인들이 경신조합敬信組合이라는 단체를 만들어 무당들을 관리하기 시작하였다.

일제가 경신조합을 조직하여 무당들을 관리하면서 굿을 통한 민중들의 결집과 반일감정 등을 사전에 파악하고 통제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후 해방이 되고 난 뒤 반공의 국시로 삼는 국가의 국시에 따라 1955년 경 대한승공경신연합회大韓勝共敬信聯合會라는 무당 조직이 탄생하게 되었다.

 

초대회장은 반공검사로 유명한 오재도검사가 맡았으나 실제로 회장으로 활동은 하지 않고 조직을 만들고 명의만 사용하게 해 준 거 같다.

그 후 대한승공경신연합회는 손명진이 잠깐 회장을 하다, 이어서 얼마 전에 작고한 최남억 회장이 40년 가까이 대한승공경신연합회를 이끌어 왔다.

 

대한 승공경신연합회는 국민정부 등이 들어서면서 남북화해물결의 정서에 반하여 반공이데올로기의 상징인 <승공>이라는 단어가 맞지 않는다고 하여 <대한경신연합회>라는 명칭으로 행정자치부 등록 사단법인으로 다시 태어났다.

그 후 경신연합회의 운영에 불만을 품은 무속인들이 경신연합회에서 뛰쳐나와 조직한 단체가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지금 존재하는 단체로는 <대한경신연합회>를 비롯하여 <한국무속협회> <한국무속인총연합회> <한국무속인협회> <한국민속문화예술원> <한국토속문화진흥협회> <한국민속문화경신연합회> 등 많이 있다.

 

또 불교의 종단에다 <천우종> <천신종> <불선종> 등 등 기억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한 이름으로 곁방살이를 하고 있는 것이 지금의 현실이다.

그러나 이 많은 단체들이 무교단체로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무교의 발전을 위해서는 반드시 조직이 필수 조건이다.

이 조직을 통하여 무교를 대변하고, 무교의 저변확대를 꾀하고. 무교인들의 자질향상을 도모하고, 무교의 이론과 경전들을 정립하고, 무교가 민족의 정체성을 담고 있는 민족종교로 거듭나야 한다.

그러나 무교인들을 한 곳으로 결집시키기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무교인들은 스스로 모래알 같다고 한다. 그러기에 단결이 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무교인들이 모래라고 한다면 시멘트와 물만 있으면 단단하게 굳어질 수 있다.

 

그렇다면 시멘트 역할은 조직이 하고, 물의 역할은 학자들이 한다면 무교의 조직은 단단하게 굳은 시멘트가 되어 외부의 어떠한 힘에도 부서지지 않는 조직이 될 것이라 확신한다.

사실 초기 무속단체들의 결성 과정을 보면 무교인들은 단결이 되지 않는다는 말은 잘못된 생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단체들이 그 역할을 다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불신이 쌓여 흩어지게 되었으며, 그 후 무교인들은 뭉칠 수 있는 구심점과 동기를 부여 받지 못하였기에 뭉쳐야 한다는 것은 알지만 뭉치지 못한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언제까지 이렇게 손가락 받으며 지낼 수만 없다.

그 어떤 단체도 하지 못한 모래알 같은 무교인들을 뭉칠 수 있는 단체가 절대로 필요한 시점이다. 

뜻있는 무교인들이 한 마음으로 모여 서로 믿고 의지하며 참다운 무교인으로 거듭날 수 있는 모임이 필요하다.  

우리 국민이 믿고 따를 수 있는 올바른 무교가 될 수 있도록, 스스로 주인의식을 가지고 인성을 닦고 재주를 배우며 봉사를 할 수 있는 조그마한 소모임부터 시작하였으면 한다.

 

특히 오늘 민들레국수집 봉사를 하면서 느낀 점이 조직이나 단체가 아니면 자발적인 참여가 아주 저조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물론 무교인들은 신령님 일이 우선이지만 무교인들 스스로 난 어디 소속이니까 우리 단체가 하는 일이 아니면 외면해버리는 진영논리에 빠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많은 무우단을 준비하여 무교인들이 오면 다듬고 씻어 무우채를 썰어주리라 믿고 기다리던 서영남 수사님께 정말 죄송하였다.

혼자 200개 가까이 되는 무우를 다듬고 봉사자들과 같이 씻는 일만 마치고 오늘 일을 마쳤지만 창피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그 와중에 포대화상님이 늦게나마 옷을 한차 싣고 와서 힘들 일을 도와주었으며, 매화아씨당 양덕미 선생이 쌀과 과일을, 천록신당 이영금 선생과 인천 무송님이 기부금을 민들레국수집 계좌로 보내주셨다.

특히 창녕에 계시는 <무속인에게 실망한 카페>를 운영하시는 로고스님이 물품을 택배로 보내주셨다.

신령님 일 때문에 직접 참여를 못했지만 관심과 격려 그리고 기부금을 보내 주신 무교인들께 깊이 감사드리며. 다음에는 꼭 동참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뜻에 동참하시는 분은 아래 비밀 댓글로 연락처와 이름을 남겨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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