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당神堂이 가지는 의미
우리 무교인은 내림굿을 하고 나면 최우선으로 하는 일이 바로 신당을 모시는 일이다.
그러면 신당은 왜 모시는 것일까?
점을 보고 돈을 벌기 위한 영업장을 여는 것일까?
사람들이 그 앞에 와서 절을 하라고 모시는 것일까?
아님 무당이 되었으니 신령님을 그냥 모시는 것일까?
이 말도 틀린다고 할 수는 없지만 너무 세속적인 이유로 좀 더 그럴듯한 설명이 필요하다.
이렇게 무교인이면 누구나 모시고 있는 신당을 왜 모시는지 정확하게 그 의미를 설명하지 못한다.
이런 것이 바로 종교학자들이 해야 할 일이지만, 무교에는 종교학자가 없으며, 그나마 필자가 무교의 이론을 세우고 정립하는 일을 지금까지 하여 왔다.
그러나 격려는 하지 못하더라도 함량미달 무속인(무교를 속되게 하는 사람)들이 괜스레 트집을 잡고 중상모략을 일삼으며 욕을 하니 그것도 속상하는 일이라 의욕이 자꾸 떨어지는 것이 사실이다.
이런 논리를 개발하고 세우는 것이 왜 욕을 먹을 일인가 묻고 싶다.
그리고 필자는 욕하는 사람들은 한번이라도 나와 만나서 대화를 해 봤는지도 묻고 싶다.
알지도 못하면서 남의 말을 건네 듣고 또 확대재생산하는 유언비어는 그만 했으면 한다.
필자에게 피를 빨렸거나, 사기를 당했거나 그 어떤 피해라도 입은 사람이 있으면 언제든지 공개적으로 그 사실을 알려주기 바란다.
그럼 왜 신당을 모시는가에 대한 그 논리를 살펴보자.
무교인들은 신당을 모셨으니 신령님을 극진히 대접하기 위하여 아침저녁으로 옥수를 갈고 절을 하며, 또 기도를 올린다.
그것으로 신당에 대한 예의와 용도는 끝이라고 생각하는 무교인들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민족의 3대 경전 중 하나인 《참전계경》을 살펴보면 왜 무교인들이 신당을 모셔야 하고 신당에서 어떤 자세로 임하여야 하는가를 이야기 하였다.
첫째 형체가 없는 신명을 늘 지극한 정성으로 공경히 모시기 위함이다.
둘째 신령님을 높이 숭배하기 위함이다.
셋째 신령님의 은덕에 감사하고 우러러 보며 잊지 않기 위함이다.
넷째 천지조화의 이치를 깨닫기 위함이다.
다섯째 인간의 본성인 선청후善淸厚를 회복할 수 있는 길(道)을 널리 전파하기 위함이다.
여섯째 스스로 마음을 비우고 내려놓고 낮은 자세로 임하기 위함이다.
일곱째 극진한 예를 갖춤으로 공손함을 배우고 스스로를 낮추기 위함이다.
이렇게 크게 일곱 가지의 큰 의미를 지니는 곳이 바로 신당이라 할 수 있다.
일곱 가지가 가지는 공통된 것은 바로 스스로 낮은 자세로 임하고 겸손을 실천하고 몸에 익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노자의 《도덕경》 8장에 「상선약수上善若水」란 말이 있다.
이 말은 최고로 착한 것은 물과 같다는 구절로 항상 낮은 곳으로 향하는 물의 겸손함을 배우라는 뜻으로, 우리 무교인들이 명심해야 할 덕목이라 생각한다.
무교인들이 신령님을 모실 때 높이 숭배함과 정성으로 모심은 한시적인 것이 아니라 늘 몸과 마음에 습관처럼 배여 있어야 하며, 그렇게 했을 때 신령님의 감응을 받을 수 있으며 그 곳이 바로 신당이 중심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신당은 신령님을 정성으로 숭배하고 늘 마음에 새겨 잊지 않고자 모시는 장소라고 할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선 신당을 모시는 장소는 정결하여야 하고, 높고 습기가 없어야 하고. 냄새나는 것과 더러운 것을 금하고, 시끄러운 것을 차단한 곳이어야 한다고 하였다.
또 지나치게 화려하고 번쩍거리는 것을 피하고, 필요이상의 신상을 세우거나 높이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인 삼신을 우러러 모시고 높이 숭배하는 장소인 신당에 임하는 무교인들의 자세는 바로 삼신이 인간에게 내려주신 본성인 선청후善淸厚를 가지는 것이다.
이것을 삼진三眞이라 하며, 무교인이 이 본성을 지키고 있을 때 비로소 하나님을 대신하는 민족종교 무교의 사제가 되는 것이다.
또한 신당에 받쳐진 재물을 뭇 중생들의 피와 땀과 눈물이니 그 재물은 그것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돌아갈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이 바로 무교의 정신인 생생지생을 실천하는 길이며 하나님인 삼신의 가르침에 따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우리 무교인들은 신당에 바쳐진 재물 등을 가치 있게 사용하도록 노력하는 것은 인간 본성인 선청후를 일깨워 주는 것과 마찬가지로 아주 중요한 임무라고 할 수 있다.
한 때 방송 등을 타며 한 때 잘 나가던 무속인들은 많은 돈을 벌었지만 그 돈에 대한 가치와 용도를 알지 못하고 허영과 사치를 부리다 대부분 쪽박을 차고 소식도 없이 사라졌다.
이렇게 무교인들이 신당 등에 받쳐진 재물은 자신의 재물이 아니라 신령님의 재물이라는 것을 알아야 하며, 신령님의 재물은 신령님의 뜻에 따라 가치 있게 사용하여야 한다는 것을 명심하였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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