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속 이야기

상산거리의 유래와 해설2

愚悟 2014. 9. 14. 00:00

                                             <덕물산 최영장군 사당 전경>

 

 

중국의 고대 역사지리서인 <산해경>을 보면

군자국이 북쪽에 있다 그들은 의관을 갖추고 칼을 차고 있으며 짐승을 잡아먹는다. 두 마리의 무늬 호랑이를 부려 곁에 두고, 그 사람들은 사양하기를 좋아하며 다투지 않는다. 훈화초薰華草라는 식물이 있는데 아침에 나서 저녁에 죽는다.란 기록이 있다.

이렇듯 우리 조상들은 항상 호랑이 두 마리를 곁에 두고 다녔다. 이 형상이 바로 무신도에 나오는 산신도그림의 바탕인 된 것이다.

<단군세기>를 보면 47세 고열가 단군이 왕위를 버리시고 입산수도하시어 신선이 되시니란 기록이 있다.

단군조선의 마지막 단군인 고열가 단군이 구월산에 들어가 산신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때부터 구월산에는 우리의 조상인 한인천제, 한웅천왕 그리고 단군왕검을 모시는 삼성사를 지어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신단실기>기록에 의하면 삼성사는 천왕사라고 하였는데 구월산 상봉에 있었다고 한다.

그러다 전봉으로 옮기고 다시 산기슭으로 옮겨 천왕 삼위를 모셔놓고 배형청과 전사청을 만들어 국가에서 향을 내려주어 제사지냈다.

삼성당에는 단인 한인천제와 단웅 한웅천왕 단군왕검 이렇게 세분을 성인으로 모셨다.

단인천왕은 남향하고, 단웅천왕은 서향하고, 단군천왕은 동향하였다.

아울러 신위도 같이 있었다. 세 신인들의 형상은 목상으로 만들었으나, 태종 때 하륜이 여러 사당의 목상을 고치면서 파기하였다.

또 삼성당 서쪽 좁은 방에는 구월산 대왕이 가운데 있고 왼쪽에는 토지정신이, 오른쪽에는 사직사자가 있었다고 한다.

제기는 처음에는 금은제를 썼지만 임진왜란 뒤로는 사기를 써오다 유기로 바꾸었다.

구월산은 우리 무교의 영산으로 조종산이라고 할 수 있다.

단군왕검이 진시황 8년에 멸망하고 난 후 마지막 단군인 고열가 단군이 구월산으로 들어가면서 황해도 굿이 시작되지 않았나 생각한다.

고열가 단군이 구월산에 삼성당三聖堂을 짓고 한인천제, 한웅천왕, 단군왕검을 모시고 매년 제사를 지내면서 황해도 굿의 시작과 무당이 탄생하였다고 보는 것이다.

마고시대, 한국시대, 베달나라시대, 단군조선시대로 이어 오면서 마고삼신이 처음 내린 천부삼인天符三印을 전해져 내려 왔으나 단군조선이 망하면서 고열가 단군께서 천부삼인을 삼성당을 주관하는 당주 무당에게 전해주었다고 유추 할 수 있다.

그 당시 천부삼인을 해와 달 그리고 별이 그려진 동판으로 전하게 되었으며 그 이름은 명두明斗라고 하였다.

그때부터 무당이면 반드시 가지고 있어야 하는 신의 몸체인 동시에 사제의 권위를 나타내는 아주 귀중한 무구로써 무당들의 필수품이 되었다.

명두明斗는 한국뿐만 아니라 시베리아 샤만이나 일본의 샤만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명두 뒷면에 해와 달 그리고 별이 새겨진 명두를 가지고 있는 나라는 우리나라 명두 밖에 없다.

시베리아 중국, 일본 등에는 별이 빠진 해와 달만 그려진 명두를 가지고 있다.

조선시대에 와서 유생들이 구월산 삼성당에 매년 무당들이 제사를 드리는 것을 못 마땅히 여겨 평양으로 옮겨버렸다. 그리고 구월산 삼성당을 방치하였다.

그 결과 구월산 문화현에 괴질이 돌아 모든 사람들이 죽고 문화현은 폐현이 되어 버렸다고 <조선왕조실록>에는 기록하고 있다.

조선시대의 숭유억불 정책에 따라 천대와 멸시를 받아오던 그 시절에도 공적으로 무당들이 존재하였다. 주로 국가의 일을 맡아서 하는 국무國巫와 아무衙巫로 구분하였다.

나라 일을 맡아 행하는 무당을 국무라고 하였으며, 관청에서 일을 맡아 행하는 무당을 아무라고 하였다.

또 조선 전기까지만 해도 춘 추로 삼성사를 비롯한 백악산, 덕적산, 송악산, 목산, 감악산, 대정大井, 주작朱雀 등에 국무나 아무를 동원하여 굿중심의 체천의례를 정기적으로 하였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또한 조선시대에 명나라와 무역에서 말을 사오기 위하여 병조의 정문呈文을 의정부에서 임금에게 올렸는데 그 내용은 각 문무백관과 무당들에게 소위 분단금을 정한 것이었다.

종일품은 두 사람이 아울러서 중마中馬 1필과 소마 1필씩, 종이품은 중마 한필씩 등으로 구입할 것을 정해 놓았는데, 여기에 국무당은 중마 1필씩, 국무당은 지냈던 무당은 두 사람이 어울러서 중마 1, 사부斜付무당은 여섯사람이 어울러서 중마 1, 송악과 덕적의 두 무당은 아우러서 중마 1, 내승內乘무당은 소마 1필씩, 감악紺嶽무당은 중마 1, 삼성무당은 소마 1, 무당은 4~10명 어울러서 중마 1, 상경사 및 부경사는 모두 중마 1필을 구입할 비용을 충당하도록 하였다.

또 조선 세종世宗 때 호조戶曹에서 임금에게 올린 상소문上疏文, 구리를 세금으로 바치게 하는데, 종일품은 108품은 8냥쭝, 국무당國巫堂9, 전의 국무당은 8, 송악松嶽무당은 8, 덕적德積무당은 6, 삼성三聖무당은 6, 당무녀堂巫女2, 무녀는 1근을 수납하도록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삼성사의 무당이 세금을 구리로 6근을 내었다면, 상당히 높은 액수의 세금을 내었다고 볼 수 있다.

보통 무당이 1근의 구리를 내었으므로, 6배를 냈던 것이다. 당시에 무당이 내는 세금을 업세業稅라고 하였다.

국무당은 나라의 대소사를 굿과 치성을 담당하는 무당을 말하며, 송악무당은 덕물산 최영장군을 모신당주 무당을 말한다.

덕적무당은 덕적도 정상에 있는 천제단을 관리하는 무당을 말하는데, 덕적도에는 단군조선의 마지막 단군인 고열가 단군 때 만든 것으로 보이는 제천단 터가 지금도 남아있고, 당집도 많았다고 한다.

삼성무당은 구월산에 있는 삼성사에서 봄과 가을에 행하는 제향을 주관하는 무당이다.

구월산 삼성당에서는 한인천제, 한웅천왕, 단군왕검의 제사를 올렸는데, 평양에서는 한인과 한웅의 제사를 없애고 고구려 추모왕과 고려의 왕건을 추가하여 삼성으로 모시고 제사를 드렸기 때문이라 한다.

 

산신도를 보면 두 마리 호랑이를 거느린 산신도와 한 마리 산신도를 거느린 산신도가 있다.

여기서 두 마리의 호랑이를 거느린 산신도는 바로 한웅천왕을 나타낸 산신도며, 한 마리의 호랑이를 거느린 산신도는 단군왕검을 나타낸 산신도라는 것이다.

상산거리가 굿거리 중 가장 먼저 나오는 이유도 바로 우리를 있게 해 준 우리의 조상에게 감사드리고 받들어 모시기 위함일 것이다

굿거리 사설을 살펴보면 팔도명산의 산신을 모두 다 청하여 모신다.

그렇게 하여 오늘 이렇게 후손들이 굿을 하니 차려놓은 정성스런 음식을 맛있게 드시고 한바탕 흥겹게 즐기시고 가실 때 후손들이 바른 길로 갈 수 있도록 옳은 말씀 한마디 해주시라는 청탁인 셈이다.

그때 옳은 덕담을 내리시면 그것이 바로 무당의 공수가 되는 것이다

진시왕 8년 고조선이 망하고 난 뒤 고열가 단군 단군은 산 속에 들어가 산신이 되었다는 기록에도 나오듯이 우리는 산신의 유래를 단군에서 찾아야 한다.

산신은 바로 단군을 비롯한 한웅천왕을 일컫는 말이라는 것을 알고 굿을 하여야 한다.

산상거리에서 예전부터 무녀가 소지종이를 양 손에 들고 굿을 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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