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궁(육상궁)과 청와대
우리 나라 역대 대통령들이 의기양양하게 청와대에 입성을 하였지만 나오실 때는 하나같이 비참하게 생을 마치거나 국민의 지탄을 받는 사람으로 전락하여 물러나게 되니 나라의 비극이요 청와대의 비극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나는 이러한 청와대의 비극이 칠궁에서 비롯된다고 본다.
많은 사람들이 청와대 옆 인왕산 길로 다니면서 무심코 지나치기 쉬운 청와대 담장 안에 있는 기와집 몇 채, 청와대의 건물과 어울리지 않는 이 몇 채의 기와집이 무엇인가 궁금해한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이곳이 바로 육상궁 즉 칠궁이다.
그러면 칠궁이 무엇이며 왜 청와대 안에 있는 것이냐? 칠궁은 본래 조선시대 숙종의 후궁이며 영조의 생모인 숙빈 최씨의 위패를 모시기 위하여 숙빈묘라고 부르며 세워졌다. 구중궁궐의 종의 신분인 무수리 출신으로 숙종의 눈에 들어 성은을 받은 덕에 영조를 잉태하게 되었고 장희빈의 투기로 온갖 고초를 겪으며 한 많은 삶을 살다 간 최무수리 즉 최숙빈의 위패가 모셔져 있었으나 1753년 영조 29년에 육상궁으로 개칭하였으며 그 후 일곱 분을 모셨기 때문에 칠궁이라고 하였다.
칠궁에는 돌아가신 후 왕으로 추대된 원종(광해군을 몰아내고 왕이 된 인조의 생부)의 어머니 인빈 김씨, 조선왕조 후궁 중에 대표적인 인물인 경종의 어머니 희빈 장씨(장희빈), 영조의 어머니인 무수리 출신의 숙빈 최씨, 돌아가신 후 왕으로 추대된 진종(영조의 장자인 효창세자)의 어머니 정빈 이씨, 사도세자의 어머니 영빈 이씨, 순조의 어머니 수빈 박씨, 조선조 마지막 왕세자인 영친왕의 어머니 순빈 엄씨 등 일곱 분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조선왕조의 임금과 정비인 왕비는 죽어서 종묘에 위패가 모셔지지만, 왕의 생모이지만 후궁은 세상을 떠난 후 종묘에 위패를 봉안하지 못하고 별도로 위패를 봉안하는 곳을 마련하였는데 그곳이 칠궁이다.
지금의 청와대 터는 옛날 경복궁의 일부였으나 일본이 조선총독부 관사를 그곳에다 지어 사용한 것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대통령 집무실로 사용하여 왔는데 본래 그 터의 주인은 칠궁에 계신 일곱 분이다.
조선시대에서는 일 년에 한 번씩 칠궁에 제를 지내 영령들을 위로하여 드렸다고 하는데 조선이 망하고부터 지금까지 누구 한 사람 칠궁에서 제를 지낸 적이 없으며, 또한 제를 올리고 싶어도 올릴 수 없는 처지니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나는 종교를 떠나서 대통령으로 당선되어 청와대에 들어가실 때는 칠궁에다 제를 올렸으면 하는 바람이다.
일반인들이 전세방을 얻어 가도 사는 동안 잘 부탁한다고 주인에게 인사를 올리는 법인데 하물며 5년 동안 집세도 한 푼 내지 않고 들어가 살면서 주인을 나 몰라라 하고 쳐다보지도 않는다면 칠궁에 계신 일곱 영령들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자기가 낳은 자식이 조선의 임금이 되었으니 당연히 종묘에 위패가 모셔져야 함에도 불구하고 후궁이라는 굴레 때문에 종묘에는 들어가 보지도 못하고 칠궁이라는 경복궁 후미진 곳에 따로 위패를 모셔졌으니 한이 맺혀도 이만저만 맺힌 것이 아닐 것이다. 살아서도 구중궁궐의 엄격한 법도와 많은 후궁과 정비의 시샘과 음모 속에서 숨 한 번 크게 쉬어 보지도 못하고 도리어 왕자를 낳은 것이 화근이 되어 모자가 목숨을 연명하기 위하여 감수하여야 했던 그 수모와 한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인데 죽어서도 자식이 한 나라의 임금이 되었지만 본인은 경복궁 후미진 곳에 모셔졌으니 그 한인들 오죽하겠는가?
제3공화국 시절 당시 청와대에 근무한 사람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로, 인왕산 길을 내면서 칠궁을 건드리지 않고 그 옆으로 도로 계획을 세웠지만 자기의 별장이 도로에 포함된 어느 재벌과 당시의 책임자의 장난으로 칠궁의 담을 헐고 길을 내고 난 뒤 그 해 8월15일 문세광 저격사건이 일어나 온 국민이 존경하고 국모의 모범을 보여 준 영부인께서 서거 하셨다고 한다. 그리고 몇 년 후 칠궁의 대문을 경호 책임자가 마음대로 방향을 바꾸어 지금의 방향으로 대문을 다시 세우고 난 뒤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 저격사건이 일어났다고 하니 우연이라고 그냥 가볍게 넘겨 버리기에는 무엇인가 이상한 기분이 든다.
오뉴월에도 여자가 한을 품으면 서리가 내린다고 하였다. 더군다나 일곱의 여자가 살아서도 한 많은 삶을 살았건만 죽어서까지 경복궁 후미진 곳에 방치되어 자손들로부터 제사밥 한 그릇 못 받는 세월을 원망하며 독을 품고 있는데 남의 집에 들어와 사는 사람들이 일곱 영령들에게 인사도 없이, 허락도 없이 마음대로 주인집 담장을 헐어 길을 내고 그것도 모자라 대문까지 마음대로 바꾸어 놓았으니 그래도 후손이라고 참았던 한과 분노가 폭발을 하였으니 국가의 지도자를 데려간 것이 아닌가 한다.
의친왕의 아들인 이석 공의 이야기를 들으면 자기가 어렸을 때 간혹 칠궁으로 들어가곤 하였는데 그곳에는 항상 들어갈 때마다 찬바람이 불고 무시무시한 기분이 들었다고 한다. 또한 어른들이 그곳에는 출입을 못하게 항상 만류를 하였다고 한다.
옛적에는 천자에 오르게 되면 하늘에 자신이 천자가 되었음을 고하였다. 그리고 자신이 천자로 있는동안 나라의 번영과 태평을 기원했다. 한 무제가 천자에 오르고 난 뒤 태산에 올라 하늘에 고한것을 봉선(封禪)이라고 한다. 필자는 우리도 대통령이 새로 취임하면 반드시 하늘에 고하였음 한다. 자신의 임기동안 국가의 번영과 더블어 안위와 태평을 기원하는 것이다. 이 시간에는 대한민국의 모든 종교가 자신들의 신께 국가의 번영과 발전을 함께 기도하면 될 것이다. 그리고 대통령으로 청와대에 입성하면 반드시 칠궁에다 제를 올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칠궁의 일곱 분들의 영혼을 위로하는 제를 올린다고 하여 이 땅에 사는 후손된 몸으로 부끄러울 것이 무엇이며 종교를 들먹이며 외면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 생각한다.
청와대에서 직접 제를 올리면 더 이상 좋을 수 없겠지만 여러 가지 사정으로 곤란하므로 이씨 종약원에 일임하여도 무방할 것이다. 종묘도 일 년에 한 번씩 종묘제례를 드리고 있으니 칠궁에 계신 분들도 당연히 자신들의 존재를 세상에 알리고 일 년에 한 번이라도 합당한 대우를 받고 싶어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21세기에 무슨 귀신 씨앗 까 먹는 소리냐고 할 줄 모르나 모든 것은 시대의 환경에 따라 결정될 일이지만 나는 칠궁에 계신 일곱 분의 분노에 찬 모습이 자꾸만 느껴져 두렵기만 하다. 언제 우리 무교인들이라도 칠궁에 계신 일곱 분을 위하여, 아니 나라의 안녕과 대통령의 임기 동안의 만수무강과 훌륭한 업적을 남기시어 퇴임식에서도 당당히 어깨를 펴고 취임식 때보다 더 많은 국민으로부터 존경받는 전직 대통령으로 사저로 돌아가 남은 여생 행복한 날이 되시기를 기원하는 칠궁제를 지내는 것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여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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