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지창 칼럼

천지불인

愚悟 2005. 5. 19. 22:50

天地不仁(천지불인)


노자의 도덕경 5장에  다음과 같은 글이 나온다.


天地不仁, 以萬物爲芻狗. 聖人不仁, 以百姓爲芻狗.

천지불인, 이만물위추구. 성인불인, 이백성위추구.

이 말은 "천지가 어질지 않아서 만물을 추구(풀강아지)로 여긴다. 성인도 어질지 않아서 백성들을 짚으로 만든 강아지와 같이 여긴다. 란 말이다.

즉 천지는 불인하여 만물에 무심하고 성인도 이와 같이 무심하여 백성들을 관섭치 않는 것이 바로 도의 정치라는 것을 말하려고 하는 것이다,

아주 머나먼 옛적에는 사람들에게 가장 두려운 존재가 바로 자연현상이었다. 자연재해인 홍수, 가뭄, 산불, 지진, 역병 등은 인간뿐만이 아니라 모든 생명체들의 고난과 역경의 근본적 원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러한 재해가 많으면 통치자는 자신의 부덕의 소치라고 밝히고 그 자리에서 물러나기까지 하였다고 한다. 이것을 책화(責禍)라고 하였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자연재해는 통치자의 잘못이 아니라 자연발생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으로 통치자가 책임을 질 필요 없다는 논리가 성립되어 통치자들은 “짐이 부덕한 소치”라고 말은 하면서 책임은 지지 않았다. 그 대신 자신의 부하 중에 희생양을 찾아 대신 처벌하는 것으로 매듭을 지운다. 그 실례로 여러 상고사 문헌들의 기록에서 찾을 수 있으며 대표적인 것이 우임금이 치수의 실패를 들어 자신의 장인이자 신하인 곤을 죽인 것을 들 수 있다. 이것을 다시 통치자의 덕목으로 정립한 것이 바로 노자의 도덕경에 나오는 천지불인이라 하겠다. 

그 당시 천지불인은 하늘과 땅, 즉 자연현상은 결코 인자하지 않으며 그 결과 인간들에게 많은 재앙을 남긴다는 이야기다. 그러므로 그 당시 통치자가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었다. 그때부터 자연재앙에 따른 책임으로 통치자가 그 자리에서 물러나는 일이 사라질 수 있었다.

천지는 그야 말로 두려움과 외경의 대상이었다. 하늘은 인간들에게는 비정하고 박절하며 잔인한 자연의 현상 즉, 신이라고 사람들은 생각했다. 그 결과 자연에 대한 외경심에서 발생한 여러 가지 형식의 제의들이 탄생하게 되었고 지금도 이어져 오고 있는 것이 바로 굿이라는 형태가 아닌가 한다. 우주의 만물의 존재가치를 인정하고 더불어 화합하여 잘 살아가자는 의미를 지닌 무교의 정신 즉 생생지생(生生之生)과 접화군생(接化群生)의 정신은 자연의 모든 재앙에 대한 두려움을 외경의 대상인 신의 형태로 나타나게 되었다.

즉 다시 말하면 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종교의 신들은 결코 인자하지 않다는 것이다.

모든 종교들이 사랑과 박애 등 거창한 구호를 내 걸고 있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결코 사랑과 박애는 찾아 볼 수가 없는 인자한 종교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교의 신들은 인자한가라는 위문을 가질 수 있으나 무교의 신 역시 인자하다고 말할 수 없다. 

신이라는 존재는 사람들에게 복을 주기 보다는 고통과 역경 등 어려움을 주고 그것을 즐기는 듯 한 생각마저 드는 것이 바로 신의 존재이다.

지금 세상을 둘러보면 착하고 어질게 사는 평범한 소시민들보다 남을 속이고 법을 어기며 나쁜 짓을 일삼는 사람들이 더 잘 살아가고 있다. 지금 현생의 삶이 고달프고 힘든데 죽어서 훗날 천당이나 극락을 간다고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우리는 뉴스를 접하고는 가끔 정말 신이 존재하는가에 대하여 의구심을 가지게 될 때가 많이 있다. 

천지불인 즉, 신은 인간들에게 인자하지 않고 무관심 한 것이기에 인간사의 일들을 상관하지 않고 내버려 두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죽어서 어디로 가든 그것은 죽고 난 뒤의 일이지 지금 당장 살아가는 현생에서는 어질게 법을 지키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손해를 본다는  생각이 들게 된다.

지구상의 존재하는 신들은 하나같이 자신을 따르게 되면 끝까지 영원히 자신을 믿고 따르며 섬기길 원한다. 신의 뜻을 거역하고 신을 떠나는 것을 결코 용서하지 않으며 신의 심부름꾼으로 신을 위하여 영원히 살아갈 것을 요구하는 것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신이다. 이러한 원칙에 충실하게 위하여 종교를 만들고 신을 믿고 따르는 사제라는 집단이 그 부산물로 생겨났다. 그 사제라는 집단 속에는 분명 무교를 이끌어 나가는 무당들도 포함된다. 다른 종교의 사제들은 자세한 내막을 모르니 뭐라고 말할 수 없으나 우리 무당들은 천지불인의 정신을 잘 이어받아 결코 사람들에게 인자하지 않다는 것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삼독(三毒)이라 일컫는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으로 똘똘 뭉쳐있는 무당들의 모습을 보면 결코 신은 인자하지 않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하겠다. 그러나 노자의 천지불인은 결코 인자함이란 어떤 것인가를 말하는 것이지 인자하지 말라는 것은 아니다. 인자함이란 지위가 높고, 기운이 세고, 재물을 많은 가지는 등 가진 자들에게 꼭 필요한 덕목이다. 남에게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는 사람들은 노자의 말대로 타인에게 영향을 미치지 않으므로 즉 무관심함으로써 그 자체로 벌써 인자한 것이라는 말이다. 무당들은 많은 사람들을 상대하며 그들을 인생을 조언하고 상담해 준다. 무당들이 삼독에 빠져 인자함을 잃는다면, 신들이 직접 선택한 사제로서 신을 모욕하는 어리석음을 저지르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면 신들이 결코 인자하게 대해주지 않을 것이며 소위 무당들이 말하는 신벌로 평생을 피곤하게 살아가야 할 것이다.

천지는 불인이기 때문에 신들은 결코 인자하지 않다는 것을 스스로 먼저 깨달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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