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교의 성립과 그 전래
일반적으로 도교는 노자(老子)의 학설을 발전시켜 종교로서 체계화 한 것으로 믿어지는 경향이 있으나
본질적으로는 노자의 철학과는 관련이 없다. 그 근원을 찾으면 후한말(後漢末)의 장릉(張陵)이라는 사람의 천사도(天師道) 또는
오두미도(五斗米道)에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즉 장릉은 부주(符呪)로서 병을 고치고 참회를 권고하며 늙지 않고 오래살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쳤던 것이다. 그는 의사(義舍, 공동숙사)를 세우고 의미(義米)를 갖추어 빈곤한 사람들을 도와 후한말의 불안하였던 시기에 있어서 생활에
위협받던 대중을 끌어 들이는데 성공하였던 것이다. 병을 고쳐주는 대가로 쌀 5두(斗)를 받았기에 그의 괴상한 설교를 오두미도라고
불렀다.
장릉은 스스로를 천사(天師)라고 불러 경문(經文)을 만들고 기도도 가르쳤던 것이나 천사라는 말은 후세까지 길이 쓰여졌기에 그의
가르침을 천사도라고 부르는 수가 있다. 그는 노자의 책이 늙지 않고 오래 살 수 있는 비결을 가르치는 것으로 해석하고 존중하였던 것이나 이것은
노자숭배가 높아졌던 그 당시의 추세를 이용하여 노자를 신주로 모셨을 뿐이었다.
장릉에서 비롯한 오두미도에서 치병양생(治病養生)에는
부주(符呪)와 기도가 효험이 있는 것을 주장하였던 것이 그 뒤 점복술(占卜術)이라든가 늙지 않고 죽지도 않은 선인(仙人)이 될 수 있는 이른바
신선술(神仙術)을 비롯한 여러 가지 통속종교가 이와 결부되어 중국의 남북조시대(南北朝時代)에 이르러 점차 종교적 형식이
갖추어졌다.
그리하여 후위(後魏)의 구겸지(寇謙之), 양(梁)의 육수정(陸修靜)이 이 가르침의 정비에 힘써 불교와 겨룰 수 있는 종교로서의
도교의 성립을 보게 되었던 것이며 도교라는 이름도 남북조시대부터 나타나게 되었다.
구겸지가 후위의 수도인 평성(平城, 지금의
산서성(山西省) 대동현(大同縣)에 세운 천사도장(天師道場)은 도교의 대본산(大本山)이라고 할 수 있으며 각 지방에는 그 지부로서 많은
도단(道壇)이 세워져 노자를 그 교의 개조(開祖)로 숭배하고 거기에 다시 도교를 계시(啓示)한 조신(祖神)으로서 원시천존(元始天尊)이라고 이름을
붙인 기도대상을 두게 된 것도 같은 시대부터이다.
도교는 생명을 연장시키고 재난을 없이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현세주의의 종교로서
성립되었던 것이나 그 경문을 모은 도장(道藏)이나 교리에는 불교의 교리와 경을 모방하여 수식된 것이 많았던 것이 오히려 그 교세 확장에 도움이
되어 당(唐), 송(宋) 이후 중국에서 불교가 활력을 잃게 되면서부터 도교가 그 민족의 일상생활을 지배하는 길을 열었다.
이 도교가
우리나라에 전래된 확실한 기사는 『삼국사기(三國史記)』 고구려기(高句麗紀)에서 찾아볼 수 있다. 즉 영류왕 7년(624)에 당이 도사(道士)를
보내어 고구려에 천존상(天尊像) 및 도교를 전하였으며 이 도사가 노자를 강술하는 것을 왕과 국인(國人)이 들었고 그 다음해인 8년에는 왕이
당으로부터 불교와 도교를 배울 것을 청하매 당이 이를 받아드렸다고 한다.[註1]
그 후 다시 보장왕 2년(643) 3월에는
연개소문(淵蓋蘇文)이 '유(儒) · 불(佛) · 도(道)의 삼교(三敎)는 마치 솥(鼎)의 다리와 같은 것이어서 그 어느 것이 빠져도
안됩니다.'[註2]라고 전제하고 유 · 불에 비하여 도교가 뒤떨어졌으니 당에서
도교를 배워 국인을 교화하여야 한다는 주장에 따라 당에게 그 교육을 청하였더니 태종이 도사 숙달(叔達) 등 8인을 보내어 왔고 아울러
노자도덕경(老子道德經)을 주어 왕이 좋아하여 사찰을 빼앗아 숙달 등을 이에 머물게 하는 등의 도교에 대한 두터운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도교신앙이 뚜렷이 나타나는 것은 고려시대에 들어서부터라고 하겠다. 이능화(李能和)는 고려시대의
팔관회(八關會)를 비롯하여 인종이 서경(西京)에 일으킨 팔성당(八聖堂) 같은 것도 불 · 도 양교가 서로 얽혀진 종교라고 단정하고
있다.[註3] 이와 같은 단정은 그 근거가 뚜렷하지 않았지만 송 휘종(徽宗)의 대관년간(大觀年間:1107∼1110)에 송이
개경(開京)에 복원관(福源觀)을 세워 도사 10명을 두었다는 것은[註4] 확실히 도교가 고려에 뿌리박게 되었던 것을
뜻하는 것이었다. 예종이 그 2년(1107) 윤8월에 도교의 기도 대상인 천존상을 연경궁(延慶宮) 후원(後苑)인 옥촉정(玉燭亭)에 모시게 하고
3년 5월에는 3품 이상의 관료들을 인솔하여 회경전(會慶殿)에서 호천오방제(昊天五方帝)를 친히 초(醮)한데 이어 15년 6월에는 이
복원궁(福源宮)에서 친히 초하였던 것으로 전하여지고 있다. 초라고 하는 것은 '제사' 또는 '의식'의 뜻에서 뒤에는 주로 도교에서 단(壇)을
세워 기도를 드리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되었다.
고려시대의 도관(道觀)은 이 복원궁 뿐 아니라 신격전(神格殿) · 소전색(燒錢色) ·
구요당(九曜堂) · 대청관(大淸觀) 등 여러 가지의 것이 있었던 것이며 이와 같은 곳에서 백신초(百神醮), 삼계신초(三界神醮),
태일초(太一醮), 북두초(北斗醮), 성변기양초제(星變祈喬醮祭), 본명성숙초(本命星宿醮) 같은 그 이름에 어울리는 다양한 종교의식이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도교의 초제(醮祭)의 축원문은 청색 종이에 붉은 색으로 쓰기에 이것을 '청사(靑詞)'라고 하는 것이나 동문선(東文選)을 비롯하여
고려시대의 문집에 보이는 여러 문인들이 지은 청사의 이름만 살펴보아도 고려시대의 도교가 깊이 정치권력과 관계를 지니며 다양한 발전을 이루고
있었던 것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註5]
특히 공민왕 19년(1370)에는 명 태조
주원장(朱元璋)이 도사 서사호(徐師昊)를 보내어 고려의 수산(首山)과 제산(諸山)의 신, 수수(首水) 및 제수(諸水)의 신에 제사를 지내게
하였던 바 그 까닭은 천하의 황제인 명의 황제가 이미 고려의 왕을 책봉하였으니 그 영토의 산천도 또한 그의 통치권에 들어 간다고 보아 당연히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다는 뜻의 비석을 새겨 회빈문외(會賓門外)에 세웠다는
것이다.[註6] 이러한 일은 도교를 통한 의식면에서의 굴욕적인 자주권의 유린이었다.
유학의 소양이 깊었던 이색(李穡)이
「송서도사사환서(送徐道士使還序)」에서 서사이(徐師異)의 입국과 도교의 공덕을 높이 찬양한 것을 이능화(李能和)는 못마땅하게 여겨
박지원(朴趾源)의 '유자(儒者)로서 지조 없이 아부하는 것'이라는 말을 빌려 혹평한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註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