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지창 칼럼

무속칼럼니스트로 살아 온 10년

愚悟 2009. 10. 8. 13:02

 

1998년 필자가 처음으로 무속 칼럼을 쓴 곳은 가판대에 신문을 판매하는 형식으로 발간된 주간지 <한국민속문화신문>이었다.

 

그 전에 국악신문을 비롯하여 가끔 신문에 글을 기고한 적이 있었지만, 무교의 환경을 바꿔야 한다는 생각과 무교인들의 의식을 바꾸어 주어야 한다는 사명감 같은 것이 있었기 신문사에서 칼럼을 맡아달라고 할 때 망설이지 않고 승낙 할 수 있었다.

 

<한국민속문화신문> 창간호에 쓴 칼럼이 <무속에 기생하는 세 마리 기생충>이었다.

세 마리 기생충은 그 당시 극성을 부리던 언론충, 작가충, 학자충이었다.

그 당시 그 신문사의 전화기가 불이 났다고 한다.

전국에서 무교인들의 격려 전화로 한동안 일을 할 수가 없었다고 하였다.

 

그리고 2000년 <세계무속신문>을 창간되어 그곳에서 편집국장을 맡으면서 본격적으로 칼럼을 쓰게 되었다.

그 당시 주간으로 모셨던 노중평선생님께서 <삼지창칼럼>으로 제목을 하면 어떠냐고 하여 그렇게 사용하게 되었다.

 

그 후 삼지창 칼럼은 잘못된 무교의 풍토와 무교인들의 행태에 대하여 따끔하게 일침을 가함과 동시에, 우리 스스로 반성과 자성을 통하여 무교의 발전을 도모하고자 하였다.

또 무교의 역사와 무교의 행위 속에 숨어있는 의미를 찾는 등 무교는 우리 민족의 정체성이라는 인식을 널리 각인시키고자 하였다.

대표적인 글로는 <무당은 왼쪽으로 돌아야 한다> <무당이 고깔을 써는 이유> <무당 방울의 의미> <부채가 가지는 의미> <뺑덕이 어멈같은 신엄마> <무당내력> <굿의 기원> 등 1000편 가까이 글을 썼다.

이러한 나의 의도는 시대와 맞았는지 <삼지창칼럼>은 대단한 인기였다.

 

그 후 대학교를 비롯한 문화단체의 강의, 신문과 방송 그리고 <굿데이 365> 란 잡지와 무속관련 신문 등 통하여 꾸준히 알렸으며, 포털사이트인 Naver와 Daum에 개인 블로그를 운영하면서 인터넷을 통한 무교 의식개혁과 변화를 도모해 왔다.

 

그 결과 필자의 블로그에 방문하는 분들의 숫자가 하루에 평균 200명은 족히 넘나들었다.

그러다 보니 많은 사람들이 삼지창 칼럼을 즐겨 읽었으며, 퍼다 나르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 필자의 글이 웬만한 무속카페마다 많게는 수십 편 적게는 십여 편 올라가 있다.

 

그러나 아쉽게도 필자의 이름이나 대명인 <삼신할미>로 글이 올라가 있는 것은 극소수로 대부분 그 카페지기의 이름이나 다른 사람이 쓴 글이 되어 올라가 있다.

심지어 <한국무속신문>을 비롯하여 신문이나 잡지 등도 필자에게 동의를 구하지 않고 마음대로 글을 도용한 사례가 수도 없이 많았다.

 

그렇다고 법적으로 다툴 수 도 없는 노릇이라 벙어리 냉가슴 앓는 격이다.

글은 하나 완성하기 위해서는 적게는 1시간, 많게는 3~4시간의 정신적인 노동이 뒤따라야 한다. 아니 학술적인 글은 몇 년을 공부하고 난 뒤 깨우친 글이 될 수도 있다.

내가 쓴 글 중에는 대한민국 무속학자들 중에서 아무도 주장하지 못하고 생각하지 못한 나만의 영역을 이룬 아주 귀중한 글들이 많이 있다.

 

이러한 글들을 신문이나 잡지 등이 대추나무에서 대추 따먹듯 아무렇지 않게 주인의 허락도 없이 따 먹고 있으니 울화가 치밀어 오를 때도 있다.

신문이나 잡지는 분명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사업이다.

분명히 필자의 블로그에 영리를 목적으로 이 글을 사용할 수 없다고 표시 되어 있으나 의식 없는 관계자나 무교인들이 너무 많아 붉은 글씨로 <출처를 밝히지 않는 무단 사용 절대 금지> 문구까지 추가로 적어 두었다.

이렇게까지 하여야 하는 현실이 창피한 노릇이 아닐 수 없다.

 

지금은 너도 나도 칼럼을 쓴다고 한다. 무속카페마다 칼럼 코너가 생겨났다.

바람직한 일이다. 칼럼을 통하여 잘못된 점을 바로잡고 더 발전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자는 취지이니 정말 바람직한 일이다.

그러나 칼럼을 쓰기 위해서는 많은 공부와 노력이 뒤 따라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필자가 무속을 처음 접하게 된 때가 1988년이니 10년 이 지난 후 무교를 이해하고 공부가 어느 정도 된 뒤부터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리고 칼럼을 쓰면서 무속에 관한 공부를 더욱 열심히 하게 되었다.

 

1988년 처음 굿을 접할 때의 느낌은 너무 오랜 전의 경험이라 그때의 느낌을 지금 설명할 수는 없지만 한마디로 굿을 보고 난 뒤 ‘꽂혔다’는 말이 맞는 것 같았다.

그 후 잘 나가던 공무원 철밥통을 5번의 사표를 내고서 겨우 관두고 나왔다.

남들은 미친놈이라고 하였다. 대책도 없이 무작정 관두었으니 더욱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내가 생각하여도 무모하고 미친 짓이었다. 한순간 무속에 꽂혀 안정된 직장을 팽개치고 어렵고 힘든 무속 속으로 뛰어들게 된 것도 나의 운명이라고 생각하지만 지금의 현실을 돌아보면 후회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이것도 나의 운명이라 생각하고 내가 할 수 있을 때까지 무교에 관한 공부와 글을 계속 쓸 것이다.

왜?

내가 가장 좋아하고 가장 잘 쓸 수 있는 분야니까.

그리고 마지막 한 숨을 내 쉴 때 후회하지 않는 선택이었다고, 여한을 남기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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