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문부정
인간이 살아가면서 필연적으로 생사병로는 따르기 마련이라 부고를 받으면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다들 초상난 집을 찾아 고인의 명복을 빌고 상주들을 위로한다.
우리는 전통적으로 결혼이나 회갑, 그리고 초상을 치룰 때 꼭 함께 동참을 하여 같이 기뻐하며 축하해 주었고 또 같이 슬퍼하며 위로해 주었다. 특히 상가 집을 안 간다는 것은 인간이 살아가면서 인간의 도리를 다 하지 못하는 것으로 여겼다.
그런데 무당들은 초상집을 가지 않는다. 즉 초상집에 가면 상문부정이 든다는 것이다. 자기가 죽었을 때 모든 사람들이 상문부정이 낀다고 조문을 오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얼마나 끔직한 일이겠는가?
인간이 평소에 얼마나 올바르게 잘 살았는지는 죽고 난 뒤 문상객의 수를 보면 안다고 한다. 물론 현재는 그 집안의 위세에 따라 문상객들이 몰려다니고 있지만은 그래도 사람이 죽고 난 뒤 문상객의 행렬이 그 사람의 살아생전 삶을 말해 준다.
왜 무교인은 상가 집에 가지를 않는 것일까? 상문이 끼면 상문을 푸는 방법이 있을 것이요 부정한 것들은 신장들이 다 쫓아줄 것인데 그 부정이 겁나서 무조건 상가 집에는 안 간다니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같은 상가 집이라도 돈을 버는 자리거지나 진 지노귀굿은 잘만하고 다닌다.
이 얼마나 이기적이고 못된 관습인가?
물론 무교인 들은 일반인들과 달라서 죽은 이와 대화를 할 수가 있다. 그런 관계로 상가 집을 가면 죽은 이와 대화를 하게 되면 피곤함을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죽은 이와 대화를 한다는 것은 그 자손들에게 지금 죽은 이의 뜻이 무엇이고 어떻게 하여야 한다는 것을 알려 줄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은 일인가.
불교에서는 상가 집 영전 앞에서 천도제를 올리고 기독교에서도 목사와 신도들이 몰려와 천당으로 인도하여 달라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를 드린다.
비록 외래종교지만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인가? 또한 천주교에서도 신자들이 끊임없이 찾아와 죽은 망자와 상주들을 위로하고 천국으로 인도하기를 천주님께 간절히 빈다.
특히 기독교 목사들은 상가 집 영전 앞에서 목이 터져라 죽음에 대하여 설교를 하면서 신도들과 상주들을 감동시키려고 애를 쓰는 모습을 보니 안타깝기까지 하다.
이렇게 초상을 한번 치르고 난 상주들은 그때의 고마움으로 절대 그 종교를 버리지 못할 것이다.
우리 무교인들도 자기 집 신도가 사망하였을 때는 승려나 목사처럼 상가 집을 찾아가 망자의 혼백이 구천을 맴돌지 말고 하늘로 잘 갈 수 있도록 위로하고 좋은 곳으로 안내하여야 할 것이다.
그리고 무교인들은 죽은 망자와 대화를 할 수가 있으니 얼마나 좋은가. 목사처럼 목이 터져라 기를 쓸 필요도 없다.
조용히 앉아 죽은 망자와 대화를 하여 평소에 망자가 하지 못한 이야기나 당부의 말들을 상주들에게 마지막으로 전해주며, 망자와 상주들이 살아생전 못다 풀어 가슴에 맺힌 고리를 마지막 가는 길에 풀 수 있도록 하여 준다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이요 하늘의 이치를 실천하는 일 일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서 무교가 더욱 발전할 수가 있고 무교를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 많아지며 무교가 진정한 민족종교로서 자리를 잡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이렇지 못하다. 상가 집의 소리만 들어도 누가 죽었다는 이야기만 들어도 상문부정이 낀다는 무당이 있는가 하면, 동네에서 초상이 났다면 아예 신당 문을 닫아 버리고 멀리 나갔다 오는 무당도 있으니 이래 가지고는 무슨 무교가 민초들과 함께 살아 온 민족종교라고 할 수가 있는가.
삼신과 칠성이 무속의 근본이다. 삼신은 인간의 생명을 점지하여 태어나게 하고 칠성님은 인간의 수명과 복과 죽음을 관장하는 것이다.
결국 인간이 죽으면 칠성님께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이 죽으면 칠성판에다 일곱 마디로 묶는 것이다.
칠성님이 불러서 칠성으로 돌아가는 길이 죽음이라면 왜 상문부정이 끼는가?
여러 가지로 이해가 안 되는 부분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무교인들은 무조건 상문부정을 겁을 낸다. 재수가 없다는 것이다. 즉 돈벌이가 시원찮아진다는 것인데 사람이 살아가는 도리보다는 돈을 먼저 생각하는 돈만 밝히는 장사꾼이 되어 버렸다.
상을 당한 상주들에게 망자의 못다 한 말을 전해줌으로써 망자의 넋을 위로해 주고 상주들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며 함께 고인의 명복을 빌어주는 것이 무교인들의 임무다.
이런 막중한 임무를 상문부정이라는 얄팍한 말장난으로 초상집을 외면하고 있으니 모든 상가 집에는 불교와 기독교 그리고 천주교가 차지해 버렸다.
이것은 엄밀히 말해서 무교의 영역을 빼앗겨 버린 것이다.
부고를 받고 문상도 가지 않는 무교인들이 훗날 상주들을 만나면 망자가 구천을 맴돌고 괴로워하고 있으니 지노귀굿을 해서 길을 닦아드려야 한다는 등으로 상주들을 괴롭히고 있다.
초상났을 때 망자의 영정 앞에서 무교인의 본분을 다했더라면 하지 말라고 해도 지노귀굿은 하게 될 것이다.
이런 사정 등으로 요즘은 지노귀굿을 보기가 힘이 든다.
상을 당한 지 얼마 되지 않는 사람들이 찾아와도 상문부정이 낀다고 한다.
그러면서 지노귀굿은 하자고 한다. 지노귀굿은 상문부정이 들지 않는 모양이다. 돈의 위력이 상문부정을 쫓아내는 것 같다.
인간이 사회생활을 하면서 죽음이라는 것은 항상 따라 다닌다.
만약 내가 죽었을 때 모든 사람들이 상문부정을 겁내어 아무도 안 온다고 상상을 하여 보라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 그야말로 초상집은, 손님은 없고 강아지나 어슬렁거리는 쓸쓸한 찬바람이 부는 주막집이나 같은 모양일 것이다.
쓸쓸한 초상집이 겁이 나서가 아니라 사람이 사람의 도리를 다하고 갈 수 있게 무교인 들도 상문부정을 떨쳐버리고 상가 집 대문을 박차고 들어갈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할 때 국민들의 가슴 속에 깊숙이 잠자고 있던 무교에 대한 믿음과 진정한 우리민족의 종교라는 것을 다시 일깨워 주리라 믿는다.
또한 상가 집에서 다시 태어난 우리 무교를 국민들은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 볼 것이다.
지난 일요일 무당닷컴 박구원 사장의 부친께서 별세 하셨다는 부고를 받고 문상을 다녀오면서 무교인들의 야속함과 박절함, 그리고 무속 판에서 사는 한사람으로서 쓸쓸함을 느끼고 돌아왔기에 다시 옛글을 들춰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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