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나는 무당이다

머리 정수리의 숨구멍 '문'

愚悟 2011. 9. 2. 12:25

머리 정수리의 숨구멍 '문'
조옥구의 한민족과 漢字 비밀<19>'文'자가 의미하는 '깨달음의 문'
'心'이 자리한 '文'자와 같은 개념의 '窓' '學'... '學'에서 이뤄진 '覺'
 
조옥구

 

④ ‘文’은 머리의 정수리에 있는 숨구멍(頂門)

‘文’자는 주로 ‘문자’ 또는 ‘무늬’라는 의미로 쓰인다. 마치 사람의 모습처럼 생긴데다가 옛 글자는 중앙에 ‘心’이 그려져 있으므로 ‘사람의 몸에 새긴 문신’을 나타낸다고 풀이하곤 한다.

말하자면 ‘문신’을 가지고 ‘문자’라는 용어의 개념으로 쓴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문자’의 위상이나 개념의 위계조차도 고려하지 못한 초보적인 해석이다.

한자를 만들고 의미와 소리를 붙인 사람들의 가치관에 비추어 생각하면 ‘文’자는 그렇게 단순한 글자가 아니다. ‘文’자의 모양이 ‘문신’을 나타내는 것도 아니거니와 사람의 모습을 나타내는 글자도 아니다.

‘文’자의 풀이는 이 글자를 ‘문’이라고 읽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文’자의 내용을 알 수 있는 단서가 ‘문’이라는 우리말에 있기 때문이다.

‘문’이라는 말의 이미지는 우리가 일상에서 열고 닫고 드나드는 ‘출입문’이다. ‘출입문’을 나타내는 한자는 ‘門(문 문)’을 사용하므로 ‘文’을 ‘출입문’과 연결하기가 쉽지는 않겠지만 ‘門’과 ‘文’이 ‘문’이라는 음을 매개로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그렇다면 ‘文’으로 풀이되는 ‘문’은 어떤 문이며 어디에 있는 문인가?

옛 한자를 접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대부분 한자의 기원을 살펴보는 데에는 한계가 있기 마련이지만 ‘文’자는 원래 사람의 머리 와 관계가 있으며 머리의 위 중앙에 있는 ‘숨구멍’을 표시하는 글자다.

이것은 ‘수행(修行)’에 직접 참여해보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조금 이해하기 어려운 이야기이다. 수행을 모르는 일반인으로써 머리의 정수리에 ‘문’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하지만 우리 선인들은 머리의 정수리에 숨구멍이 있다고 생각했으며 이 숨구멍을 ‘정문(頂門)’이라고 불렀다. 머리 ‘정수리에 있는 문’이라는 뜻이다. 머리의 중앙에 나 있는 이 문(頂門)을 통하여 사람의 마음이 하늘과 소통한다고 여겼다.

오늘날에도 단전을 중심으로 진기를 연마하는 전통의 수련법에서는 일정한 경지에 오르면 소위 ‘양신(하단전에 자리 잡은 빛으로 된 도체라고 석문호흡에서는 설명한다)’을 발신하게 되는데 이 양신이 나오는 문이 머리 한 중앙에 있는 소위 ‘정문(頂門, 숨구멍)’이다.

이것이 ‘수행(修行)’이다. 몸속에 보관되어 있는 마음이 머리의 정문을 통하여 하늘과 소통하면서 끊임없이 하늘을 닮아가는 과정을 ‘수행(修行)’이라고 하는 것이다.

‘文’의 옛 글자에 ‘心’이 자리하고 있는 것도 다 수행의 근본이 ‘하늘’을 닮기 위한 ‘마음공부’에 있음을 말해준다고 하겠다.

한편 불교의 개조(開祖)인 석가모니(釋迦牟尼)는, ‘Buddha’라는 이름을 음차한 불(佛), 불타(佛陀), 부도(浮圖), 부도(浮屠), 발타(勃陀), ‘몰타(沒馱) 외에 ‘석가문(釋迦文)’, ‘능인적묵(能仁寂黙)’, 능적(能寂), 능유(能儒), 모니(牟尼), 박가범(薄伽梵)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리고 있는데, 그중에서도 대표적인 호칭이 석가모니(釋迦牟尼)다.

‘석가모니(釋迦牟尼)’란 'Sakyamuni'를 음역한 것으로 ‘석가모니(釋迦牟尼)’의 ‘석가’는 부처님이 태어난 종족의 이름인 ‘샤캬(Sakya)’를 음차한 것이며 ‘모니(muni)’는 ‘존칭’으로 ‘거룩한 어른’, ‘깨우친 이’란 뜻으로 ‘석가모니’는 ‘샤카족에서 나신 거룩한 어른’의 뜻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석가모니(釋迦牟尼)’를 ‘석가문(釋迦文)’으로도 쓰는데, 이것을 통해서 ‘모니(牟尼)’와 ‘muni’와 ‘문(文)’이 ‘거룩한 이’ 또는 ‘깨우친 이’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석가모니(釋迦牟尼)’라는 부처님의 이름에서 ‘文’자와 관련된 의미들이 발견된다고 하는 것은 ‘文’자가 내포하고 있는 ‘깨달음’의 의미를 더욱 깊게 해준다고 하겠다.

‘文’자가 머리의 정문 즉 ‘깨달음의 문’을 의미하는 것이 사실이라면 ‘文’자와 결합하여 만들어지는 ‘文字’라는 용어나 ‘文’자로 상징되는 모든 기호들도 역시 그러한 정신적 철학적 기능을 고려하지 않으면 안된다.

‘ㄱ,ㄴ,ㄷ,ㄹ,ㅁ,ㅂ,ㅅ,ㅇ,ㅈ,ㅊ,ㅌ,ㅋ,ㅍ,ㅎ’이나 ‘一,丨,丶,丿,乀,乙,亅, 二, 亠’ 등을 통틀어 ‘文字’라고 부르는데 이들 기호의 탄생 배경이 ‘文’자의 경우와 같을 수 도 있기 때문이다.

문자를 만든 이들이 수행을 통하여 새로운 차원을 경험한 사람들이었다면 문자의 이해 또한 그런 차원이 고려되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문자는 곧 깨달음으로 통하는 문이다. 따라서 문자를 배우면서 깨달음이 없다는 것은 문자의 풀이가 잘못되었다는 말이다.

사물의 인식은 개념의 정의로부터 시작되며 문자는 진리나 학문의 세계로 통하는 문이다. 이것이 전제되지 않은 지식은 허구다. 이 문을 통해서 진리, 자연, 우주, 학문에 대한 깨달음을 얻지 못했다면 그 문자는 진정한 문자가 아니다.

한문의 경우는 더욱 분명하다.

그래서 ‘한자에는 깨달음이 있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⑤ ‘窓’자의 ‘心’은 ‘本心本太陽(본심본태양)’의 ‘心’

‘창(窓)’이란 허공을 향해 열려진 문을 말한다.

중앙의 ‘厶’와 ‘心’은 ‘총(悤, 바쁠 총)’이 변한 것으로 ‘厶=囟’, ‘心=心’의 관계이며, ‘厶(사사 사)’자는 ‘囟(정수리 신)’자가 변한 것이다. (窗자는 窓의 本字)

그리고 이 ‘囟’자의 쓰임이 ‘腦’자에 드러나 있다.

사람의 머리를 나타내는 ‘腦(뇌 뇌)’자를 보면 ‘月(달 월)’과 ‘巛’과 ‘囟(정수리 신)’으로 되어 있는데, ‘月’은 ‘몸’ 즉 ‘육신’을 나타내고 ‘巛’은 뇌가 하늘과 관계되어 있음을 나타내는 기호이며 ‘囟’은 뇌를 감싸고 있는 머리의 모양이며 기능을 나타낸다.

‘心(마음 심)’자는 지금은 생략된 ‘文’의 옛 글자의 중앙에 담겨 있는 ‘心’자다. 따라서 ‘文’자의 옛 글자에서 중앙에 그려진 ‘心’자의 의미를 읽어내지 못하면 ‘窓’자에서 ‘心’의 의미를 읽어낼 수 없다.

도대체 ‘창(窓)’에 ‘마음(心)’이 필요한 까닭이 무엇인가? ‘창문’과 뇌의 작용을 의미하는 ‘囟(정수리 신), 悤(바쁠 총), 窗’자는 무슨 관련이 있는 것일까?

‘窓’자는 근본적으로 ‘文’자와 개념이 같다. ‘窓’에 들어있는 ‘心’자는 ‘文’자에 들어있는 ‘心’자로부터 기원한다.

이것은 본래 ‘문’이라는 개념이 ‘文’으로부터 기원하였으며 ‘文’을 통해 ‘心(마음)’이 출입하였다는 내력 때문에 ‘窓’자를 만들면서도 ‘文’자에 들어있는 ‘心’을 표시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결국 ‘囟’자는 ‘文’자와 같은 글자인데 아무래도 ‘囟’자 만으로는 허공에 난 ‘창’과 연결하기가 어려웠던 모양이다. ‘구멍’의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 ‘穴(구멍 혈)’을 추가 하여 ‘窗’자를 만들었다.

⑥ ‘學’자는 ‘文’자와 근본이 같다

‘學’자의 약자에 ‘斈’이 있다. 사전에는 ‘學’의 약자(略字)라고만 되어 있을 뿐 더 이상의 풀이가 없다.

‘學’자의 윗부분을 어떻게 ‘文’으로 줄여 쓸 수가 있는 것일까?

옛 사람들의 의중을 알 수 없다고 해서 우리 식으로 생각할 수 는 없다. 누군가 그렇게 썼다면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결론을 먼저 말하면 두 글자 모두 사람의 머리를 나타내는 ‘囟(정수리 신)’에서 기원하였다. 그래서 두 글자는 기원이 같다.

‘文’자가 사람의 머리위에 있는 숨구멍(頂門)에서 기원한 것처럼 ‘學’이나 ‘覺’자의 윗부분 역시 사람의 머리에서 기원하였다.

하나의 기원에서 두개의 글자로 나뉜 것이기 때문에 ‘文‘’자와 ‘學’, ‘覺’자의 윗부분은 모양은 조금 다르다 하더라도 근본 내용은 서로 같다. ‘學’자를 ‘斈’으로 나타낼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런 배경 때문이다.

그렇다면 한자어 ‘學’자에는 ‘배우다’의 의미가 어떻게 정의되어 있을까?

‘배우다’의 사전적 의미는 ‘새로운 지식이나 교양을 얻다’, ‘새로운 기술을 익히다’, ‘남의 장점을 따라 익히다’ 등으로 되어 있다.

한자를 40년 연구했다는 김 모 교수는, 「‘아이(子)’들은 무지에 덮여(冖) 머리가 텅 비어(臼)있으므로 이것저것(爻)을 집어넣는 것이 ‘배우다’라는 뜻」이라고 ‘學’자를 풀이하고 있다.

그러나 ‘學’자는 그렇게 풀이하는 엉터리 글자가 아니다.

‘學’자에서 ‘子’의 윗부분이 ‘文’자와 같다는 것은 ‘學’자 역시 ‘깨달음’, ‘수행’과 관련이 있다는 의미다.

‘文’자는 깨달음으로 통하는 문이기 때문이다. 몸속에 있는 마음(心)이 하늘과 하나가 되기 위해 열심히 출입하는 문(출입문, 통로)이며, 이 출입이 바르게 지속되면 어느덧 하나의 열매를 맺게 되는데 그 열매를 의미하는 글자가 ‘子’자다.

따라서 ‘學’자는 ‘명상과도 같은 수행을 통하여 심신을 연마한 결과 거둔 결실’을 의미한다.

단순히 새로운 사실을 알고 익히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배움’에 대한 이해가 ‘지식의 전달’을 위주로 하는 것이라면 ‘學’자의 ‘배움’은 ‘마음의 수련’을 위주로 하고 있으며, 지금의 배움이 단순히 ‘배우는’는 과정 위주라 한다면 ‘學’가 의미하는 배움은 마음수행의 결과로 얻어지는 열매까지 포함하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열심히 배우기만 하고 거두는 것이 없다면, 맺는 것이 없다면, 변화된 것이 없다면 그건 바른 ‘學’이 아니다. ‘배움’이란 결과로 얻어지는 열매(子)까지를 포함하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⑦ ‘覺’은 ‘學’에서 이루어진다.

‘覺(깨달을 각)’자는 외견상 ‘學’자와 모양이 비슷하다. ‘學’자의 ‘子’ 대신 ‘見’이 들어가 있는 점이 다르기는 하지만, 모양이 같다는 것은 일부분 그 내용이 같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두 글자는 모두 ‘마음’과 ‘머리’의 작용을 통한 ‘배움(깨달음)’과 관계가 있다는 공통점이 있으며 차이라면 ‘子’와 ‘見’으로 표현되는 의미의 차이다.

배웠다고 해서 모두 깨닫는 것은 아니라는 차이가 ‘子’와 ‘見’의 차이다.

‘學’자의 ‘子’는 심신의 수행으로 얻어지는 포괄적인 열매(변화)를 의미하며 ‘覺’자의 ‘見’은 ‘심신의 수행을 통하여 얻어진 안목’을 의미한다.

‘子’가 일차원의 변화를 의미한다면 ‘見’은 이차원의 변화까지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조옥구 한자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