無’자 모르면 ‘만수무강(萬壽無疆)’에 지장
조옥구의 한민족과 漢字 비밀<20> 제3장 어휘로 보는 한자
‘無’자는 ‘없다’라는 의미 이전에 원래 ‘무리’, ‘떼’를 나타내는 말
1. ‘無’자를 모르면 ‘만수무강(萬壽無疆)’에 지장이 있다.
의례상 손윗 어른에게 드리는 인사말로 흔히 쓰이는 말 중에 ‘만수무강하십시요’라는 말이 있다.
생활용어로는 왠지 어색하기만 하여 이제는 사극 중에서나 편히 들을 수 있는 용어가 된 ‘萬壽無疆’은 뜻밖에도 한자에 관한 우리의 지식의 한계를 일깨우는데 좋은 소재가 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만수무강’의 뜻을 모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만큼 귀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막상 ‘만수무강’을 한자인 ‘萬壽無疆’으로 써놓고 풀이를 하려면 당황하지 않을 수 없다. ‘萬壽’는 알겠는데 ‘無疆’은?
그러면 이제 ‘만수무강’의 뜻을 구체적으로 풀이해 보자.
‘만수무강(萬壽無疆)’은 ‘萬壽’와 ‘無疆’ 두 개의 문장이 결합된 것으로 ‘萬壽’는 ‘오래오래 수를 누리다’, ‘할아버지 할머니! 오래 오래 사세요’라는 뜻을 나타낸다.
그렇다면 ‘無疆’은 어떻게 풀어야 할까?
‘無疆’은 ‘아무 탈없이’라고 풀이하는 것이 보통이므로 ‘疆’자가 ‘탈’의 의미를 나타내야 하는데 ‘疆’자는 ‘강역(疆域)’이라는 쓰임처럼 주권이 미치는 ‘영토’, ‘땅’, ‘한계’ 등을 나타내는 말이지 ‘탈’이라는 의미와는 상관이 없는 말이다.
그리고 이때의 ‘疆’이 의미하는 것은 옛날 나라에 벼슬하는 대가로 받은 ‘땅’ 즉 ‘식읍(食邑)이다. 요즈음으로 말하는 월급, 연봉과 같은 개념의 수입을 의미한다.
따라서 단순히 ‘영토’라는 개념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수입’ 또는 ‘재력’, ‘재산’의 의미로 쓰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無疆’의 풀이에서 겪는 어려움은 ‘疆’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비교적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無’자의 의미에 있다.
지금의 ‘無’자에 대한 이해만으로는 ‘無疆’을 풀이할 수가 없다.
‘無’자는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없다’라는 의미 이전에 원래는 ‘무리’, ‘떼’를 나타내는 말이었다.
마치 우두머리가 그를 따르는 많은 무리들을 거느리고 있는 것처럼 ‘無’자는 햇살과 햇살이 거느리는 많은 무리들의 모습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런 개념을 더욱 분명하게 나타내주는 것이 ‘霧(안개 무)’자다.
안개를 나타내는 한자에 ‘霧(안개 무)’가 있는데 이것은 ‘霧’와 ‘無’가 본래 우리말 ‘무’의 의미를 나타내는 같은 개념의 글자라는 것을 말해준다.
무수한 작은 물방울이 자욱하게 모인 자연현상을 ‘안개’라고 하는데, 이것은 물방울 자체를 해의 미세한 조각 즉 ‘해→햇살→안개’로 변화하는 과정으로 보고 작은 물방울을 ‘햇살이 거느린 무리들’로 인식한 것이다.
‘안개’를 ‘무’라고 하는 것처럼 ‘무’라는 말은 ‘많은 무리’를 나타낸다. 그래서 해의 둘레 또는 달의 둘레에 부옇게 띠를 이루고 있는 것을 ‘해무리’나 ‘달무리’라고 하는 것이다.
따라서 ‘無疆’은 ‘먹고 입고 사는 것이 넉넉하게’라고 풀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내용을 토대로 ‘만수무강’을 풀이하면 ‘넉넉하게 오래오래 사세요’라는 뜻이다.
‘無’자를 본래의 의미로 풀어야 한다는 것은 ‘만수무강’이라는 용어의 기원이 실로 동양문명의 초기로 거슬러 올라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無’자는 ‘무리’, ‘떼’, ‘많다’와는 관계가 없는 ‘없다’라는 의미를 나타내게 된 것일까?
‘無’의 의미
천자문(千字文)식 한자학습법으로 보면 ‘無’자는 ‘없다’라는 의미를 나타내며 ‘무’라고 발음한다.
따라서 이들로부터 우리는 ‘없다’는 말과 ‘무’라는 말이 관련이 있으며 ‘無’라는 모양과도 무언가 상호 연결된 고리가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가 있다.
그러나 ‘無’자의 ‘모양’이나 ‘소리’로부터는 왜 이 글자를 ‘없다’라는 의미로 쓰는지, 왜 ‘무’라고 발음하는지 현재로써는 그 단서를 얻어낼 만 한 방법이 없다.
그것들을 알 수만 있다면 하나의 문자가 갖는 전체적인 개념의 이해가 용이해지므로 결과적으로 우리들의 문자생활도 훨씬 쉬어지고 편리해질 것이지만 아직은 희망에 속하는 일일 뿐이다.
‘無’자의 ‘모양’과 ‘없다’라는 의미와 ‘무’라는 음의 관계를 알아보기 위해 ‘無’자의 옛 모양을 살펴보아도 ‘세 개의 화살 모양’을 확인 할 수 있을 뿐 아리송하기는 마찬가지다.
‘없다’라는 뜻을 나타내는데 쓰인 ‘화살’의 의미는 무엇일까?
세 개의 화살로 나타내려한 것은 무엇일까?
우선 ‘세 개의 화살’이 의미하는 것으로부터 ‘셋’이라는 숫자와 ‘화살’이라는 도구의 상징성을 고려해볼 수 있다.
과연 ‘화살’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리고 ‘셋’이 의미하는 것은 ?
수수께끼 같은 ‘세 개의 화살’의 비밀을 풀기위해서 한자가 만들어지던 당시 고대인들의 생각 속으로 먼 여행을 떠나 보자.
여행의 동행은 ‘衆(무리 중)’자다.
무리지어 있는 많은 사람들을 일컫는 말이 ‘군중(群衆)’인데, ‘群’이나 ‘衆’은 모두 ‘무리’를 나타내는 것으로, ‘衆’자는 원래 ‘∴’과 ‘눈’의 모양이 결합하여 만들어 졌다.
‘∴’은 ‘셋’, ‘세 번째’를 의미하고 ‘눈’은 ‘臣’ 즉 ‘신하’를 의미한다.
‘衆’자는 이처럼 ‘세 번째 신하’를 나타내는 글자에서 기원한 것으로, 옛날 어느 임금이 자신의 셋째 아들을 재상으로 임명하면서 자기를 대신해서 ‘백성을 보살피는 눈’이 되라는 뜻에서 만들어준 이름자에서 비롯되었다.
‘셋’의 의미는 셋 째 아들의 표시이고 ‘눈’은 ‘임금의 눈을 대신하여 백성을 보살피는 관리’라는 의미에서 ‘신하’를 나타내는 의미로 쓰였던 것이다.
그런데 여전히 남는 문제는 ‘셋’을 나타내는 ‘衆’자가 어떻게 ‘무리’, ‘떼’라는 의미를 나타내게 되었는가에 있다.
이것을 알기 위해서는 불가불 당시인들의 사유방식을 이해하지 않으면 안된다.
한자를 만든 주체들은 ‘일즉다 다즉일(一則多 多則一)’, ‘일석삼극 무진본(一析三極 無盡本)’, ‘회삼귀일(會三歸一)’, ‘집일함삼(執一含三)’ 등의 용어로 풀이되는 ‘하나와 여럿’, ‘하나와 셋’ 그리고 ‘셋과 여럿’의 관계와 의미에 대해서 충분히 익숙한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이런 사고의 바탕에는 ‘천지인(天地人)’이라는 세 가지 요소 즉 ‘삼재(三才)’가 자리 잡고 있다.
‘천지인’이란 ‘하늘과 땅과 만물’을 함축하여 일컫는 말로써 온 세상을 감싸고 있는 제일 원인인 ‘하늘’과 그 하늘에 짝하는 존재로써의 ‘땅’ 그리고 하늘이 있으므로써 존재하는 땅과 그 땅에 뿌리 내리고 삶을 영위하는 모든 ‘존재’를 한꺼번에 일컫는 말이다.
하늘이 있음으로써 땅이 있다고 여겼으므로 ‘땅’은 ‘두 번째 하늘’인 셈이며 하늘과 땅이 있음으로써 삼라만상이 있다고 여겼으므로 ‘삼라만상’은 ‘세 번째 하늘’로 여겼다.
이런 사고가 반영되어 만들어진 한자가 ‘一, 二, 三, 亖,...十’이다.
‘一’과 ‘二’와 ‘三’과 ‘亖’는 근본 모양은 ‘一’로써 같으나 개수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것이야말로 ‘천지인’적 사고가 없이는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다.
따라서 ‘一, 二, 三, 亖,...十’이라는 숫자개념을 만들어낸 주체들이 누구인지도 저절로 알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런 기본적인 사고의 틀 안에서 보면 자연스럽게 ‘세상만물’은 곧 ‘세 번째’ 존재가 되는 것이며 ‘셋은 곧 여럿’으로 인식되는 것이다.
동양적 사유의 특징으로 되어 있는 ‘하나’와 ‘셋’과 ‘여럿’의 관계 속에는 이처럼 한겨레의 선조들의 사유의 습관이 바탕이 되어 있다.
이것이 ‘세 번째 신하’가 내용인 ‘衆’자를 ‘무리’로 인식하는 까닭이다.
이제 ‘衆’자와 관련된 철학적 바탕을 염두에 두고 본론의 한자인 ‘無’자로 돌아가 보자.
‘無’자가 ‘세 개의 화살’로 되어 있다는 것은 앞서 말한바와 같다.
‘셋’이란 숫자는 역시 ‘衆’자에서 말한 ‘셋’과 같은 의미로 ‘여럿’이며 삼라만상을 통틀어 일컫는 ‘인(人)’으로 지칭되는 말이다.
그렇다면 남은 문제는 ‘화살’의 의미인데 ‘활’ 또는 ‘화살’의 상징성은 ‘불이 활활 타오른다’라고 할 때의 ‘활’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활’의 본래의 용도가 ‘사냥’ 또는 ‘싸움’을 위한 도구로써가 아니라 불을 일으키는 도구로써 ‘활비비’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로부터 미루어 생각하면 ‘활’은 ‘불’의 근원이다. ‘활’로부터 ‘불’이 나오기 때문이다.
이런 논리를 전개하다보면 결국 불의 근원이 하늘에 있는 해(태양)이므로 ‘활’은 결국 ‘해(태양)’를 상징하는 도구, 조형물이 된다.
불을 일으키는 도구인 활이 전쟁의 도구나 사냥의 무기로 사용되는 것은 활이 가지는 바탕의미 즉 ‘하늘’의 상징성에서 비롯된다.
하늘은 조화와 사랑, 생명과 창조와 정의(正義)가 본질이므로 불의 또는 거짓과는 양립(兩立)할 수 없는 것이다. 활을 전장의 무기로 쓰는 것은 거짓과 불의를 응징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것과 관련해서는 고대 조선(朝鮮)에서 불리었다는 ‘어아가(於阿歌)’가 전해온다.
[어아가(於阿歌)]
어아 어아 우리 성조
그윽한 은덕 배달나라
어아 어아 우리 모두
영원토록 잊지마세
선한 마음 큰 활 되고,
악한 마음 과녁일세.
온 겨레는 큰 화살 시위같이
바른 마음은 화살같이
어아 어아 우리 온 겨레
큰 활 되어 과녁을 뚫세
악한마음은 끓는 물에
떨어지는 한덩이 눈
어아 어아 우리겨레
활같이 굳은 마음
화살같이 곧은 마음
큰 은덕내시는 거룩한
우리성조
거룩한 우리성조
‘어아가’에는 ‘활’과 ‘화살’을 ‘선한 마음’, ‘바른 마음’의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 사실은 앞서 ‘身’자를 풀이하면서 설명한 바와 같이 ‘身’자는 ‘활과 화살’의 모양을 이용하여 만든 글자이므로 ‘활과 화살’의 관계를 사람의 ‘마음’과 ‘몸’의 관계에 적용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밖에도 夷(근본 이), 侯(과녁 후), 疾(병 질), 至(이를 지), 族(겨레 족) 등 수많은 한자들이 활과 화살의 관계를 이용하여 만들어지는데, 이런 사례들을 통해서 한자를 만든 주인공들은 ‘해와 햇살’, ‘활과 화살’ 그리고 ‘마음과 몸’의 관계에 익숙한 사람들로써 이들 간의 상징성을 활용하여 문자를 만들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상의 한자들에 사용된 상징들을 종합해보면, ‘활과 화살’은 ‘해와 햇살’을 나타내며 우주 공간에서의 ‘해와 햇살’은 사람에게 있어서는 ‘마음과 몸’을 나타내기도 하므로 결국 활과 해와 마음 그리고 화살과 햇살과 몸(살)은 서로 동일한 속성을 나타내는 상징코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상의 설명으로부터 우리는 ‘無’자를 구성하고 있는 ‘세 개의 화살’이 ‘여럿’, ‘무리’를 상징한다는 사실에 대해서 초보적으로나마 이해하게 되었다.
그렇다. ‘無’자는 원래 ‘무리’, ‘떼’를 나타내는 글자였다. 해나 달의 둘레에 둥그렇게 나타나는 둥근 테를 ‘해무리’, ‘달무리’라고 부르는데 이 무리와 같이 빙 둘러쌓고 있는 ‘무리들’의 뜻을 나타낸다.
이런 사실 때문에 ‘無’자를 ‘무’라는 음으로 부르고 또 ‘안개’를 나타내는 한자인 ‘霧’자를 ‘안개 무’라고 하여 같은 ‘무’라는 음으로 부르는 것이다.
안개는 셀 수 없이 많은 작은 물방울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기억하면 ‘무’라는 우리말의 원래의 뜻이 ‘무리’와 같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의미를 알게 되면 비로소 천부경(天符經)의 첫머리에 등장하는 ‘일시무시일(一始無始一)과 오랜 전통을 가진 ‘만수무강(萬壽無疆)’이라는 덕담의 바른 의미를 알 수 있게 된다.
사실이 이러한데도 오늘날 ‘無’자는 단순화되어 ‘없다’라는 뜻으로만 쓰인다.
‘무리’와 ‘없다’라는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빛이 없는 깜깜한 어둠을 생각하면 이해하기가 쉽다.
하루를 달려온 해가 서쪽으로 지고나면 세상은 점점 어둠에 빠져든다. 별빛도 비치지 않고 구름이라도 잔뜩 낀 밤이면 세상은 온통 칠흑 같은 어둠에 휩싸이게 되는데, 어둠 속에서 우리는 아무것도 볼 수가 없다. 어둠의 알갱이가 너무 많아 빛을 감추어 버린 상태를 나타내는 글자가 ‘無’자다.
‘無’자로 표현되는 ‘없음’의 기준이 ‘빛’이기 때문에 ‘無’자의 ‘없다’라는 의미는 곧 ‘보이지 않음’의 의미인 것이다.
그러나 이윽고 동이 트고 아침이 오면 어둠 속에서 하나씩 둘씩 만상이 그 자태를 드러내게 되는데 이들은 어둠으로 인해 보이지 않았을 뿐이지 거기 그렇게 자기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던 것들이 분명하다.
이것이 ‘無’자의 ‘무리’라는 의미이다.
그러니까 ‘無’자가 나타내는 ‘없다’라는 개념은 ‘보이지 않는 현상’에 속한 개념이며 ‘없다’라는 말 자체가 완전 부정이 아니라 ‘있기는 하지만 (보이지 않으므로) 현재는 없다’라고 하는 것이다.
어둠이 짙어지면 육안으로는 사물을 볼 수는 없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사물이 없다고는 할 수 없다. 날이 새면 세상을 가득 채우고 있는 수많은 사물들이 드러날 것이다.
이처럼 ‘無’자는 원래 ‘무수히 많음’과 ‘없음’을 동시에 나타내는 한자였다.
선문답이나 참선에서 화두(話頭)로 빈번하게 거론되는 것도 이렇듯 ‘있음’과 ‘없음’의 세계에 모두 걸쳐 있는 ‘無’자의 모호한 성격 때문이다.
철학박사이며 신학자이신 김상일 박사(한신대 교수 역임)께서『한사상』(온누리국학총서5. 1986. 8. 온누리출판사 펴냄)에 동일한 주제에 대하여 서술하신 바가 있으므로 이를 인용하여 소개하고자 한다.
「‘무’라는 것이 무엇이냐고 질문한다면 그 대답은 ‘하나(One)와 많음(Many)의 조화’라고 할 수 있다. ‘하나’는 ‘많음’이 되고 ‘많음’이 ‘하나’가 되는 자리가 바로 ‘무(Emptiness)’이다.」『한사상』(온누리국학총서5. 1986. 8. 온누리출판사 펴냄)에서 인용. [조옥구 한자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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