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속 이야기

제천의식과 굿의 역사

愚悟 2012. 4. 5. 14:38

 

제천의식과 굿의 역사

 

한웅천왕이 하늘에서 내려왔어 가장 먼저 시행한 것이 태백산에 신시神市를 여는 것이었다.

신시는 마고삼신의 뜻을 받들어 하늘에 제사를 드리며 민족의 동질성을 확인하고 하늘의 가르침을 전하던 신성시한 곳으로 배달나라를 선포한 곳이기도 하다.

그리고 한웅천왕은 하늘의 가르침을 진교眞敎라고 명하였다.

진교란 참 가르침이라고도 하는데 하늘의 가르침을 일컫는 말이다.

 

그리고 한웅천왕의 뒤를 이어 조선국을 세운 단군왕검 역시 덕교德敎라고 하여 하늘의 가르침을 백성들에게 깨우치게 하였다.

이때 하늘의 소리를 정리하여 가름침의 근본으로 삼은 것이 천부경과 삼일신고라는 경전으로써 인류최초의 경전이다.

이 천부경과 삼일신고 두 경전은 지금 존재하는 모든 종교들이 그들의 사상과 철학을 담은 교리를 만드는데 기초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한웅천왕과 단군왕검은 신격을 가진 인간으로서 무당이었으며,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신라에서는 무당을 나타내는 차차웅이란 칭호가 왕을 상징하는 호칭으로 사용되었는데 차차웅이란 한웅천왕에서 비롯되었다.

그리고 상고시대에 무당들은 요천繞天이라는 의식으로 더욱 자신들의 지위를 공공이 하였다. 요천이란 멀리 지나간 일을 되새겨서 근본에 보답함은 곧 금생今生을 거듭하여 뒤에까지 계속하여 보전코자 하는 가르침이라 했다.

 

고구려에는 사무(생령을 몸에 실어 예언을 하는 사람)라는 무당의 칭호가 있었으며, 이들이 동맹이란 제천의식을 주관하였다.

<위지/고구려전>에 왕도王都 동쪽에 수혈隧穴이 있어 10월에 국중대회를 열고 수신隧神을 제사지내며 목수를 신좌에 모신다고 기록되어 있다. 즉 수신은 주몽의 어머니며, 목수는 곡식을 의미하였다.

 

또한 마한에서는 천군을 두어 소도에 머물면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도록 전국 각 읍마다 1명씩 두어 제천의식만 주관토록 했다.

백제도 역시 마한과 마찬가지로 소도에서 북과 방울을 단 큰 나무를 세우고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북과 방울을 매단 나무는 지금의 솟대로 발전하였다.

 

이 솟대를 부르는 명칭이 지방마다 조금씩 다르다.

전라도에서 소주·소줏대, 함흥지방엔 솔대, 황해 평안 지방에는 솟댁, 강원 지방에는 솔대, 경상도 해안 지방에서는 별신대라 한다.

또한 백제는 소도에서 제사지낼 제주를 천군이라고 하여 매년 선발하였다고 하니 오늘날 도당굿을 할 때 화주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예는 단군왕검 시절부터 행하여 온 제천의식인 무천舞天을 매년 10월에 지냈으며, 가락은

계락이란 제천행사가 있었으며 이 계락이 계면조를 시발점이며 국악음계의 기초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부여는 영고라는 제천의식이 있었으니, 이러한 제천의식을 요천의식繞天儀式이라 하는데, 모두 단군신교의 유풍과 예속이 아닌 것이 없으며, 이것은 무축신사巫祝神祠, 즉 무당이 신께 제사를 드리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을 정리하면 예맥의 무천舞天, 부여의 영고迎鼓, 고구려의 동맹東盟, 마한의 소도蘇塗라는 제사의식이다.

이것들을 종합하면 소도라는 신성한 곳에서 동쪽에 떠오르는 해와 달을 향하여 재물을 바치고 북을 치며 그 장단에 맞춰 하늘을 향해 춤을 추면서 뜨는 해와 달을 맞이하는 의식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이것이 오늘날 굿의 기원이며 지금도 무당들이 행하고 있는 일월맞이 굿이다.

 

이러한 제천의식이 추수감사제의 성격을 띠면서 각 마을마다 행하여져 온 것이 지금의 도당굿 또는 부군당굿이다.

이 마을굿은 화해동참和解同參 해원상생解寃相生으로 압축할 수 있는데, 굿을 통하여 이웃 간의 반목과 오해를 불식시키고, 굿판에서 어우러져 신나게 놀면서 그동안 맺힌 감정을 풀어내고 개인을 물론 마을의 발전을 기원하는 것이다.

 

그 후 유교와 불교 그리고 도교가 들어옴에 신교인 무교는 서서히 밀려나기 시작했다.

유교에는 길흉吉凶의 예가 있고, 불가에는 분수焚修(분향하면서 도를 닦음)의 법이 있고, 도가에는 초제醮祭(성신에게 지내는 제사. 성신 제)의 의식이 있다.

이러한 외래종교의 의식들이 우리의 제천의식인 무교를 습합하고, 한편으론 조직과 경전을 앞세워 세력을 확장해 나감으로써 우리 신교인 무교는 사회적 배척과 외면을 당하게 되었다.

 

이렇게 무시당하고 폄하되고 배척당한지 어연 천년 세월이 넘었다고 볼 수 있다.

오랜 세월 배워온 잘못된 가르침과 풍습을 하루아침에 바꿀 수는 없지만, 무교가 우리 민족의 정체성이며 심성을 나타내는 민족종교라는 것을 지금부터라도 널리 알려야 한다.

그리하여 무교가 다시 민족정신의 구심점이 될 수 있는 민족종교로 자리 잡기 위해서는 무교가 민족종교라는 것을 무교인이 먼저 인식하고 민족종교의 사제로서의 덕목들을 하나씩 갖춰나가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교의 사상과 철학을 정립하고 무교의 우수성을 정립할 수 있는 종교학자의 양성과 무교인 교육이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것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전 무교인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강력한 리더를 갖춘 무교단체가 반드시 필요하지만 작금의 현실을 그렇지 못하니 안타까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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