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양굿의 가망이 가지는 의미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는 무당내력에 그려진 감응청배 그림>
한양굿에서 가망은 죽은 조상을 의미하는 것으로 알고 그렇게 행하고 있다.
또 시왕가망은 죽은 조상이 열시왕 즉, 십대왕 앞으로 간 조상을 이야기 한다.
이렇게 한양굿에서 가망이 죽은 조상이 되어 나타나게 된 것은 언제부터인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는 난곡의 <무당내력>을 중심으로 다시 살펴보기로 하자.
<무당내력>은 아호가 난곡이란 선비가 그림과 간단한 글로 기록한 무당내력은 1825년 혹은 1885년 쯤 기록한 것으로 해석되고 있으니 예전 굿거리에 대한 기록이 전무한 것을 생각한다면 아주 귀중한 자료로 한양굿을 연구하는데 절대적인 참고가 되는 중요한 기록임에 틀림없다.
<무당내력>에선 다른 굿거리는 모두 거리로 표현하였지만 감응感應거리는 ‘감응청배’라고 기록 하였다.
그림을 살펴보면 상단에는 전물상을 그려 놓았는데, 전물상에는 촛대 두 개와 옥수 석잔, 그리고 향로 한 개가 있을 뿐 다른 굿거리와 다르게 아무런 음식을 올리지 않았다.
왜 감응청배에서는 아무런 음식을 올리지 않는지 설명이 없어 알 길이 없다.
그리고 전물상 앞에서 무녀가 춤을 추는 모습을 그려놓았는데, 남치마에 초록두루마기를 입고 양손에 소지를 들고 있는 전물상을 등지고 춤을 추는 모습이다.
그리고 한자로 간단하게 기록한 것을 해석하면,
「감응청배, 속칭 산바리기, 치성을 할 때 무녀는 태백산을 바라보고 성령감응을 세 번 부르는데 이를 단군청배라고 한다. 근일에는 풍덕 덕물산을 바라보고 최장군을 청배한다고 하는데 진실을 크게 잃은 것이다.」
이러한 설명으로 보아 조선시대의 감응청배는 원래 태백산 산신인 단군왕검을 모시는 굿거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삼국유사> 등 고문서를 보면 태백산에 하강하여 신단수에 신시를 열고 나라를 세운 분은 한웅천왕이시다. 한웅천왕과 웅녀 사이에 태어난 신인이 바로 단군왕검이다.
또 <단군세기>의 기록을 보면 단군조선의 마지막 47대 고열가 단군께서 산으로 들어가 산신이 되셨다는 기록이 있다.
그렇다면 감응청배는 처음으로 국가를 세우고 제왕이 되어 나라를 다스린 개국의 시조인 한웅천왕 또는 단군왕검을 모시는 거리라고 봐야 한다.
<무당내력>에 기록된 굿거리 순서에서 부정거리 다음으로 가장 먼저 하는 굿거리로 감응청배가 기록된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 아닐까 한다.
<무당내력>이란 책에는 가망이란 용어는 찾아 볼 수 없는데도 불구하고 지금은 가망이라고 통용되고 있으니, 아마 감응이란 말이 구전으로 전해지다 보니 가망으로 변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러다 감흥이 가망이 되고 한자도 가정에 죽은 망자란 뜻인‘가망家亡’이라 쓰면서 한양굿에서는 죽은 조상을 의미하는 말로 변하였다고 생각한다.
감응거리는 한양 굿뿐만 아니라 황해도 굿에서도 아주 중요하고 큰거리로 친다.
감응신령님이 행차하실 때는 거창하게 용마를 타고 일산 양산을 받쳐 들고 거창하게 행차하신다.
또 굿상 제일 가운데 단을 한단 높여 ‘감응당’이라고 하여 따로 음식을 차린다.
이런 것을 보면 감응청배 즉, 감응거리는 바로 한웅천왕이나 단군왕검을 모시는 거리였다는 것을 다시 확인 할 수 있다.
그 이유는 우리의 역사가 바로 삼신과 한인천제, 그리고 한웅천왕을 이어서 단군왕검으로 이어졌으며, 그와 마찬가지로 무교가 신교를 이어서 본격적으로 자생한 것은 단군왕검 때부터였다고 보기 때문일 것이다.
또 한양굿에서는 산거리가 따로 없다. 상산노래가락이 있지만 내용을 살펴보면 장군님을 많이 들먹이는 것으로 봐서 산신을 모시는 노랫가락이라고 볼 수 없다.
우리 무교에서 굿을 할 때 산신을 모시지 않는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렇다면 바로 한양굿의 가망청배는 바로 산신을 모시는 거리라는 것이다. 그리고 산신은 바로 국조 단군 왕검으로 가망은 국조 단군이나 한웅천왕을 일컫는 말일 것이다.
그러나 언제부터 단군을 의미하는 감응이란 말을 사라지고 죽은 조상들의 영가를 나타내는 가망으로 변하게 되었는지 알 수가 없다.
또한 <무당내력>에 감응이 단군에서 고려의 최영장군으로 바뀐 것은 시대적인 상황에 따라 변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성계의 조선이 무속을 탄압하고 경멸하여 무교인들을 천민으로 몰락시키고 그와 함께 무속을 하층민들의 신앙으로 전락하였기에 끝까지 조선에 저항하다 비장한 최후를 마친 최영 장군을 신격화하여 조선에 대한 서운한 감정을 무교인들이 드러낸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지금까지 한양굿의 가망거리가 어떤 신을 모시는 거리인지 명쾌하게 해석하는 학자도 없었으며 무교인 역시 분명한 설명 없이 그냥 죽은 조상들의 영가를 이야기 하는 것으로 전해 내려 왔을 뿐이다.
무교가 시대적 상황에 따라 살아남기 위하여 변천을 거듭하였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가망이 죽은 영가를 의미한다고 하여 틀렸다고만 할 수 없다.
그러나 언제부터 감응이 가망이 되었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본래 가망은 감응의 변음이며 감응은 단군왕검이나 한웅천왕을 의미하는 신이라는 것은 알고 있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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