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지창 칼럼

무교와 외래종교의 차이점

愚悟 2014. 3. 18. 13:58

무교와 외래종교의 차이점

 

 

 

 

우리의 정신을 빼버리고 남의 정신으로 사는 우리 민족, 남의 정신으로, 남의 시각으로 남의 잣대로 우리의 문화를 바라보고 판단하여 우리 것을 폄하하여 팽개치는 사람들로 가득 찬 대한민국, 언제 우리의 정신을 바로 찾아 우리의 정체성을 바로 세우는 날이 올 것인지 지금으로서는 아득하기만 하다.

 

오랜 역사를 가진 민족은 그 나라 특유의 고유한 문화가 있다. 그 문화는 그 민족의 오랜 종교로부터 시작되었고 발전하여 왔다. 즉 한 민족이 고유한 전통문화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그 민족만이 지니고 있는 특유의 민족종교가 있다는 것이다.

민족의 고유한 신앙이 종교로 존재를 하려면 그 종교가 어떤 종교인가를 나타내는 경전이 있어야 한다.

 

불교와 기독교, 그리고 이슬람교 등은 그 민족이 가지고 있는 고유의 경전이 있다. 이 경전들이 가지고 있는 공통점은, 이 지구상의 모든 인간들에게 삶의 행복과 사후 영혼을 구제받을 수 있는 희망을 주는, 없어서는 안 될 귀중한 책들이라고 착각하게 하는 것이다.

또한 이 경전들은 사용하는 인간들에 의하여 인간을 세뇌시키는 교과서로 변질되었다.

타 민족을 지배하면서 자기들과 같은 생각과 시각을 가지도록 동화시키거나 교화하는데 제일 먼저 사용하는 교과서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경전에서 강력히 내세우는 것은 자기 민족이 타 민족보다 우월한 하나님의 자손이라는 생각이다.

유태인 경전인 구약성경을 보면 자기들만 하나님으로부터 선택 받은 민족으로서 하나님의 자손이라는 선민의식이 강하게 표현되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우월감과 자신감은 구약성서가 없었다면 생각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구약성서는 그 시대의 선각자들에 의하여 절대 권력자의 다스림을 단지 신의 계시에 의한 다스림으로 기록한 것뿐이다.

 

절대 권력자는 이르지 않는 곳이 없으므로 어디든지 존재한다는 것이 신정정치다.

그 당시에 유태인에게만 신의 계시에 의한 통치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지구 곳곳에 많은 절대 권력자가 신의 계시로 통치를 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유독 유태인들은 해와 달을 자기들만을 위해서만 존재하고 자기들에게만 따스한 햇살과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주는 해와 달이라고 우기는 것과 같다.

 

해와 달은 어느 한 곳만 비추는 것이 아니라 지구 전체를 비추는 것이다. 그러나 지구상의 모든 종교는 해와 달이 자기들에게만 비추어 준다고 우기고 있는 식이다.

기독교와 불교가 가지고 있는 경전의 특성은 추구하는 바가 다르므로 타 민족을 교화하고 동화시키는 방법이 다르다.

 

기독교는 절대 권력자인 하나님을 내세워 강요하고 공격한다.

불교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내면의 진실 된 마음을 일깨워 서서히 접근한다.

그러나 방법이 다르다고 하여도 그 경전들이 가지고 있는 목적은 다 같이 타 민족의 교화와 동화다. 이 목적을 추구하는 자들이 절대 권력자인 신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것이다.

 

인간들은 종교의 참뜻에서 벗어나 그 종교를 가지고 이용하고 있는 인간들의 본성으로 나타난다. 백인들은 타고난 공격성을 선교사라는 이름으로 양의 탈을 뒤집어 씌워 지구상의 많은 타 민족들을 괴롭히며 식민지화하였다.

 

기독교가 인류의 구원을 목이 쉬어라 외쳐대지만 결과는 그러하지 못하고 탐욕스런 백인들의 배만 채워 주고 있다. 현재까지도 기독교를 믿는 나라는 백인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항상 전쟁의 공포가 따라다니고 있다.

 

불교는 창과 칼을 앞세워 타 민족을 공격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한번 들어오면 오랜 세월 빗방울이 바위를 뚫듯이 조금씩 본래의 모습을 변질시키다 나중에는 완전히 바꾸어 버린다.

절에 있는 칠성각, 산신각, 삼성각은 아직도 절에 남아 있는 수천 년을 이어 온 우리 전통종교의 모습들 중 일부분이다. 또한 절에 들어서면 제일 먼저 바라보며 들어서게 되는 곳이 대웅전이다.

 

<고려팔관잡기>에 보면, 불상이 처음 들어오매 절을 세워 이를 대웅이라 불렀다. 이는 승도들이 옛것을 세습하는 칭호로서 본래 승가의 말이 아닌 것이다.란 대목이 있듯이 대웅이라는 말은 본디 한웅천왕을 나타내는 말이다.

불교에 <대웅>이라는 말이 전혀 어울리지 않건만 두 눈 감고 모르는 체 하면서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는 것이다. 아니, 지금의 승려들은 진정 무슨 뜻인지 모르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불교에 이러한 현상이 일어난 이유는 이 땅에 들어오면서 민족종교를 믿는 백성들의 외면으로 뿌리를 못 내리자 이 땅에서 생존할 수 있는 방법의 하나로 권력자에게 붙어서 그 권력의 기반을 더욱 확고히 하여 주는 수단으로 스스로 종교를 이용하게 만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기독교는 하나님 말씀의 전파라는 명분 아래 백인들이 가지고 있는 탐욕이라는 본성을 극대화하고, 불교는 아직도 인간의 진실 된 마음이 추구하는 깨우침에 도달하지 못하고, 참된 도를 부르짖으며 세속화로 더욱 치닫고 있는 모순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면서 이 두 종교가 대표적으로 우리 민족종교인 무교를 배척한다.

 

특히 한국의 기독교인들은 다 같은 삼신할머니의 자손이지만, 우리들의 조상을 헌신짝 버리듯 쓰레기통에 던져 버리고 남의 조상을 우리 조상이라고 우기면서 자기들에게만 해와 달이 비추어지는 이 땅에서 유일한 하늘의 자손이라고 우기고 있다.

같은 민족이면서도 타 민족의 종교에 완전히 교화되고 동화된 사람들은 모순덩어리 그 자체를 진리로 알고 저돌적으로 맹목적으로 타 종교를 공격하고 매도한다.

 

불교와 기독교는 다 같이 지구가 멸망할 때를 경전에 기록해 놓았다. 두 기록의 공통점은 천문의 변화에서 지구가 멸망한다는 것이다. 이 또한 두 종교가 가지고 있는 모순과 거짓을 보여주는 단면인 것이다.

거대한 종교집단들이 종말론을 내세워 많은 신도들을 협박하고 있다. 이번이 아니면 다음 언제라는 식으로 끊임없이 종말론을 들먹거리며 공포에 떨게 하고 있으니 과연 종교의 참뜻인가 묻고 싶다

.

그러나 삼신신앙에서 비롯된 우리의 민족종교인 무교에서는 종말이라는 말은 찾아 볼 수가 없다. 타 민족을 교화하고 동화하려는 의도도 없다.

다만 민족의 경전인 <천부경><삼일신고>, <참전계경>을 잃어버리고 중심을 잃고 있을 뿐이다. <천부경>은 우주의 이치를 세계의 어떤 경전이나 천문서보다도 훌륭하게 설명하였다.

지금 미국에서는 <천부경>의 비밀을 캐고자 석학들이 연구에 몰두하고 있다.

우리가 팽개친 <천부경>을 미국에서는 국가적인 차원에서 연구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하다가는 <천부경>을 공부하러 미국을 가야 할 경우가 생길 것이며 <천부경>으로 미국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아오는 일이 생길 것이다. 이미 필자가 아는 지인은 러시아에서 천부경으로 박사학위를 받아 온 사람이 있다.

그 때가 되면 <천부경>은 우리의 경전이 아니라 미국의 경전 또는 강대국의 경전이 될 것이다.

 

<참전계경> 또한 인간의 366사를 절실하게 나타낸 경전이다.

이 모든 경전들을 하루빨리 무교의 경전으로 다시 찾아와 많은 연구가 있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무교에는 세상의 만물을 소중히 여기고 하찮은 곳까지 삼신의 뜻이 있다고 생각하는 상생의 철학이 있다.

이것을 生生之生이라 하며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의 가치를 인정하는 정신으로 무교의 기본 철학이다.

이러한 철학이 무교의 근본이요 참뜻이라는 것을 무교인들이 깨우쳐 실행한다면, 무식한 장사꾼이 되어버린 지금의 무당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무교의 몰락과 더불어 무당들이 받아온 멸시와 비난은 모두 우리 스스로가 자초한 결과인 만큼 지금이라도 내가 모신 신이 최고라는 쓸데없는 아집에서 벗어나야 한다.

자기를 중심으로 세를 확장하여 권력으로 삼으려는 어리석은 인간들이 설치는 지금의 현실에서 벗어나야 한다.

이러한 아집과 독선에서 벗어나 무교의 발전을 위하여 무엇을 할 것인가를 깊이 생각하고 실천할 때 비로소 무교가 종교로 자리 잡고 온 국민들이 따르는 민족종교로 거듭 날 것이다.